宇野宗佑 우야종우 1922.08.27~1998.05.19
일본 내각총리대신 | |||||
74대 타케시타 노보루 | → | 75대 우노 소스케 | → | 76, 77대 가이후 토시키 |
일본의 정치인. 75대 총리를 지냈다.
1922년 시가현 야스군 모리야마초 출신. 독특하게도 학도병으로 징병되어 2차대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이때 그의 보직은 회계 장교. 직접 전투를 한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그가 조선 북부에 배치되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후 소련군이 진주하여 8월 23일, 우노는 소련군에 붙잡혀 무장해제를 당한뒤 북한내 수용소를 거쳐 2년여간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억류생활을 했다가 1947년 7월 28일 석방되어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때 자신의 포로 생활에 대해 저술한 책인 "다모이 토쿄"(러시아어로 도쿄로의 귀환이란 의미)의 책을 쓰고 이 책은 1952년에 영화화 되기도 했다.
귀환후 고향 모리야마초의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았고 1951년에는 시가현 의원에 당선되었다. 원래는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민주당 소속 모리 코타로가 시가현 지사가 되면서 민주당으로 이적했다. 이후 55년에 자유당과 민주당의 보수대합동으로 자민당 소속이 된다.
1958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거물 정치인 고노 이치로의 직계로 들어가게 되어 고노 이치로의 비서로서 중앙정치를 배우게 된다. 1960년 중의원 선거에 다시 출마하지만 자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뒤 자민당으로 복당했다.
이후 국회에서 각료로 방위청 장관, 자민당 국회대책 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는데 국회대책 위원회 의장 당시 록히드 사건이 터지면서 야당들의 공세에 대처해야 했다. 이후 후쿠다 다케오 총리 시절에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내면서 미국과 핵연료 도입에 대한 협상을 진행한다.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 시절에는 행정관리청 장관을 지냈다. 행정관리청 장관 시절에는 각부처 장관들을 직접 호출했고 차관등을 보내면 일절 만나주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자민당 총재에 선출되어 총리에 지명되자 간사장 대리를 맡았고 통상장관 야마나카 사다노리가 병으로 장관직을 사임하자 후임 통상장관에 임명되었다. 타케시타 노보루 총리 밑에서는 외무장관을 역임하는등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행정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가운데 1989년, 타케시타 노보루는 하토야마 유키오등이 폭로한 정치자금 스캔들인 리쿠르트 사건에 소비세 문제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4월 25일 사임을 발표했다. (섹스 스캔들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다.)
사실 우노 소스케는 정상적이었다면 총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자민당내 특정 파벌의 영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쿠르트 사건 때문에 자민당의 유력자들이었던 아베 신타로,미야자와 기이치,와타나베 미치오등은 여론의 뭇매를 우려해서 총리로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고모토 토시오는 리쿠르트 사건과는 관련이 적긴 했지만 산코기선 경영난 문제때문에 능력에 의구심을 일으켜 당내에서 거부여론이 많았다. 결국 자민당 내에서 총리 임기만료로 물러난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파벌인 나카소네파의 넘버2이자 리쿠르트 사건과 연관성이 가장 적었던 우노를 총리로 옹립하자는 결론이 나게 되었던 것이다.
자민당 역사상 특정 파벌의 영수가 아닌 인물이 총리가 된 일은 우노 소스케가 유일했는데 그런 탓인지 보통 만장일치로 총재를 가결하는 의원총회에서 이례적으로 만장일치를 받지 못하고 다수결로 총재가 가결된 가운데 6월 2일 총리가 되었고, 아키히토 덴노에 의해 인준되어 헤이세이 시대 최초의 총리가 되었다.
취임 초에는 리쿠르트 사건과 무관한 인물인 탓에 깨끗한 총리로서 언론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다룰만큼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불과 취임한지 한달도 안 되어서 카쿠라자카의 게이샤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되면서 치명타가 되고 말았다.
결국 89년 7월에 열린 참의원 선거에서 리쿠르트 사건과 소비세 문제에 우노의 여성 스캔들이 도마[1]에 오르며 역으로 일본 사회당의 토이 타카코가 인기를 얻는 소위 토이 붐이 강타해 자민당은 결국 역사상 최저치인 36석밖에[2] 얻지 못하여 과반수에 18석이 미달, 결국 단독과반에(1989년 자민당 의석수는 142석이었는데 109석으로 줄어들었다) 실패했다.[3] 결국 우노는 여기에 책임을 지고 총리 사퇴를 발표, 후임에 가이후 토시키가 총리가 되었다.
불과 69일동안의 재임기간으로 그다지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취임 바로 다음날 중국에서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 참고로 우노 총리와 스캔들에 휘말렸던 그 게이샤는 결국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 안습
- ↑ 이게 얼마나 대단한거냐면 아베 신조도 참의원 통합 의석수에서는 사상최저(83석)를 기록 하였는데도 이 기록만은 경신하지 못했을 정도(37석).
- ↑ 반대로 사회당은 46석을 얻으며 1956년 참의원 선거(이 선거에서 사회당은 49석을 얻고, 자민당의 2/3확보를 저지했으며 2004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50석을 얻을때 까지 야당 중에서 사상최고치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사상최고치를 기록하며 승리하였다.
그 대신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의 삽집, 병크에도 불구하고 의석수를 얼마 늘리지 못하고 1993년도 중의원 선거에서는 정권교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도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엄청난 X신력을 보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