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전투의병 | ||||
신돌석 | 민종식 | 정용기, 정환직 |
민종식 초상 |
출생~ 사망: 1861~1917 |
본관: 여흥 민씨 |
閔宗植
1861~1917 구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여흥 민씨(驪興 閔氏). 자 윤조(允朝). 호 퇴초자(退樵子). 188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충남 정산(定山)에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듬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격파당하고 공주(公州)에 은신 중 체포되었다. 이 싸움에서 의병 83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일군에게 잡혔다. 그 가운데 남규진(南奎振)·유준근(柳濬根)·이칙(李侙)·신현두(申鉉斗)·이상구(李相龜)·문석환(文奭煥)·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 등 9명은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었다.
민종식은 몸을 피해 박창로(朴昌魯)·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이남규(李南珪)와 더불어 다시 의병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다, 1906년 11월 일진회원의 밀고로 이남규의 집에서 모두 잡혔다. 이후 이남규 부자는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고, 그는 1907년 7월진도로 유배되었다가 왕실 척족이라는 신분 탓으로 12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악형의 여독으로 1917년 사망하였다.
1907년 평리원(平里院)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주청(奏請)으로 감형, 진도(珍島)에 귀양갔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