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후 토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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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海部俊樹 해부준수 1931년 1월 2일 ~

일본 내각총리대신
75대 우노 소스케76, 77대 가이후 토시키78대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의 정치인. 76, 77대 총리.

1931년 아이치나고야에서 사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법학부를 거쳐서 1960년, 불과 29세의 나이에 최연소로 고향 아이치현의 제9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후 2009년까지 내리 16선 49년을 지역구를 지켰다.(...)

정계에서는 본래 미키 다케오의 미키파에 속해서 미키파의 귀공자라는 별명을 들었을 정도였고 존경하는 정치인을 늘 미키로 꼽았을 정도였다. 미키파가 카와모토파로 옮겨갔을때는 카와모토 토시오를 지지했지만, 카와모토와는 다르게 계파의 정치자금 공헌도가 낮았던 관계로 구두쇠로 불리기도 했다.

타케시타 노보루와는 와세다 대학의 웅변동아리 선후배 사이로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고 하며 타케시타가 총리가 되었을때는 카와모토파에서 타케시타파로 갈아탈것을 권유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우노 소스케가 참의원 선거 대패로 총리직을 사임하자 우노 소스케를 옹립했던 타케시타파의 입지가 좁아져 있었다. 그러나 타케시타 노보루는 급격한 세대교체를 원하지 않아 젊은 편이지만 선수는 높은 편이었던 가이후를 총리로 옹립하기로 했다. 89년 8월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 하야시 요시로와 이시하라 신타로가 가이후와 함께 출마해 3파전이 되긴 했지만 타케시타파의 지원에 힘입어 가이후가 76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문제는 참의원은 자민당이 과반의석이 아니었다는데 있었다. 참의원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던 사회당은 대표인 토이 타카코를 총리로 지명했고 자민당이 과반의석이던 중의원에서는 가이후가 총리로 지명된 상태였다. 결국 참의원.중의원 양원위원회가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중의원의 우월이라는 관례에 따라 중의원이 지명한 가이후가 총리로 확정되었다. 이후 모리야마 마유미 환경장관을 관방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최초의 여성 관방장관을 탄생시켰고 부부동반으로 여기저기의 행사에 나타나는등 여성들을 존중한다는 이미지를 심었다.(물론 이렇게 한데에는 사회당의 토이 타카코의 바람몰이인 토이 붐을 잠재우려는 목적이었지만) 이렇게 하면서 어느정도 지지세를 회복시켰고, 1990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공명당, 민사당이 부진[1]한 틈을 타 자민당이 승리을 거두게 되었다. .

하지만 본래부터 가이후는 자민당내 파벌의 영수가 아니었고 리쿠르트 사건으로 일본 국민들의 여론이 격앙된 상황에서 여론의 뭇매를 피하려고 세운 일종의 간판에 불과했다. 비록 리쿠르트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는 모두 강제로 퇴갤시키고 내각을 꾸리긴 했지만 사실상 가이후의 뒤에는 타케시타가 있었고 가이후는 타케시타의 눈치만 보는 형편이라고 비난받았다. 심지어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오자와 이치로가이후는 바보다. 차라리 우노가 더 낫다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거기에 소선거구제 시행에 반대하며 가토 코이치,야마자키 타쿠,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소위 YKK 그룹이 대놓고 안티 가이후 운동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안티 운동에도 불구하고 가이후는 여론의 막강한 지지를 받아서 총리직을 유지할수 있었다.

1990년 4월 버블경제가 절정에 다다르자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2]를 시행했다. 그리고 이는 퍼펙트 스톰의 역효과로 인해 급격한 버블 붕괴를 낳아버렸다.

90년 6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노태우가 정상회담을, 다음날 워싱턴에서 조지 부시와 노태우가 정상회담을 하면서(;;;) 일본에서 "이런 탈냉전 무드에서 일본만 소외된게 아니냐"하는 분위기가 나온 적도 있었다. # 만평 출처

그래서인지 이후 걸프 전쟁이 일어났는데 가이후는 자위대의 평화유지군 파병이나 경제협력에 미, 영에 적극 협력해 조지 부시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수상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고, 91년 통일지방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91년 11월, 정치개혁법안이 잇달아 부결되자 가이후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치루려 했다. 그러나 자민당 의원들이 단체로 중의원 해산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켰고(가이후 내림) 여기에 타케시타파 마저 명백하게 해산에 반대하면서 결국 가이후는 총리에서 사퇴하게 된다. 사실 어처구니 없게도 내각의 지지율은 50%가 넘는 상황이어서 타케시타파와 당내 비주류들에게 끌려다닌 결과로 총리직에서 밀려나게 된 셈이었다.

이후 1994년 자민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하면서 당시 총재였던 고노 요헤이가 자민당의 정권복귀를 위해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등의 비자민 야당연합과 연립정권 수립을 합의하자 이에 격하게 반발했다. 국회에서 열린 국가수반 지명선거에서 자민-비자민 야당연합의 연립정권의 국가수반으로 사회당 대표 무라야마 토미이치를 낙점하자 구 여당 연립정권의 일원이었던 신생당,일본신당과 연합해 무라야마에 맞서는 국가수반 후보로 나섰지만 기대하던 자민당의 이탈표가 나오지 않아 결선투표에서 패배했다.

이후 자민당을 공식적으로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거쳐 신진당을 창당해 초대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말이 대표지 사실상 실권은 신진당 초대 간사장이 된 오자와 이치로에게 있었고 신진당 창당 기자회견에서도 질문은 가이후보다 오자와에게 더 많이 집중되었을 정도였다.(...) 자민당에선 간사장 대리였던 노나카 히로무총재씩이나 하신 양반이 당을 배신하다니!라고 격분하며 역대 총재들의 사진을 전시한 자민당사내 복도에서 가이후의 사진을 떼내도록지시했다. 물론 이런 노나카의 감정적 행동이 지나치다는 비판도 있기는 했다.

그러다가 신진당이 분당되자 무소속으로 1년여간 지내다가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에 참여한 자유당에 입당했다. 2000년에는 자유당이 분열되자 자민당과의 연립정권 참여를 주장하는 측이 창당한 보수당으로 옮겼다. 보수당이 보수 신당으로 개편후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승리한후 보수신당이 자민당에 흡수통합되면서 다시 자민당으로 복당하게 되었다. 당시 간사장이었던 아베 신조는 가이후의 복당을 크게 환영하면서 떼내어진 가이후의 사진을 다시 역대 총재 사진들 가운데 전시하게 했다. 정계은퇴 이야기가 오갔지만 2009년 중의원 선거에 50년 의정 기록을 세우고 싶어 출마했다가 지역구에서 낙선했고 73세 이상은 비례대표로 중복출마가 안된다는 규정에 따라 비례대표 구제도 안되어 결국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물방울 무늬 넥타이 인데, 파업문제로 열린 TV 토론회에서 매일 물방울 무늬 넥타이만 하고 나온 탓에 시청자들이 그것을 지적하자 되려 그것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게 되었다고. 심지어는 히로히토 덴노와 만나는 자리에서도 은은한 느낌의 물방울 무늬 넥타이를 하고 나와 자신을 어필했다.

묘하게 29라는 숫자와 인연이 있는데 처음 국회의원이 된 나이가 29세였고 당시 선거의 차수가 29차라서 주변이나 본인이나 농담으로 29년 뒤에 총리 한다라고 하고 다녔는데...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1991년 루팡 3세의 TV스페셜 "나폴레옹의 사전을 훔쳐라"에서 가이후를 모델로 한 "해변가의 총리"[3]가 나온다. 우습게도 이 총리의 말버릇은 "간사장에게 물어보지요"라서 오자와에게 휘둘린 가이후를 풍자하고 있다.

보수 성향의 일본 정치인 치곤 거의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난징 대학살이 일본에 의해 저질러 졌음을 인정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0년 난징을 방문해서 난징 시민들에게 일본군이 저지른 일을 정치인의 한명으로서 사죄드린다라고 발언했는데 이때문에 극우성향 인사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정계 은퇴후 2011년 현재 일본 테니스협회 회장과 일본 티볼협회 회장등의 직책을 보유중이다.
  1. 하필 공명당과 민사당 일부 간부도 리쿠르트 사건에 연루되어 선거전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못했고 거기에다가 사회당과 사회민주연합이 이를 커버할 정도로 후보자를 많이 낸 것도 아니였다.(사회당 149명/사민련 6명, 당선자는 136명/4명) 당연하게도 정권교체에 실패.
  2. 주요 골자는 "이 규제가 시행된 시점부터 일본 시중은행들의 부동산 담보 대출을 정지한다"였다!!!
  3. 성인 가이후(海部)는, 훈독하면 '우미베'로도 읽을 수 있는데, 이 경우 '해변가'라는 뜻의 우미베(海辺)와 발음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