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나무위기[1]

1 Risk

  • 危機, 위험(危險)+기회(機會)의 합성어이다. 위험한 고비나 시기를 뜻하는 단어.

2 바둑을 의미하는 한자어

  • 圍碁, 바둑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중국어로는 웨이치(围棋; 圍棋; wéiqí)라고 부르고, 일본어로는 이고(囲碁; いご; igo)라고 부른다.

3 춘추시대의 진(晉)나라의 장수

魏錡
(? ~ 기원전 575년)

춘추시대의 진(晉)의 장수로 진문공의 신하인 위주의 아들이자 위과의 동생. 시호는 무(武)이며, 여씨와 주씨의 시조로, 주무자(廚武子)나 여기(呂錡)라고도 한다. 고사성어인 결초보은과 관계된 인물이기도 하다.

아버지 위주가 생전에는 자신이 죽으면 사랑하는 조희를 다른 사람에게 개가시키라고 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조희를 자신과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형인 위과가 조희를 개가시키자 아버지께서 유언하신 것을 잊었냐고 물었다가 위과에게서 죽기 직전에는 정신없어서 한 것이라면서 생전에 하신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얘기했다.

기원전 597년에는 초장왕이 정나라에 대한 정벌을 일으키자 진경공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서 부장으로 임명되어 종군했으며, 필 땅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 포계낙백과 싸우다가 그를 놓치자 초군에 화의를 맺으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자기들이 중용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초군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하는 척 하면서 초군을 도발했다.

반당이 위기를 추격했지만 위기는 이미 도망갔으며, 낙백이 고라니를 맞춰 포계의 추격을 멈추게 한 일을 본따서 고라니를 맞춰 반당이 추격하지 못하게 했으며, 진영에 돌아와 초나라가 화친 요청을 거부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결국 초군과의 싸움에서 진나라가 패하자 초군에게 포로로 잡힌 평소 친했던 순앵을 구할 수 있도록 나라의 장수를 한 마리를 잡기로 한다.

초장왕의 아들인 곡신과 싸웠다가 상군대부로 출전한 순앵의 아버지 순수가 오른쪽 팔을 화살로 맞추자 곡신을 사로잡았으며, 결국 포로 교환으로 곡신과 순앵을 교환해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기원전 594년 가을에 진(秦)나라의 장수인 두회가 진(晉)나라를 공격해 보씨에 주둔시켰는데, 위과가 싸우고 있을 때 원군으로 왔다가 위과에게서 두회의 용맹을 들었지만 그 말을 믿지 않고 싸움을 걸었다가 패하자 위과의 구원으로 무사히 진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날에 청초파라는 곳에서 매복해 위과가 두회를 유인해 공격했는데, 두회의 군사들에게 피해를 줬지만 두회의 용맹 때문에 고전했지만 두회가 갑자기 넘어지자 위과와 함께 두회를 사로잡았다.

기원전 575년에는 진여공이 정나라를 공격하자 초공왕이 정나라에 원군으로 가서 싸웠는데, 진나라와 초나라가 언릉에서 전투가 벌어져 초공왕의 화살로 눈 주위를 맞춰 초공왕을 애꾸로 만들었다. 초공왕이 양유기에게 두 대의 화살을 주어 자신을 보복하게 하자 양유기가 처음에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4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衛覬
(? ~ 229)[2]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서예가. 자는 백유(伯儒).

하동군 안읍현 사람으로 어렸으나 조숙해 재능과 학문으로 칭송받았으며, 조조가 불러 사공연속으로 삼았다가 무릉의 현령과 상서랑에 임명되었다. 조조가 원소를 정벌할 때 유표는 군대를 일으켜 원소를 구원하려고 했지만 관중의 모든 장수들은 중립을 지켰으며, 유장과 유표의 틈이 벌어지자 치서시어사가 되어 익주에 사신을 보내 유장에게 군대를 파견해 유표를 견제하게 했다.

관중에서 동란이 일어나 백성 10만명이 형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에 소금 매매를 감독해 그 이익으로 얼룩소를 사서 돌아오는 백성들이 있다면 공급하면서 농경을 장려하거나 곡물을 축적해 관중을 풍요롭게 하라는 것과 먼 곳에 있는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돌아올 것이라면서 사예교위에게 관중에 남아 다스리도록 하라는 것 등이 담긴 내용의 편지를 순욱에게 보냈다.

조조가 이를 받아들여 알자복야를 파견해 염관을 감독하게 하면서 사예교위에게 홍농군을 다스리게 했으며, 관중이 복종하자 위기가 중앙에 부름을 받았다가 상서로 승진되었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시중이 되어 왕찬과 함께 예의제도를 관장했으며,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상서와 양길정후가 되었다.

조예가 즉위하자 승진해 문향후로 봉해지면서 식읍 3백 호를 받으면서 법률박사를 두어 사방의 관리들에게 법률을 가르치도록 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며, 백성들의 노역이 증가하자 조조가 검소하게 행동한 내용과 함께 황실에서 인력과 비용을 낭비해 사치를 줄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조서를 받아 저작을 담당해 위관의 등 수십 편을 지었다.

고문, 전서, 예서, 초서를 좋아해 모두 뛰어났으며, 초서는 파리했지만 필적이 정밀하고 뛰어났다고 한다. 일찍이 한단순에게 고문상서를 그대로 적어 한단순에게 보였는데, 한단순이 이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한다.

위기의 고문, 소전, 예소, 장초는 모두 능품에 들었다고 한다. 위기가 죽자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했으며, 아들 위관이 작위를 계승했다.
  1. '나무위키'로 구글 검색 시 연관 검색어로 나온다.
  2. 『진서』 「위관전」에 의하면, 위관은 10살 때 아버지 위기의 상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