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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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1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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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첫 왕조의 설립은 약 800년대 현재의 스웨덴의 중부 멜라르달렌을 기반으로 한 스베아 왕국으로 현재 스웨덴어로 스웨덴을 부르는 Sverige는 Svea에 국가인 Rike란 단어가 합쳐져서 생성되었다. 하지만 이들 왕국은 소규모 귀족의 연합체였으므로, 스베아 왕국을 형성한 전 지역을 통치하던 첫 국왕은 에릭 세게르샐이었으나 이 당시에 '국가'라는 것은 각각 독립된 지방들의 연합체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까지도 스베아 왕국의 국왕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그들 중 그의 아들인 울로프 솃코눙(Olof Skötkonung, 재위 994 추정~1022 추정)은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크리스트 교를 신봉하는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울로프 솃코눙의 뒤를 아들 둘이 계승하고는 스웨덴의 옛 윙링아(Ynglinga) 왕조는 끝나게 된다네이버 스웨덴 약사

한자 동맹의 위협에 맞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는 1387년부터 칼마르 동맹으로서 연합하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세 나라 귀족들의 느슨한 연합이었던 칼마르 동맹은 약 한 세기에 걸친 전쟁으로 와해되었다. 1520년 스웨덴 군을 격파한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가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귀족 80여명을 집단 학살하는 사건을 저지른다.[1] 여기서 화를 면한 젊은 귀족 구스타브 바사(Gustav Vasa)는 독립군을 구성하여 덴마크와 독립전쟁을 벌였고 결국 승리하여 1523년 구스타브 1세로 즉위 하여 스웨덴 왕국은 독립하였다. 칼마르 동맹 시기의 역사는 덴마크/역사를 참조.

독립전쟁 당시 덴마크 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구스타브 바사를 스웨덴의 중부 지역인 멜라르달렌 농민들이 스키로 탈출시켜 준 것을 기려 당시 바사의 도주 코스 90Km를 그대로 달리는 구스타브 바사 노르딕 대회가 1922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2 근세

실존했거나 현존하는 식민제국 목록
러시아영국덴마크네덜란드미국벨기에스웨덴쿠를란트-젬갈렌독일베네치아
스페인오만오스만이탈리아일본포르투갈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청나라제노바

최고의 전성기는 1611년 사자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즉위 후. 천재, 괴수, 후대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의 먼치킨적 인물[2]이었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러시아, 폴란드와의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30년 전쟁에서는 가톨릭 리그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괴력을 발휘하였다. 심지어는 그가 전사한 뤼첸 전투에서도 이겼다(…).[3] 이 전쟁은 후에 프랑스가 30년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막을 내린다.

30년전쟁을 통해 이후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기의 발전은 이미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소유한 데다가 여기에 더해서 30년전쟁에 개입한 결과 서 포메른, 오데르 강, 베저 강 입구를 장악하면서 이른바 북방의 사자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칼 10세 구스타브 시기에는 폴란드, 덴마크와 다시금 전쟁을 치러서 리보니아와 스코네 일부 지역을 획득하였다. 스웨덴은 1675년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덴마크 및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도 영토를 상실했다가 루이 14세의 중재로 독일 북부의 포메른과 현재 스웨덴 남부인 스코네 지역을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명실상부한 유럽의 중재자요 패자로 부상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프랑스의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웨덴이 지속적으로 강국으로 남아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스웨덴에 유리한 방향으로 제시된 바가 크다.

구스타브 2세는 전쟁뿐만 아니라 내정 개혁에도 힘썼으며 특히 이전까지 용병이 주축이 되었던 전쟁에서 귀족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그에따른 군사를 징병할 수 있는 징병제를 채택하여 상비군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이후의 동유럽의 군주들이, 특히 이시기 상업이 잘 발달되지 않았던 러시아나 브란덴부르크가 이를 차용하여 후에 이들 국가들이 강대국으로 나아가고 전쟁 양상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여러 번의 북방전쟁에서 큰 이득을 본 이 시기의 스웨덴은 잉그리아(Ingria)라는 이름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일부, 핀란드와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를 지배하였으며[4], 독일 북부 포메른 지방[5] 또한 차지한 대국이었다. 군사력으로도 그야말로 북유럽의 패자에 걸맞아서 거의 반세기 동안 계속된 전란에서 덴마크[6], 폴란드[7], 러시아를 개발살냈다. 그러나 구스타브 아돌프의 유일한 자식인 크리스티나 여왕[8]이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스스로 퇴위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 바사 왕조의 맥이 끊어져 버렸다(당시 스웨덴 국법으로 국교는 복음 루터교였고, 이 복음 루터교가 아닌 왕족은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이후 스웨덴의 국왕은 크리스티나 여왕의 외사촌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10세가 계승하게 된다.

여하튼 30년 전쟁과 이후의 덴마크와의 전쟁으로 스웨덴이 급성장하자 이를 아니꼽게 여겨 폴란드왕 작센후 아우구스트 2세와 러시아왕 표트르 1세는 동맹을 체결, 1700년 대북방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재능을 타고났던 스웨덴 왕 칼 12세의 반격을 받아 초전에 러시아군은 털려버렸고, 이어진 폴란드에 대한 집중 공격에 아우구스트 2세는 폐위 당했다.

그러나 수십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한 물적, 인적 소모는 스웨덴의 국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고 1709년 군세를 재정비한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스웨덴이 수세에 몰리자 폴란드도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복위하여 반격에 나섰고, 잘 나가는 나라는 일단 뭉개고 본다는 유럽의 전통에 따라 덴마크, 프로이센, 대영 제국 하노버까지 전쟁에 가세하여 스웨덴을 철저하게 처발라버리면서 결국 한때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스웨덴은 핀란드,포메른을 제외한 발트 해 영지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쪼그라들게 된다.

3 근대

이후 혼란한 내정을 겨우 수습하고 1802년 나폴레옹 전쟁 때 대불동맹에 참가하나 괴수 나폴레옹에게 두들겨 맞고 포메른을 빼앗겼으며 1808년에는 러시아에게 털려 핀란드까지 빼앗겼다. 결국 쿠데타 끝에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폐위되고 대신 즉위한 칼 13세는 늙어서까지 후손이 없어 스웨덴 의회는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프랑스 육군 원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를 칼 13세의 양자로 추대해 칼 14세 요한(현재 스웨덴 왕실인 베르나도트 왕조의 첫 왕)으로 즉위 시켰다.

그러나 1812년 칼 14세 요한은 대불동맹에 가담해 나폴레옹의 뒤통수를 쳤고, 덴마크를 두들겨 패서 노르웨이를 차지한다. 이후 노르웨이는 자치령의 형태로 스웨덴의 속국이 된다.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한 이후로 스웨덴 역사에서 전쟁이란 단어는 사라졌고, 이후에 보통 선거권 확립과 함께 사회민주노동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그 유명한 스웨덴식 복지국가의 틀을 닦아냈다.

1875년에는 덴마크와 함께 스칸디나비아 통화 동맹을 설립하여 독일의 금본위제로의 전환에 대해 보호하였다.

스웨덴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산업혁명을 시작했는데, 특히 당시 키루나의 철광산과 새로운 수력 발전 방식을 기반으로 산업 생산량을 무섭게 늘려나가기 시작한다. 이들의 생산량은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에 급증하는데 이는 독일의 u보트 계획으로 인하여 영국의 직물들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내수시장에서 스웨덴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으로의 철 수출이 최고조에 다달랐다고 할수 있다. 실제로 그 탓인지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제지와 펄프 산업은 증대되는데 반해서 철 수출양은 감소한다. 이때 이후 일본처럼 스웨덴은 완전한 산업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비동맹 무장 중립을 선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피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무장 중립을 유지했으나 독일과 철광석 거래와 같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덕에[9] 라울 발렌베리[10]라는 스웨덴판 오스카 쉰들러가 출현하기도 했다. 발렌베리는 자신이 외교관 신분이라는 것을 이용해 수용소에 끌려갈 유대인들에게 가짜 스웨덴 여권을 돌린 뒤 우방국의 국민을 왜 괴롭히냐며 구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전 직후 난민 보호를 위해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소련군 사령부로 향했고 그 후로 행방불명 된다. 10여 년 후에야 스메르시에게 체포, 구금된 뒤 수용소에서 병사했고 시신은 화장하였다고 소련 측이 밝혔으나 시신이나 유품, 그 어느 것도 인도되지 않아 아직도 많은 점이 베일에 싸여있으며 그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었다.[11]

1차세계 대전이 끝난 1917년과 1918년은 스웨덴에게 있어 가장 격동적인 해였는데, 이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서 스웨덴 사회민주당 내부의 볼셰비키 세력이 좌익사회당(vänster partiet) 형성 하면서 내부에 있던 폭력 혁명 세력이 빠져나갔고, 또한 1918년의 독일의 패배로 인해서 독일을 모델로 삼고 있던 보수주의 세력또한 그세가 급격히 쪼그라 들게 된다. 이후 사회민주당이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1921년 여성 참정권을 획득하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장기집권을 창출하게 된다.

또한 스웨덴은 이 당시에 나치가 노르웨이로 갈려고 하는데 철도를 내지 않으면 침공하겠다는 통보에 키루나 산의 철광석과 철도를 빌려줘 빠르게 노르웨이가 나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 비판받는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악감정이 남은 노인 분들이 조금 있다고 한다

4 현대

제2차 대전 이후에도 NATO, WTO에도 가입하지 않고 중립국의 지위를 고수하며 북유럽 국가들의 중립 정책, 소위 노르딕 밸런스(Nordic Balance)를 선도했다. 하지만 친미국적 정책을 취해 소련으로부터 서방 세계의 북방측 방벽 역할을 하였다.[12] 스페츠나츠의 주요 실전 훈련용 침투 루트가 아프가니스탄, 체첸과 더불어 스웨덴 방면이었으며, 이 때문에 스웨덴 군의 비(非)전시 대(對)스페츠나츠 교전 비율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스페츠나츠가 하수구를 통해 스웨덴 왕궁 정문 앞까지 침투했다가 경비대에 발각되어 쌍방 총격전 끝에 도주한 스웨덴판 1.21사태도 있었을 정도. 1986년에는 현직 총리인 올로프 팔메가 백주 대로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아 암살되는 사건도 있었다. 다만 이 사건의 범인은 현재까지 오리무중인 상태다. 여하튼 전쟁 이후로도 스웨덴은 복지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하고 여러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해서 매우 매우 잘나갔고, 스웨덴이 난민을 잘 받아들이게 된 나라가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금부담이 과중해지면서 점차 사민당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고 1970년대 초반에 원자력 발전 건설 논란까지 겹치면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잠깐 보수 3당의 연합정권이 수립하게 되었다.[13] 그리고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경제가 다소 침체되었다가 1980년대 중후반에 오일쇼크의 후유증을 그럭저럭 극복하였다. 사실 이 때 못나갔다해도 1973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1인당 GDP를 추월한데다가 삶의 질도 그럭저럭 상위권을 유지했기에 이전에 비해 비교적 못나간 수준이지 전체적으로 잘나갔던건 맞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자산가격이 급속히 상승하면서 잘 나갈듯하다 1990년대 초반에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급속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일본처럼 침체가 장기화 되지는 않았고 9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성장세를 기록하게 되었다.

공산권 붕괴 후에는 중립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였고 95년 유럽연합에 가맹하였으나 NATO에는 가입하지 않고 유로화 사용도 거부하는 등 아직도 중립국 시절의 정책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서 세계적 경제위기와 이민자의 급증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이, 선거에서 극우파[14]의 약진으로 확인되면서 전 세계에 놀라움을 안겨 줬다.

의외로 17세기 한창 리즈시절이었을때는 아프리카 가나 해안과 카리브, 남아프리카,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뉴 스웨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델라웨어지역과 카리브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생바르텔레미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뉴 스웨덴은 이웃에 있던 덴마크인들와 네덜란드인들이 소식을 듣고 레이드를 오는 바람에(...) 뺏겨버렸고 18세기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영국에게 양도하고 19세기에는 생바르텔레미를 프랑스에 매각하면서 제국주의가 한창 융성하던 19세기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처럼 떵떵거리는 거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이는 덴마크도 마찬가지라서, 가나 해안과 인도에 무역 회사를 세우기도 했다고 했지만 19세기에 모두 팔고 가만히 있게 된다.

5 관련 문서

  1. 이 사건을 보통 단순하게 '스톡홀름 대학살'이라고 옮기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명칭인 Stockholms blodbad를 직역하면 스톡홀름의 피목욕이라는 명칭이 된다. 위키피디아 항목
  2. 내정과 외정 모두 상승세로 이끈 명군이었다. 스웨덴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이끌어낸 제왕이었던 셈
  3. 다만 뤼첸 전투는 스웨덴이 전술적으로 승리하고 당면 전략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스웨덴 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피해는 비슷하거나 발렌슈타인 군이 오히려 더 적었다. 스웨덴 군은 국왕도 전사하고 정예 부대들이 크게 소모되어서, 이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 군이 증발해버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4.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혹은 그 북쪽의 현재 핀란드 국경 근처의 러시아 영토인 지역을 카렐리아(Karelia), 또는 카리알라(Karjala)라고도 한다.
  5. 현재 독일의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 주의 동북부 일부 지역.
  6. 스웨덴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북유럽 최강국이었으나 스웨덴이 강성해지자 망했어요.
  7. 대홍수라 불리는 2차 북방전쟁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8. 위로 세 명의 형제들이 있었지만 모두 사산 되거나 생후 1개월만에 사망했다.
  9. 그래서 전후 연합국에게 왕창 비난 받았다.
  10. 독일식 발음인 발렌베르크로도 알려져 있다.
  11. 참고로 그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재벌'로 유명한 스웨덴의 최대 재벌 발렌베리 가문(스웨덴 GNP 1/3 만큼의 매출액수를 내는 규모의 기업집단)의 사람이다.
  12. 그래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등 중립국 임무(?)를 게을리 한 적은 없다. 그런데 당시 비난 성명을 주도했던 올로프 팔메 총리는 결국 암살당한다.
  13. 다만 이 시절에도 사회민주당은 원내 1당을 기록했다.
  14. 다만 그렇게 부상했던 정당은 이미지 실추를 걱정해서인지 내부적인 자정 활동이 있었고 현재는 다른 나라 극우파에 비하면 극우파라기도 뭐한 사람들이 다수인 자들이 남게 되어 비교적 평범한 우익 정당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쓸려 나간 극우 인사들은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모여서 이전보다 더 노골적인 국수주의를 띄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