리투아니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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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ietuvos sienos 1009-2009 - LDK žemėlapiai. History and borders of Lithuania.

고대에는 슬라브인과 비슷하게 발트 신화 다신교를 믿었다. 고대 슬라브 신화의 페룬에 해당하는 최고신 페르쿠나스(Perkūnas)를 숭배하는 전통이 무려 14세기까지 이어져왔다. 12세기까지 부족끼리 갈라져 통일이 되지 않는 상태였지만 1236년 민다우가스에 의해 통일이 된 후 리투아니아 군주들은 결혼 동맹을 빌미로 상속을 주장하는 한편 가톨릭이나 정교회로 개종하는 척 하면서 러시아 공국과 튜튼 기사단을 기습공격하여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그에 보복하는 의미로 튜튼기사단에서 여러차례 십자군을 보내기도 했다. 이들의 다신교 신앙은 폴란드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이루게 되는 시기까지 이어졌으며, 이때 야기에우워 왕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수도 빌뉴스의 페르쿠나스 신전과 그 주변을 둘러싸던 삼림[1]을 죄다 밀어버림으로써 기독교 국가로 이행하게 된다.

14세기에 들어서야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이었지만 신앙심은 무척 깊다. 도시 중앙에 가톨릭 성당들이 많은게 특징. 그리고 이들의 신앙심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유적지가 리투아니아 제4의 도시인 샤울레이에 있는 '십자가 언덕'이다. 십자가 언덕은 18세기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러시아에 의해 분할당했던 시절에 사람들이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에 유래됐고, 소련 치하에 있던 시절에 민족의 성지로 꼽히기도 했다.[2] 그런데 소련 붕괴 이후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교회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여하튼 12세기 통일한 이래 리투아니아는 동유럽 지역의 큰 손으로 자라났고, 앞서 언급된 정치적 수법을 통해 러시아 공국들을 지속적으로 털어먹으며 영토를 확장하였고, 13세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우크라이나 지역까지 집어삼킴으로써 오늘날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되지 않는 대국으로 거듭난다. 같은 시기 폴란드와는 우크라이나 지방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관계였으나, 결과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리투아니아 쪽. 이런 리투아니아의 전성기는 이와 같은 영토 확장이 중지되고, 동쪽에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강국이 들어서면서 끝나고, 모스크바와의 패권 다툼에서 지속적으로 밀리자 단순히 동군연합의 개념이었던 폴란드와의 관계에서 아예 나라를 합치는 연합왕국 체제로 들어가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폴란드와 연합하여서 리투아니아는 대홍수 이전까지 전성기를 누려왔지만 한편으로 문화적으로 폴란드에 동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홍수 이후로 점차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1700년 리투아니아 내전이 터졌다. 1700년에 일어난 리투아니아 내전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구성국이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몇 개의 마그나트(대귀족) 가문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다. 17세기 말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가장 권세를 떨치던 사피에하 가문에 맞서 라지비우 가문, 비쇼베츠키 가문, 파시 가문, 오긴스키 가문의 네 가문이 내전에 참가했다.

사피에하 가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많은 고급관직을 독점했었는데, 1700년 당시 카디메슈 얀 사피에하가 리투아니아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미하우 사피에하는 리투아니아 궁내청 장관, 베네딕토 파비우 사피에하는 리투아니아 재무부 장관의 지위에 있었다. 사피에하 가문은 궁정에서 큰 발언력을 가져 다른 대귀족 가문에는 불리한 법령을 제정, 실행하여 다른 가문을 공격했다.

이러한 일은 보다 약한 대귀족과 일반 귀족들에 의한 반 사피에하 연합을 결성하는 결과를 낳았고, 사피에하 가문은 11월 18일에 오르케니키에서 귀족연합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여, 미하우 세르바치 비쇼베츠키에게 가문의 본거지인 루쟈누이 궁전이 파괴되었다. 이후 사피에하 가문은 대공국 내에서 패권을 상실하여 두 번 다시 이전의 지위로 돌아가지 못했다. 내전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정치불안이 계속되어 여러 대귀족 가문들이 사피에하 가문이 상실한 관직과 영지를 둘러싸고 싸우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쟁의 영향으로 인해 폴란드 리투아니아 공화국은 곧이어 시작된 대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의 군사원정 진격로가 되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패권을 상실한 사피에하 가문은 반국왕파의 리투아니아 연맹을 조직하여 스웨덴과 결탁해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분열을 초래했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에 합쳐진다.

적백내전 당시 독립했지만 1920년대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땅이라며 동맹을 풀고(...) 쳐들어와 안 그래도 독립된지 얼마안돼 군사력이 보잘 것 없던 두 나라만 서로 죽어라 싸우면서 같이 엉망이 되었다. 되려 적대국인 소련이 둘을 중재하면서 더 이상 같이 싸운다면 둘 다 뭉갠다고 협박하자 겁먹은 폴란드에서 순순히 물러서긴 했으나 이때 스탈린이 오히려 교묘히 두 나라의 이간질을 배후조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하간 폴란드가 빌뉴스를 점거하고 뒤통수를 때린 이래[3], 1920년-1939년 사이 리투아니아의 수도는 카우나스였다. 양차 대전 중의 기간에 빌뉴스는 폴란드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지만 리투아니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빌뉴스를 법적 수도, 카우나스를 임시수도라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1938년의 '최후통첩' 때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는 국교가 없었고, 교통, 통신, 우편까지도 완전히 차단되었다. 1938년 봄에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의 '최후통첩'을 받아들여 국교를 재개하였다. 하지만 국교 정상화에도 불구하고 그 해 5월의 새 헌법에서도 여전히 빌뉴스를 정식 수도로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 파란은 일어나고 폴란드는 독-소에 양분된다. 그렇게 1939년 9월의 폴란드 점령 후 리투아니아와 소련은 '리투아니아-소련 상호원조조약'을 체결, 리투아니아는 소련의 힘을 빌려 빌뉴스를 수복할 수 있었다. 다만 항구지역인 메멜란트는 독일에게 반환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은 500년간 프로이센의 국민으로 있어왔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독일에서 찾았으며 리투아니아 또한 메멜을 반체제인사들의 유형지쯤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국방력이 엉망이 된 끝에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0년, 일단 형식상으로는 '자발적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그러다 1년 후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즉각 독일과 연합하였지만 독일이 패배하면서 다시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전쟁 이전에 리투아니아에 살던 유태인의 91%인 19만명이 학살되고, 소련에 대항하던 게릴라들[4]은 물론 죄 없는 일반 양민들까지 정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 정치범 수용소에 강제수용당한 것은 리투아니아의 슬픈 흑역사. 이런 리투아니아의 슬픈 역사를 보고 싶다면 수도 빌뉴스에 있는 KGB박물관을 꼭 방문하길 바란다.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인 1991년에 독립했다. 에스토니아 항목에서도 설명됐지만 1989년 발트 3국이 독립하기 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거쳐 빌뉴스로 이어지는 약 600km를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인간 띠를 이은 '발트의 길'은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유명하다. 발트의 길은 동원된 인원 수와 인간 띠가 이어진 거리가 그 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게 소련에게 당한게 많음에도 소련 시절 잔뜩 만들어둔 스탈린 및 레닌 동상과 흉상은 하나도 없애지 않고 유료 공원(!)에 전시하고 있다. 이웃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 이런 흔적들을 마구잡이로 부숴버린 거와 대조적. 우습게도 이걸 유료로 보게하니 이것들을 조각한 러시아 조각가들이 입장비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했는데, 그렇게 요구한 조각가들의 작품들은 공원 밖에 놔둬서 거저로 구경하게 만들어버렸다.

2004년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EU에 가입했을 때 같이 가입을 했고 같은 해에 NATO에도 가입했다. 현재에도 유럽연합과 나토 양쪽 다 가입한 회원국이다.

2 관련 항목

  1. 로무바(Romuva)라고 불렀는데, 현대 리투아니아의 고대 신화 재현운동을 하는 단체 이름이기도 하다.
  2. 역설적으로 리투아니아의 민족 정체성과 신앙심은 폴란드와의 연합왕국이 무너진 뒤에 핍박받으면서 더 강조되었다. 하긴 민족주의가 다 그렇긴 하다.
  3. 심지어 괴뢰국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까지 만들었다.
  4. 약 6만명 가운데 2만명은 필사적으로 죽기 아니면 싸우기로 굴자 대대적으로 군대를 보내 마구잡이로 폭격하여 아주 몰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는 시베리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