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쓰토무

(일본프로야구/감독)
세리그 감독 | 파리그 감독
70px나시다 마사타카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65px츠지 하츠히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65px후쿠라 준이치
(오릭스 버팔로즈)
70px이토 쓰토무
(치바 롯데 마린즈)
65px쿠리야마 히데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65px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matsuzaka517205.JPG
NHK에서 메이저리그 등 야구 해설을 맡던 시절.

20120110213508035.jpg
두산 베어스 수석코치 시절. 그야말로 뚱산의 전형적인 포수풍채 [1]

20150327182907502.jpeg
치바 롯데 감독으로서의 현재 모습.

치바 롯데 마린즈 No.83
이토 쓰토무 (伊東勤)
생년월일1962년 8월 29일
국적일본
출신지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시
학력구마모토현립 구마모토 공업 고등학교 -
사이타마현립 도코로자와 고등학교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1년 세이부 라이온즈 드래프트 1순위 지명
소속팀세이부 라이온즈 (1982~2003)
지도자세이부 라이온즈 1군 플레잉코치 (2002~2003)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 (2004~2007)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2012)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201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역대 감독
이하라 하루키
(2002 - 2003)
이토 쓰토무
(2004 - 2007)
와타나베 히사노부
(2008 - 2013)
치바 롯데 마린즈 역대 감독
니시무라 노리후미
(2010 - 2012)
이토 쓰토무
(2013 - 현재)
현직

1 개요

일본 출신의 전 프로야구 선수, 현 치바 롯데 마린즈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

2 선수 시절

147aa9d2.jpg
구마모토에서 학교를 다녔던 시절에는 외야수였으나, 발빠른 경쟁 학교 선수를 막기 위해 포수로 포지션이 변경되었다.

1980년 그의 모교였던 현립 구마모토공고는 그 유명한 아키야마 코지가 에이스로 군림했던 현립 야츠시로고교를 현대회 결승에서 꺾고 제 62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출장했는데,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네모토 리쿠오가 그의 포수 재능을 높게 사 세이부의 연고지인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에 있는 도코로자와고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그러고서는 동시에 세이부 구단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낮에는 연습을 하고 밤에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생활을 계속했는데, 이는 네모토 리쿠오 당시 단장의 주도하에 우수한 고등학교 선수를 입도선매하는 세이부 구단의 스카우트 전략으로 이러한 형식으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경쟁 팀의 스카우트 공세를 차단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2] 당시 세이부의 이런 전략은 드래프트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로서 말이 많았다.

어쨌거나 반은 연습생 반은 학생 생활을 거쳐 1981년 드래프트 1순위로 세이부가 지명하여 1982년도에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으며, 이후 2003년까지 22년 동안 세이부의 주전 안방마님으로 군림한, 일본프로야구의 손꼽히는 명포수. 다니시게 모토노부, 노무라 카츠야에 이어 일본프로야구 역대 포수 출장횟수 3위를 기록하고 있다.

포구시 일부러 소리가 나게 하려고 글러브의 얇은 웹부분으로 잡아온건 유명한 일화. 투수들이 들으면 내 공이 좋구나 생각하고 자신감이 붙는단 이유로 그랬게 했다고 한다. 심판도 소리에 속아 판정이 너그러워지는건 덤이라나.

2327경기를 뛰었으며 골든 글러브 포수부분을 11회나 수상하였고 1263번의 수비 기회에서 무실책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5번의 두자릿수 홈런 시즌을 포함해 통산 156홈런을 기록했고, 지금의 풍채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젊었을 적엔 발도 빨라서 데뷔 3년차이자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1984년에는 20도루(16실패)를 기록하는 등 5번의 두자릿 수 도루 시즌을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일본프로야구 포수로서는 역대 최다인 134도루를 기록했다.

여담이지만, 1985년 일본시리즈 당시 세이부의 마지막 타자이기도 했다. 이토는 6차전 마지막 타석에서 타자로 나와 투수 땅볼로 아웃되면서 한신 타이거스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결정지었다(...)

3 지도자 시절

세이부 황금시대를 이끈 수많은 스타들 중에서 세이부에서 작정하고 감독감으로 찍고 키운 선수다. 팀 리더 이시게 히로미치, 팀의 주포였던 아키야마 코지, 기요하라 카즈히로, 팀 수비의 핵이었던 츠지 하츠히코, 에이스였던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궈 타이위안, 이시이 타케히로 등등을 줄줄이 트레이드 내지는 FA 등으로 떠나보내면서도[3] 끝까지 지켜낸 게 이 이토였다.

2001년 시즌이 끝나고 히가시오 오사무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자 바로 감독자리를 승계시키려고 했으나, 이토 본인이 선수생활 연장에 대한 의지를 접지 않았던데다 제대로된 지도자 수업을 받지 않고 바로 감독자리에 취임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자, 본인의 뜻대로 선수 겸 코치로 2년간의 유예기간을 줘서 선수생활에 미련을 가지지 않게끔 배려까지 해줬다. 앞서 서술한 다른 선수들 같은 경우, 구단의 은퇴권고를 거부하고 현역생활에 미련을 보이면 가차없이 방출해서 팀을 떠나는 것을 방관했단 것과 비교하면 천지차이. 그래서 세이부 황금시대의 주축 선수들 중에 온전하게 세이부에서 커리어를 마감한 선수가 거의 없다. 이토의 후임으로 부임한 와타나베 히사노부조차도 선수생활의 말년은 야쿠르트 스왈로즈, 대만프로야구로 이적하여 현역생활을 연장해야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2002년부터는 선수 겸 코치로 2003년까지 활동하다가, 선수 은퇴 후 감독으로 부임한 첫번째 해인 2004년에는 세이부를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때 주니치 감독은 오치아이 히로미츠였는데, 오치아이의 감독 스타일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인 '오레류(オレ流)'로 알려져있던 데 비해, 이토는 이에 대비되어 세이부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기에 '레오류(レオ流)'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통파'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와쿠이 히데아키, 키시 타카유키, 호아시 카즈유키, 카타오카 야스유키, 나카지마 히로유키, 나카무라 타케야 등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팀의 세대교체를 도모하였다는 평가. 다른 팀으로 보내버린 황금시대의 주축 선수들 중에 지도자로 성공한 케이스가 거의 없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4] 이토를 감독으로 선택한 세이부의 선택은 성공작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역시절부터 차기감독으로 찍어놓고 다른 스타들은 받지 못한 배려까지 해주는 편의를 베풀어줬건만, 감독취임 4년차인 2007년 팀이 시즌 5위로 떨어지면서 세이부 감독에서 물러났다. 게다가 세이부를 떠나면서 구단 측이나 선수들과의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었던 모양으로, 현재 이토와 세이부 구단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 차기감독 감으로 찍고 22년 걸려서 키워놨더니 고작 4년밖에 쓰지 못했다.

2012년, 포수 출신답게 포수왕국 두산 베어스의 수석코치를 맡았다. 초보 감독인 김진욱 감독을 보좌하기 위해 영입된 듯. 하지만 야갤에서는 이토의 커리어가 워낙 대단한 까닭에 김진욱이 바지감독이라고 믿고 있다 대표적으로 "진욱! 칙쇼!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이혜천을 올리다니!" 드립 등(...) 2012년 DC 국내야구 갤러리 자짤에는 8개 구단 감독이 나왔는데 두산만 이토가 감독으로 나왔다.

하지만 두산에서는 정작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실제로 김진욱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텝들과의 의견차이가 너무 커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프로야구계에서도 고집세기로 유명하다고 알려진 사람이 물 건너 와서는 오죽했을까 싶다. 이에 대해 한국프로야구에 적응하려고 들지 않는단 소리도 있었다. 전형적인 국빠들의 모함. 결국 여름에 접어든 이후로는 팀내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최재훈 등의 일부 포수 유망주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준 것 빼고는 한 일이 없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두산에 있었던 시절을 찍은 다큐멘터리에서는 육성한 포수로 양의지만 나온다.

그래도 최재훈을 자신을 뛰어넘을 선수라며 아끼고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 그리고 최재훈은 2013년 넥센과의 준플레이프 3차전에서 완벽한 도루저지로 승리에 공헌하였고 4차전에서는 한점 차로 끌려가던 와중에 역전 투런 홈런을 쳐서 두산을 구하자 두산팬들은 그의 안목에 감탄했다.

두산 베어스에 있던 시절을 이토 본인의 시점으로 찍어 다큐멘터리로 방송했는데, 김진욱 감독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두산 베어스 내에서 겉도는 모습을 보였다. 가르침을 받기는커녕 알력다툼을... 하지만 선수들과의 사이는 좋았다. 정말로 다큐멘터리 하나 찍고 갔다. 이 떡밥이 나오자마자 돡갤에서는 명불허전 빠가진욱이라면서 김진욱을 깠다.

결국 2012년 시즌 이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하여 자리를 옮겼다. 한국 관광하러 왔다는 설이 기정사실화된 듯. 그리고 치바 롯데는 개막전에서부터 7월까지 퍼시픽리그 1, 2위에서 왔다갔다 하며 마치 원래부터 강팀이었던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1, 2012년의 약체팀이 대형 전력보강도 없이 하루아침에 강팀으로 바꿔버린 셈... 그걸 보는 두산팬들의 마음은 그저 씁쓸할 뿐. 두산 베어스 갤러리 등지에선 이런 유능한 분을 감독으로 올리는건 고사하고 그냥 일본으로 보내버린 프런트를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이토 거르고 돌커피사실 프런트보단 이토 쓰토무를 포수 인스트럭터 정도로 대한 코칭스태프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 근데 후반기 들어 힘이 점점 빠지면서 1위 라쿠텐과의 격차가 점점 커지더니 결국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밀려 3위로 2013 정규시즌을 마감했다.

2014년, 신예라고 하기엔 나이가 좀 많은 노망주 이시카와 아유무 말고는 죄다 폭망한 투수진, 외국인타자 루이스 크루즈,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말고는 밥값 못하는 타순에 허덕이며 4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2015년, 초중반 부진했지만,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괴물같은 13연패를 틈타 결국 3위자리를 차지하며 CS진출에 성공했다! 거기다가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까지 꺾었다! 이로써 계약을 연장하여 내년에도 얼굴을 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호기롭게 2005년, 2010년의 하극상 재현을 선언하고 올라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쿠도 키미야스 감독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떡실신당하여 2015년 일본시리즈 진출은 실패.

2016년에도 비록 소프트뱅크, 닛폰햄의 양강체제에 밀렸지만 꾸준하게 3위자리를 사수하고 2년 연속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 그룹의 경영권 다툼 등으로 인한 빈약한 지원으로 보강도 소프트뱅크에서 방출당한 제이슨 스탠드리지와 도움이 거의 되지 않았던 야마이코 나바로 정도를 제외하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안정되게 팀을 이끈 수완을 평가받아서 구단에서 2년 계약연장을 제시했다. 정작 감독으로 쓰려고 키웠던 전 소속팀에서는 4년밖에 못 썼다.

4 여담

이름의 한자를 한글독음 그대로 읽으면 SBS ESPN 캐스터 이동근과 동명이인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일본웹사이트에서는 거근(巨根)의 소유자로 알려져있는 듯하다....

정의윤의 포텐이 터지기 전 '일본에서도 30홈런을 칠 수 있다'던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평가가 워낙 알려져있어서 그렇지, 먼저 그 포텐을 알아보고 기요하라에게 지켜보라고 한 장본인이 이토였다. 2011년 LG 스프링캠프에 인스트럭터로 참가했을 때, '당장이라도 일본에 데려가고 싶은 선수'로 정의윤을 꼽았을 정도. 그런데 최재훈은 언제 이토 센세를 넘나요?

2016년 구마모토 지진이 터진 곳 출신이여서, 당장에라도 구마모토로 가고 싶다는 발언을 하여 답답함을 호소했다.

  1. 2012 스카우팅 리포트에선 최준석과 이토 코치가 장난치자 두마리가 노는 모양새라고 적었다. 하나 돼지하나겠지
  2. 일본야구사에 남는 명프런트로서 이름을 날린 네모토 리쿠오였지만 그 방법이 반드시 정정당당하고 신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당장 싹수가 보이는 고졸 선수는 프로입단 전에 구단 직원으로서 채용하는 형식으로, 가능성에 대해서 약간 의문이 드는 경우는 세이부 그룹 산하 프린스 호텔의 사회인 야구부에 입단시켜 타구단의 손길을 차단하는 탬퍼링에 가까운 방식도 불사하던 사람이었다.
  3. 아키야마는 아예 구단이 주도적으로 트레이드를 했고, 이시게, 기요하라, 구도 등은 선수 본인이 팀을 떠나는 것을 거의 방관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4. 지도자로서 이토에 비견할만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황금시대 OB는 구마모토 공고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아키야마 코지, 이토와 오랫동안 배터리를 이루었던 와타나베 히사노부 정도밖에 없다. 2015년부터 호크스 감독을 맡은 쿠도 키미야스도 향후 커리어를 더 쌓는다면 포함할 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