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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칠한 채로 공연을 하고 있는 게이샤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서 춤추는 2명은 아직 정식 게이샤가 아니라 견습 게이샤인 마이코들이다.
芸者, Geigayshasha
1 개요
게이샤는 전통음악 연주, 무용 공연, 시 짓기 같은 예능에 종사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기생이다. 게이샤는 한자 그대로 예술을 뜻하는 "芸(게이)", 사람을 뜻하는 "者(샤)"가 합쳐져 예술에 능통한 사람을 뜻하며, 게이기(芸妓), 게이코(芸子)라고도 한다. 원래 게이샤는 남성 게이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로는 남녀구분 없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통문화가 지금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교토에서는 게이샤라고 하지 않고 게이코라고 부른다.
하는 일은 주로 술자리나 유흥의 자리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시 지으며 손님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게이샤가 성매매를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 중기부터의 일로 그 이전에는 성매매는 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도 성매매를 하는 게이샤와 그렇지 않은 게이샤는 분리되어있었고, 그래서 단순히 춤과 노래가 가능한 매춘부로 여겨지지 않고 일종의 직업 여성으로 여겨져,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게이샤가 가수 같은 것으로 데뷔하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게이샤들은 주로 하나마치(花街, 꽃마을)의 오키야라는 전통 게이샤 저택에서 생활하고, 성공하여 재력이 있는 게이샤들은 자신의 집을 따로 소유하여 그곳에서 산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게이샤들의 고상한 세계를 두고 카류케이(花柳界)라고 부른다.
흔히 게이샤라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하얗게 얼굴을 분칠한 채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부채를 든 모습이지만, 사실 이 모습은 아직 정식 게이샤가 아닌 교토의 견습 게이샤인 마이코(舞妓)들이다. 정식 게이샤들은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화장도 하지 않고 기모노도 평범한 것을 입는다. 견습 게이샤인 마이코에 대해선 항목 참조.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게이샤 문서보다 수십 배는 더 알차고 많은 정보들이 있다 도쿄에서는 이런 견습 게이샤들을 한교쿠(半玉), 또는 술 접대부라는 뜻의 오샤쿠(御酌)라고 부른다.
교토의 게이샤와 도쿄의 게이샤는 꽤 많은 점이 다르다. 교토의 게이샤는 대체로 나이가 어린 편이며,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 5년 정도의 힘들고 긴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반면 도쿄의 게이샤는 6개월에서 1년만 수련하면 정식 게이샤가 될 수 있고, 대체로 나이가 많은 편이다. 100년 전 까지만 해도 일본 전국에 거의 10만 명에 가까운 게이샤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현저히 줄어들어 2,0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관광지에서 게이샤 분장을 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연극배우들이거나 관광객(...)들이다. 현존하는 게이샤들은 하나마치 밖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는 요소 중 하나다. 말 없이 다소곳하고 얌전하게 남성들의 편의를 배려해주는 동양 여성이라는 그들의 판타지가 투영된 대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특정 예술만을 파고 들기에 학식이나 다양한 기예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현대의 게이샤도 어려서부터 학업을 포기하게 되어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1]
2 역사
헤이안 시대 부터 몇몇 여성들이 예능인으로 활동한 기록이 있지만, 현대의 게이샤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의 야나기초에 유곽을 설립하여 공창 제도를 활성화시켰고,[2] 이곳에서는 매춘뿐만 아니라 음주가무, 예술 향유 등도 이루어졌다. 이곳의 유녀들 중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오이란(花魁)이라고 불렀는데, 이 오이란들은 부유한 손님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예능인들을 불러 손님을 즐겁게 해주었으며 그 예능인들을 일컫는 말이 바로 게이샤였던 것이다. 당시 시대상 음악, 무용, 작시를 하던 게이샤들은 모두 남자였으며, 호칸(어릿광대)이나 다이코모치(북 치는 고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예능인들과 함께 하며 오이란과 고급 매춘을 즐기는 이들은 주로 까다로운 예법을 따랐던 귀족 계급이었고, 유곽이 시마바라로 옮겨지면서 저렴하게 매춘을 즐길 수 있는 찻집들이 그 근처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찻집에서 매춘을 하던 여성들을 산차조로(散茶女郎)라고 불렀고, 그곳에서 전문 예능인마냥 무용과 연주를 담당했던 여성들은 오도로키라고 불렀다. 이후 오도로키들이 대중화되면서 도리어 자신들이 전문 예능인을 뜻하는 게이샤라고 칭하게 되었고, 1700년대 이르러선 남성 게이샤들의 수를 압도하여 거의 모든 게이샤들이 여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에도 막부에선 게이샤가 매춘부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예능인으로만 활동하도록 법을 제정했다. 게이샤는 말 그대로 예능인으로, 몸이나 외모보다는 예술행위로서의 미(美)가 부각되어야 해서 치장이 화려했던 오이란들보다 머리 모양이나 화장, 복장이 단순했다.[3] 능력 위주로 활동했던 게이샤들은 오이란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결국 1750년쯤 오이란은 사라졌다.
게이샤가 인기를 끌며 교토와 도쿄에서는 게이샤 마을인 하나마치들이 생겨났고, 게이샤는 일반 여성들보다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가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딸을 하나마치에 팔아넘기거나 부유한 사람들이 특정 게이샤만을 적극 지원해주면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단나로 불리는 게이샤의 후원자들이 게이샤의 처녀성을 돈 주고 사들이는 일들이 점점 발생하면서 이전에 떨쳐냈던 매춘부의 이미지가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엄격히 금지되면서 게이샤의 이미지는 다시 상승한다. 또한 법이 제정되면서 가난한 소녀들을 하나마치에 파는 일이 금지되고, 게이샤가 되고 싶은 사람만 게이샤가 되게 했다.
3 창작물에서의 게이샤
3.1 게이샤가 나오는 매체
- 소설 및 동명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
- 일본 만화 <한나리토>
- 게이샤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 <게이샤, a life>
-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
3.2 게이샤와 관련된 캐릭터
- 쇼와 겐로쿠 라쿠고 심중: 미요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