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히로모토

파일:/image/001/2015/02/28/PYH2015022800330064000 P2 99 20150228102204.jpg

이름오쿠보 히로모토 (大久保博元)
생년월일1967년 2월 1일
국적일본
출신지이바라키 현 히가시이바라키 군 오오아라이 정
학력이바라키현립 미토 상업 고등학교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4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세이부 라이온즈 (1985~1992)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2~1995)
지도자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8)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10)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2)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군 감독 (2013~201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15)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역대 감독
호시노 센이치
(2011 - 2014)
오쿠보 히로모토
(2015)
나시다 마사타카
(2016 - 현재)

1 소개

일본의 전 야구선수이자 야구 해설가, 연예인, 프로 골퍼, 야구 지도자. 뭐가 이렇게 많아?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연예인으로서의 예명은 데이브 오쿠보 (Dave Okubo, デーブ大久保)[1]

2 선수 시절

미토상고를 졸업하고 1984년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1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부터 장타력으로 주목받았으며, 입단 2년차인 1986년에는 미국 마이너리그 싱글A 팀 산호세 비즈(San Jose Bees)에서 연수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세이부에는 획고한 주전 포수 이토 쓰토무가 건재했기에, 주로 이토의 백업 포수나 대타로 출장했다.

그러다 1992년 시즌 도중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포수 나카오 타카요시(中尾孝義)[2]와 맞트레이드 되어 이적하게 되는데, 이게 오쿠보의 야구인생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요미우리에서 그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총애를 받으며 주전 포수로 맹활약했고, 올스타전에서 .300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야구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특히 오쿠보가 홈런을 때려낸 경기에서 요미우리는 무조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오쿠보가 치면 지지 않는다(大久保が打てば負けない)"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통산 성적은 10시즌 303경기 696타석 635타수 158안타 41홈런 100타점 75득점 타율 .249.

3 은퇴 후

1995년 시즌 후 28세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 그는 데이브 오쿠보 라는 예명으로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했다. 또한 탤런트로 TV에 출연하고, 프로 골퍼로도 뛰었다.

3.1 지도자 시절

그렇게 야구에서 멀어져 가는가 했는데, 2008년 친정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1군 타격코치로 야구계에 전격 복귀한다. 그 후 2010년에 세이부 2군 타격코치를 1시즌 맡다가, 2012년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타격코치로 선임되었다. 2013년에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어 2014년까지 2군을 지휘했으며, 2015년 시즌을 앞두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성적 악화와 지병을 이유로 물러나자 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개막전부터 한번도 A클래스에 진입하지 못하며 오릭스와 꼴찌를 다투다가 8월 28일에 사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결국 라쿠텐은 2년 연속 최하위. 일본판 이종운. 이종운은 그래도 극초반엔 상위권 했고 게다가 최종전까진 뛰고 경질되었는데... 후임 감독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마지막 감독이자 일본시리즈 준우승 2회이었던 나시다 마사타카.

4 논란

나카무라 타케야의 각성에 기여하는 등 타격코치로써의 지도능력은 상당한 수준으로써 야구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인물이지만, 문란한 사생활과 강압적 지도방식, 선수들에 대한 폭행 논란 등 여러 구설수에 끓임없이 오르내렸으며 심지어 자신에게 대드는 외국인 선수인 이람 보카치카"밖으로 나와!" 하면서 폭행하려 했을 정도로 기질이 다혈질에 강압적인 스타일이다.

2008년에는 내연녀와 혼외자녀까지 둔 사실이 드러나고 이 내연녀를 폭행해서 입건당하기도 했으며 2010년에도 선수들에게 강제 벌금을 먹이고 폭행까지 행사하는등 물의를 많이 일으켰다. 사실 알려진 정도가 이정도이지 오쿠보 히로모토가 선수들을 상습 폭행하고 욕설을 한다는 소문은 이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논란 속에서도 야구계에서 일감이 끓이지 않고 결국 프로야구 감독자리까지 꿰찼다는건 그런 논란속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높으신 분들에게 처세술을 잘 발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논란중 하나라도 한국프로야구에서 벌어졌다면 해당 선수나 감독은 야구계에서 일감을 얻는게 불가능해지는 상황인데 끓임없는 구설수 속에서도 결국 지도자 복귀에 성공하는걸 보면 한국 야구계와 일본 야구계의 분위기 차이일수도 있다. 거 참 동갑인 옆나라의 누구씨를 닮은 듯 하다 그래도 이 사람은 살인은 안 했지만

오쿠보의 이러한 행보가 가능했던 데에는 1992년 요미우리에서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오쿠보가 요미우리로 트레이드될 당시 요미우리는 4~5위권을 헤매는 중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우승만이 목표인 팀이 시즌 중반이 되도록 그 위치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되지 않고 후지타 모토시 당시 감독의 시즌 도중 경질설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자마자 오쿠보가 세이부에서 트레이드 되자마자 상술한 활약으로 팀을 상승세에 올려놓으면서 단숨에 우승 경쟁에 뛰어들게 했다. 비록 1위부터 최하위까지 9.5경기 차밖에 나지 않는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팀은 당시 노무라 카츠야가 이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우승을 내주고 2위에 머물러야 했지만, 만악의 근원 와타나베 츠네오 구단주가 친히 금일봉을 하사할 정도로 임팩트가 큰 활약을 했다. 사실 요미우리에서의 활약도 1992년 한 해 반짝이었는데 이 해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요미우리 OB회에서 조차 인정을 할 정도였고 타 팀 출신으로서는 그 어렵다는 5두품 인증[3](...)을 받는데 성공할 정도였다. 그래서 연예계 활동 당시에도 자이언츠의 본사인 NTV가 든든한 뒷배경으로 작용해 주는 등 요미우리에 잠깐 적을 두었던 다른 타팀 출신과는 달리 방송에서의 대접은 다른 요미우리 OB에 준하는 수준이었다.[4]

5 기타

  • 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운전면허 시험의 레전드라고 한다. 중형/대형/대형이륜 면허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1. 현역시절 뚱뚱한 체형 때문에 일본어로 뚱보를 뜻하는 데부(デブ)가 별명이었는데, 미국 연수 당시 통역이었던 와다 히로미 코치가 이 별명을 착안, 데부와 일본식 발음이 같은 데이브(デーブ, 데이브의 일본식 발음과 일치)를 영어이름으로 쓸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2. 한신 타이거스 스카우트 부장.
  3. 관련해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항목의 순혈주의 단락 참조
  4. 그보다는 1994년 일본시리즈 우승때 대타로 활약한게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