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역사

북유럽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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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세


Chapter 5 : Denmark's history

역사적인 첫 등장은 약 800년경 프랑크카롤루스 대제의 군대를 고드프레드 왕이 물리친 기록에서 나타난다. 811년 프랑크 왕국과의 조약으로 국경선을 확립하고 이후 왕국이 해체상태에 있다가 하랄 왕에 의해 재통일 되면서 최초로 덴마크라는 국가명이 등장한다.
이후 1013년 잉글랜드를 정복, 크누트 대왕 때는 노르웨이와 잉글랜드 왕위를 겸하는 대국이 되었으나 곧 분열되어 이후 스웨덴, 노르웨이, 한자동맹과의 경쟁 속에서 북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영토인 스코네(Skåne) 지방과 외레순(Øresund) 해협 통과세로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부로 경쟁에서 선두를 독점하였다.

최고의 전성기는 마르그레테 여왕(재위 기간 1387~1412)의 통치기. 그녀는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의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으로 덴마크의 여왕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인 노르웨이 하콘 6세의 사후, 아들 올라프 2세의 섭정으로 덴마크를 통치 하다가 아들의 사후 1387년 덴마크, 노르웨이 왕위에 올랐으며, 남편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이어 1389년 스웨덴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1397년 3국은 '칼마르 동맹'이라는 동군연합을 구성하였으며 1523년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왕위 계승은 첫 번째로 세 나라의 왕위 계승권자들의 씨가 말라 적법한 왕위 계승권자가 마르그레테 여왕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의 상업은 독일의 한자동맹의 약진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기에 한자 동맹의 위협에 맞서 스칸디나비아 세력들이 연합한 것이 바로 칼마르 동맹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칼마르 동맹이었지만 이 동군 연합은 시작 단계부터 후계자 부족으로 골머리를 썩었다. 마르그레테 1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 사후 칼마르 동맹의 단결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마르그레테 1세가 후계자로 지목한 에릭 7세(재위 기간 1412~1440)의 정통성은 발데마르 4세의 외증손자[1]라는 매우 희박한 혈연 뿐이었다. 그나마 자식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겠지만, 그 또한 자식이 없었다. 점점 늙어가는 왕이 후사를 볼 가망이 없자 차기 국왕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고, 결국 1439년 환갑을 앞둔 나이의 에릭 7세는 안습하게도 세 나라의 귀족들에 의해 폐위 당하고 외조카 크리스토퍼가 칼마르 동맹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쫓겨난 에릭 7세는 예틀란트 섬에서 약 10년간 해적질(...)을 하다 고향인 폼메른으로 돌아가 죽었다.

이렇게 선출된 크리스토퍼 3세(재위 기간 1440~1448) 또한 자식 없이 요절하게 되고, 왕위 계승을 두고 칼마르 동맹의 세 나라는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덴마크인들은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티안 1세(재위 기간 1448~1481, 스웨덴 1457~1464)를 추대했으나, 스웨덴은 현지 귀족인 카를 크누트손 본데를 카를 8세로 추대하면서 서로 전쟁을 치르게 된다. 노르웨이는 처음에는 카를을 지지했으나 곧 올덴부르크의 크리스티안으로 편을 바꾸고(...) 이는 곧 전쟁을 의미했다.

덴마크에서 선출된 크리스티안 1세는 1481년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다스렸지만, 스웨덴에서 선출된 카를 8세(재위 기간 1448~1457, 1464~1465, 1467~1470)는 재위 기간을 보면 알다시피 덴마크-노르웨이 연합과의 전쟁으로 왕좌에서 두 번이나 쫓겨나고, 다시 복위하는 막장을 치르게 된다. 1470년 이후 스웨덴은 반독립 상태에 들어갔으며, 덴마크의 한스 1세가 1497년에 선출될 때까지 약 27년간 준독립 상태에 들어가 귀족들의 권력 암투에 빠져들었다.

결국 1520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가 본격적으로 대군을 이끌고 스톡홀름을 점령하며 대대적인 사면을 약속하며 스웨덴의 통치를 안정적으로 확고히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고운 말과는 달리 스웨덴 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폭정과 폭압이었으며 결국 1523년 스웨덴 귀족 구스타브 바사가 이끄는 독립군에게 패하면서 스웨덴을 상실한다. 이후 스웨덴과는 북방전쟁 내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계속 싸웠다. 노르웨이 지배는 19세기까지 계속 이어졌으나 나폴레옹 전쟁에서 줄을 잘 못 서는 바람에[2]1814년 스웨덴의 침공을 받아 노르웨이를 스웨덴에게 넘겨주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을 두고 독일 국가들과 두 번이나 전쟁을 벌인 끝에 1864년 이 지역도 할양 하고서는 이후에는 완전히 열강의 자리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게 되었다(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북부 슐레스비히(Nordslesvig)는 주민 투표를 통해 다시 덴마크로 돌아왔다).

2 덴마크 식민제국

실존했거나 현존하는 식민제국 목록
러시아영국덴마크네덜란드미국벨기에스웨덴쿠를란트-젬갈렌독일베네치아
스페인오만오스만이탈리아일본포르투갈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청나라제노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카리브해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1666년에 카리브 해의 세인트토마스 섬을 점유, 72년에 완전히 정복하여 이 곳을 거점으로 무역 활동을 하였다. 덴마크의 식민 지배는 1917년 이 섬을 미국에 팔아넘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땅은 현재는 미국령이다. 인도 동남부 지역을 식민지로 두기도 했지만, 나폴레옹 전쟁 직후 스웨덴에게 노르웨이를 할양 하면서 식민지 경영이 어려워지자 쿨하게 영국에 팔아넘겼다. 여담으로 스웨덴과 덴마크 사람들은 노예 사냥꾼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3 근대

2차 대전 때에는 독일의 침략을 받았다.[3][4] 덴마크인들은 독일에 대해 대체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하였으나 1943년 독일이 덴마크에 대해 직할 통치를 시작하면서 폭력적인 저항의 빈도가 늘어났다. 낮술이라도 거하게 들이킨게 아닌 맨정신의 사람으로서는 저런 넘사벽의 덩치 차이를 냉엄한 현실로 인식하고 독일의 점령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지만, 대부분 덴마크인들은 오리지널 순수 아리아인들에 대한 히틀러의 열렬한 어필과 구애에도 불구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점령군들을 대했다.[5] 전쟁 초기 히틀러의 어그로를 끈 사건이 터졌는데, 히틀러가 당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의 72세 생일을 축하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크리스티안 10세가 보낸 답장은 'Spreche Meinen besten Dank aus. Chr. Rex'였는데, 번역하면 '매우 고맙다. 크리스티안 10세'이다. 기나긴 장문의 편지에 대한 대답이 이것 뿐이자 빡친 히틀러는 코펜하겐 주재 독일 대사를 소환하고 덴마크 대사를 독일에서 추방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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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10세는 낙마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덴마크의 거리를 말을 타고 순회했다고 한다. 일종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작용했던 셈.

이전 문서에는 소위 '크리스티안 10세의 별'이라 불리는 미담을 그대로 수록해놓았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미담에 불과하며, 정확한 근거가 없는 하나의 도시전설과도 같다. 해당 미담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당시 나치는 덴마크의 유대인들에게 노란별을 달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덴마크와 크리스티안 10세는 유대인을 보호한답시고 전 국민에게 유대인의 상징 노란별을 달라고 명령을 내려[6], 이 때문에 나치도 덴마크에 사는 유대인들은 어쩌질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아름답지만 단순한 속설에 불과하다. 먼저 나치는 덴마크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불간섭주의로 일관하여 덴마크 유대인에게 노란별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미담의 근거는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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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스웨덴 신문에 실렸던 카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
"What shall we do, your Majesty, if Scavenius* says that our Jews also have to wear yellow stars?
Christian X replies: ‘Then we’ll probably all have to wear yellow stars.’"

번역하자면 :
"폐하, 만약 스카베니우스[7]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노란별을 달라고 하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크리스티안 10세는 대답했다: '우리 모두가 노란 별을 달아야겠지.'"

여하튼 이러한 미담에 따르면, 전 국민에게 노란별을 달라 지시한 것에 대하여 독일 대사가 따지고 들자 크리스티안 10세는 "이 나라에서는 짐이 히틀러요! 그리고 이 나라 국민의 95%는 모두 유대인 혈통이라오! 게다가 짐이 덴마크에서 최초의 유대인이요!"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흔한 바이킹의 후예의 패기 덴마크 유대인들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 것은 1943년, 독일이 덴마크를 자치령에서 직할령으로 바꾼 후였다. 이후로도 주변에 있는 (나름) 중립국들에 대한 독일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추방과 숙청 등이 일어나곤 했으나, 덴마크 사람들은 덴마크 내 유대인들도 전부 자국민으로 인식, 덴마크 전역의 경찰과 국민, 왕실이 사비를 털어 유대계 덴마크인들을 보호하거나 국외로 따로 탈출시켰다. 그로 인해 덴마크에 거주하던 유대인 중 95%가 덴마크로 들어온 독일의 손을 피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4 현대

5 관련 문서

  1. 에릭의 외할머니가 발데마르 4세의 딸이었다.
  2. 아니, 조용히 살려고 해도 '저 새퀴들 해군도 제법 쓸만한데, 나폴레옹한테 줄 대면 어쩌지? 라고 생각한 영국 깡패 놈들이 두 번씩이나 넬슨을 앞세우고 수도 앞바다까지 쳐들어와 깽판을 치며 덴마크 해군을 개발살내 놓으니, 당연히 빡친 덴마크가 프랑스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3. 독일의 공격 시작 후 덴마크 항복까지 덴마크군 희생자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부상 20명. 전사 16명.
  4. 종전 후 덴마크가 전국의 철도선 폭을 독일의 철도선보다 2인치(=5.08cm) 정도 줄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독일과 덴마크 모두 표준궤를 사용하고 있으며, 고속 열차가 절찬리에 직통 운행 중이다. 게다가 덴마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인 1908년에 미터법을 표준으로 삼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당시 야드파운드법 단위인 인치를 사용할 일도 없었다.
  5. 애초에 점령당하지 않은 스웨덴과 아이슬랜드는 제외하고, 다른 주축국 치하의 노르딕 국가인 노르웨이도 저런 히틀러와 나치 인종주의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라를 침략해 온 남쪽 사촌들에게 지극히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6. 다른 입헌 군주국과는 달리 왕권이 강했고 이는 지금도 유효한 나라다.
  7. 에릭 스카베니우스. 당시 독일이 내세운 친독 성향의 덴마크 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