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삼천리 삼천만의 우리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후렴)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2절)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끼는 곳에 이길 이 너와 나로다(3절)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빛낼 이 너와 나로다(4절)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독한 원수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강산 회복하는 날 만세를 불러보세
암울했던 그 시기,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일제의 폭정에 맞서 싸우며 우리 민족을 위해 목숨 바치신 영웅들
목차
1 개요
한국의 독립군은 하나의 단체라기보다는 일제에 저항하거나 교전한 여러 준군사조직의 통칭이다. 익히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단체들도 있으나 사실 사료상에 남지 않았거나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았던 독립군 단체들도 상당수였다. 이들의 투쟁은 구한말 을사늑약으로부터 시작하여 국권을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하여 그 투쟁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겨갔으며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활동의 전성기는 1910년대였고 1920년 청산리 대첩을 거치면서 절정기를 맞았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주력이 괴멸되었고 1931년 일제의 만주사변으로 근거지마저 위협받게 되면서 차츰 둔화되어갔다.
해외, 특히 미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이주민들의 독립군 단체들도 있었으나 여기에서는 국내와 만주 일대에서 실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단체를 기준으로 서술하도록 한다.
2 약사(略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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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독립군 가족기념사진, 연대미상
한국에서 독립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각 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抗日)의병이나, 기원을 논한다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어났던 을묘 의병부터 일 듯하다. 그 의기(義氣)는 장하였으나 그 출신들이 민중, 혹은 구식 군대(대표적으로 훈련도감 출신) 출신자임에 따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았고 장비 또한 열악했다. 하지만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국군이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시위 1연대 1대대원, 시위 2연대 1대대원 합계 1200명이 이에 반하여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각 지방 진위대들이 봉기하였으나 실패함에 따라 구(舊)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의병에 합류하게 되면서 체계화되었다.
물론 많은 수의 시위대원과 진위대원들이 일제의 은사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일제의 은사금은 항일의병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양반들도 받았다. 그 이유는 항일의병을 조직할 수 있는 실질적 주체들인 양반 집단을 회유하는데 있었으니, 여기서 은사금의 목적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구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교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 결성으로 인하여 그 군세가 전성을 맞이하였으나 여러 사정에 의해 실패한 뼈아픈 사실도 있다. 이때까지는 의병(義兵)이라 하여 임진왜란 당시부터의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세웠었다. 대표적인 단체로 안중근 의사께서 몸담고 있던 대한의군(大韓義軍)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도 헛되이 1910년 한일병탄조약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이 의병들은 차츰 그 본거지를 만주로 옮겨갔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국내에서는 일제의 단속이 심화되어 병합 직전인 1909년에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같은 재앙이 닥쳤지만 만주는 당시 중국의 치안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둘째로, 만주는 외국 영토여서 일제의 단속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다. 셋째로, 국내와 가장 가깝고 동포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이었고, 넷째는 의병활동을 둘러싸고 지휘 체계 상의 혼란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지휘 체계 상의 혼란이라 함은 의병장 중에 양반이 아닌 의병장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신돌석, 홍범도 같은 인물들은 출신상 양반은 아니었으나 양반 출신 의병장들보다 명성과 전과에서 낮지 않았다.
- 만주와 조선 후기부터 조선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었던 연해주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독립군은 신흥무관학교로 대표되는 장교육성기관을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육성하였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격화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은 1920년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 김좌진의 청산리 대첩 등을 통해서 꾸준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일본군보다 무기와 화력에서 열세인탓에 게릴라전으로 나가야했다. 게다가 청산리 대첩 직후 일본군이 보복으로 독립군의 기초인 만주의 한인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며 독립군의 기반을 박살내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러시아 연해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라면 더 투쟁할 수도 있었으려니와 당시 적백내전을 한창 정리중이던 소련 적군(赤軍)은 그동안 어느 정도 지원해주던 독립군이 상대편인 백군(白軍)의 하수인이라는 허위밀고에 독립군 단체 연합인 대한독립군단을 자유시에 몰아넣고 무장해제를 시키려다가 교전 후 전멸시키고 만다.[1]
- 이들은 4000여 명 정도 되는 독립군의 주력이었으며 따라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따라서 이후의 독립군 활동은 위축되고 만다. 이를 자유시 참변이라 한다.
그래도 1923년 임정에 의하여 임시정부 주만 참의부가 독립군 단체 연합체로 창설되었으며 이외에 통의부, 정의부 등이 각각 설치되어 만주에서의 투쟁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룩하며 계속 이어진다.
한편으로 임정 산하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1932년 일왕 폭살 미수사건을 일으킨 이봉창 의사,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 등도 역시 독립군 활동에 포함시킨다면 30년대의 투쟁 횟수와 성과 역시도 그다지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없었다면 한국의 광복은 참으로 지난(至難)하였을 것이다.
3 해방 직전과 직후
194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직할부대인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고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었던 일본, 독일 등에 미국 등 연합국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기도 하면서 일본군과 교전할 준비를 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해방이 되고 일제가 패망하게 되면서 한때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이들 광복군은 해방 후 귀국하면서 미군정청에 의해서 '군대'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으로 귀환해야 했다. 이에 대하여는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한편으로 좌익 계열인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인 조선의용군이 1942년에 결성되어 초대 김두봉, 이후 무정의 지휘 아래 활동하였다. 그 규모는 전성기에 5만 명으로 여타의 독립군 단체와는 그 규모가 달랐다. 다만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 북한군에 흡수되어 한국전쟁시에 남한 침략의 선봉에 선 터라 한국 학계에서는 흑역사로 치부되는 아픈 과거가 있기도 했다. 한편으로 실제 조선의용군이 독립군 활동을 하긴 하였으나 일제시대에는 그 활동인원이 500명을 넘기 힘들었고 관동군이 항복하면서 소속 한인(韓人) 병사들을 그대로 인수하여 그 수가 그렇게 불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1943년 광복 직전에 초대 지휘관 김원봉이 주력인원이라 할 만한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광복군에 입대한 사실이 있기도 하다. 또한 조선의용군은 독립군으로서 일본군과 교전했던 것도 사실이나 1945년 이후에는 국공내전에 중국 공산당 세력으로 참전하기도 하여, 그 정체성이 독립군이기보다는 공산군으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아무튼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게 되면서 그동안의 독립군은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으로 진화하였다. 최소한 국군은 그 법통을 항일 독립군에 두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국군의 기간병력 대부분이 일본군 및 만주군으로 구성되었으니 국군은 '황군의 적자' 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창군 당시 국군에는 청산리 대첩 당시의 북로군정서 1중대장 강근호 장군, 광복군 출신으로 중국 국민당군 소장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 등 독립군을 법통으로 명시할 만한 상징적인 인물들이 대다수 존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외에도 군 출신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관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 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 해군은 수뇌부 전체가 상선사관단 출신이라 일본군과는 아예 관련이 없다. 산하의 대한민국 해병대는 해군 육전대라는 특성 상 일본의 해군육전대 및 간도특설대 출신이 대거 몰아졌고 2대 사령관까진 간도특설대 출신이지만 3대 공정식 장군은 본래 해군이었던 사람으로 일본군과 관련이 없고 김성은 장군도 마찬가지로 해군 출신이지 일본군이 아니다. 위키니트 중 해병대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많아 지속적으로 친일 황군으로 반달 당하는데 최소 현 해병대 수뇌부는 해병대의 아버지를 손원일 제독으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은 청산리 대첩의 영웅 철기 이범석장군이었으며, 초대 국방차관은 광복군 참모처장이자 중국 국민당 공군 참모장이었던 최용덕[2] 장군이었다. 광복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4 조직
- 조선말 / 대한제국 의병
- 독립 의군부
- 동북항일연군
- 광복단
- 의열단
- 조선 혁명군
- 한국 독립군
- 대한 독립군
- 대한 독립군비단
- 정일 제일군
- 서로 군정서
- 북로 군정서
- 조선의용대
- 조선인민혁명군
- 화북조선청년 연합회
- 한국 광복군
5 무장
관련 기록의 부실로 인해 독립군의 무장에 관해서는 대다수의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사실들을 통해 유추해볼수는 있다.
한국 광복군의 경우 일본군 장비 이외에도 소련, 체코 슬로바키아나 독일제 총기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적백내전 당시 사용되던 구식 무장들을 헐값에 사들였거나, 중국 국민당군[3]에게서 다수의 독일, 체코-슬로바키아제 병기를 보급받았기에 가능한것이었다. 또한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은 적백내전 때 연해주로 퇴각하던 백군 소속 체코 부대가 총기와 탄약 등을 매각해 줘서 무기를 확보하기도 했다. 그 외에 중국에서 활동하는 밀수업자로부터 무기를 밀수해서 구입하기도 했다.
5.1 권총 및 기관단총
5.2 소총
- 조총, 천보총 - 조총이라고 해서 단순히 화승총을 쓴 게 아니라, 개머리판을 달고 뇌관식으로 개조하는 등 개량을 거친 것을 썼다. 단 이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시기보다는 국내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만 사용했다고 봐야 한다. 만주에 가서 조총을 쓰진 않았다.
- 영국제 엔필드 소총(전장식, 후장식 개조버전 섞여 들여옴.)
- Gew71
- 베르단 소총
- 그라스 소총
- 무라타 13년식
- 레밍턴 롤링블럭 M1867
- 무라타 계열 소총 노흭
- 아리사카 계열 소총 노흭
- 모신나강 계열 소총
- Gew98 계열 소총
- 스프링필드 M1903 소총
- M1 개런드
5.3 기관총
- 개틀링 기관총
- 맥심 기관총
- M1895 콜트-브라우닝(Colt-Browning) 기관총
- 루이스 경기관총
- 96/99식 경기관총 노획
5.4 폭탄류
5.5 대포류
5.6 함선
- 계림호 독립군 비공식 군수지원함
5.7 훈련기
6 독립군의 의의
이분들이 이국에서 흘린 피눈물이 씨앗이 되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설령 이들의 투쟁이 조국의 8.15 광복을 직접 이룩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전투와 순국은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다른 나라들에 확실히 심어주었다. 비록 일본이 연합국의 적국으로서 패망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다행히 식민지에서 풀려났으나, 이마저도 없었다면 한 번이라도 돌아볼 나라들조차 없었을 테니까.[4] 이들의 이러한 노력과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 요구를 카이로 선언에 끼워넣었고, 중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며 2차대전의 주요 승전국 중 하나가 된 후, 한국은 일본에게 협력하는 영토가 아닌 식민 피지배국으로 인식되어 해방을 맞게 되었다. 어쨌든 일본이 점령하던 곳이라[5] 미국과 러시아 등 연합국의 군정이 이어지긴 했지만, 확실한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광복군이 곧 한반도로 진격할 것이었고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무장이나 규모등으로 보았을때 일제를 직접적으로 몰아낼 힘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7 관련 항목
- ↑ 레닌은 약소 민족 지원이라는 새 러시아의 정책을 반영해 독립군의 항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독립군 군자금은 당시 돈 5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군자금의 용도를 둘러싸고 독립군과 임시정부 사이의 갈등을 빚게 되었으며, 이승만의 가짜 명함 사건과 결부되어 결국 이동휘를 비롯한 무장투쟁파가 상하이 임시정부와 결별하게 된다. 무장투쟁파가 상하이 임시정부를 떠나게 되고 태평양 전쟁 말이 되어서야 이범석과 지청천이 겨우 광복군을 조직하게 되어 물리적 투쟁능력을 얻게 되나 이마저도 미군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일본이 투항하자 오히려 눈물을 흘렸던 것. 결국 이때문에 한국은 독립 과정에서 전혀 임시정부가 힘을 못 쓰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외세들에 의해 분할되어 지금에 이른다. 패전국인 일본,독일이야 당연히 미국 등 연합국에게 점령당해 군정을 받았지만 한국의 경우 패전국의 식민지였고 어느 정도 부역 혐의도 있으며 독립운동 세력은 연합군의 일원도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다. 중화민국이 엄연히 살아있었고 팔로군도 중일전쟁 때 교전 세력으로 인정받은 중국과 다르다.
- ↑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이른바 공군 창설 7인의 한 사람이다. 초대 국방차관과 2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중국 국민당 공군(중화민국군 공군) 창설의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국만당 공군 대령의 신분으로서, 대한광복군 참모처장을 겸임하였다.
- ↑ 광복군과 국민당군은 공공의 적을 두고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협력관계였다.
- ↑ 무장투쟁이든 외교노선이든 둘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연합군은 한반도를 일본영토로 인식하고 점령군으로서 들어왔을 것이다.
- ↑ 사실 조선인 친일파들에 의한 어느 정도 부역혐의도 없진 않았다. 위안부 차출이나 징병 등의 만행에 개입한 자들도 조선인 일본순사나 친일파 공장주 등 같은 조선인 민족 반역자들이었다. 러시아가 장악한 북한 지역은 이 친일 부역자들을 색출해 시베리아로 보내 통나무를 세게 하고 이들 대부분은 못 풀려나고 굴라그에서 죽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