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의병

乙巳義兵

1 개요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최익현(양반유생), 민종식(전직 관료), 신돌석(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유격전 전개) 등이 의병을 일으켜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의병은 최초의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과 머슴출신 안규홍 등 다양한 신분의 의병장이 나왔다는데 의의가 있다. 최익현은 의병을 진압하러온 군대에 조선인이 있다는 이유로 싸움을 포기하고 쓰시마로 잡혀간 후 순국한다.

2 전개

1904년 한일의정서·제1차 한일 협약이 체결되고, 1905년에는 통감부설치와 대한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1]이 체결되자 반일감정은 전국적으로 고조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조직되어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동학 농민 운동의 잔여 세력인 활빈당이 해체되자 그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을사의병에 가담하였다. 1906년에는 그 의병활동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 중 가장 손꼽히는 전투로 홍주성 전투를 들 수 있다. 1906년 5월에 민종식 부대가 홍주성(現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서 일본군을 화포로 몰아내자 일본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성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의병 부대는 시가전을 벌이는 등 끝까지 항전했으나 사상자 속출로 결국 퇴각하였다. 현재 홍주성 안에는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병오 항일 의병 기념탑이 있다.

3 평가

을사의병의 지도부는 을미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양반유생이 중심이었고, 지도이념도 위정척사사상에 기반한 반외세의식이었다. 이러한 양반유생 중심의 의병은 민중애국심에 호소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가진 계급적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의병대중의 반침략적·반봉건적 요구를 수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민중세력이 의병의 지도부로 진출하는 등 의병의 성격이 변화하고 전투력의 질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정미의병에서는 더욱 조직화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추가 바람
  1. 제2차 한일 협약으로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