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未義兵
1 개요
일제에 의해 발생한 을미사변과 김홍집 내각에 의해 시행된 단발령에 항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이 일어난 을미년(1895년)에 충청북도 제천군에서 시작된 대규모 항일의병.
을미의병 이후에 일어난 을사의병, 정미의병[1]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 의병 사례로 꼽힌다. 또한 격변기의 조선 말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자 가장 먼저 일어난 항일투쟁이다. 후일 13도 창의군, 독립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2 상세
1895년, 일본의 만행으로 인해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명성황후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친일 세력은 명성황후를 폐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유생들은 일제에 격분하여 친일 역적을 처단하자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리고(8월 20일),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의병들을 규합했다(8월 22일). 마침 고종이 각지의 유명 유림들에게 의병 궐기를 촉구하는 밀서들을 보내면서, 같은 해 10월 중순 무렵, 충청도의 의병장 문석봉이 맨 처음 유성의병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를 걸고 의병 활동이 시작되었다.
음력 11월 15일 갑오개혁의 정책 중 하나로 단발령까지 시행되자[2] 1896년 1월[3]에 민중들까지 호응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먼저 일어난 곳은 충청도 제천이며, 이후 전국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4] 강원도에서는 이소응(李昭應), 충청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 전라도에서는 기우만(奇宇萬), 경상도에서는 허위(許蔿)가 일어났다. 이때 가장 큰 호응을 얻은 인물들이 바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히는 유인석과 이소응이다.
농민 등과 같은 평민뿐만이 아니라 일부 양반들, 동학 농민군의 일부 등이 참여하는 등 구성이 다양했다. 이들은 지방의 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친일 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또, 지방 관아를 점령하고, 단발령에 앞선 수령들을 잡아 목을 베었다. 이들 대다수는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을 내리자 어느 정도 목적이 달성된 것으로 보고 대부분 자진 해산한다.
다만 양반층이 아닌 양민들 중에서는 활빈당[5] 등과 같은 무장 결사를 조직해 투쟁을 이어나간 이들도 있었다.
2.1 충청도
가장 활발하게 의병을 일으킨 지역이 바로 충청도이다. 1895년 11월에는 충청도 제천과 유성에서는 유인석(柳麟錫), 문석봉(文錫鳳) 등이 중심이 되어 거의토적(擧義討賊)의 기치를 올리며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호좌창의진을 평성하고 강원도의 일부 의병과 연합했다.
이때 유인석은 영월에서 대장으로 취임하면서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보내 의병봉기를 호소했다. 그들은 단양군수와 청평군수를 처단하고 충주부를 점거했다. 1896년에는 홍주의 김복한과 이설, 안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또, 유인석의 문인이었던 서상렬, 이필희등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충북 보은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보은 장터에 격문을 붙이고 회덕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무장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2.2 경기도
경기도 이천, 여주, 안산, 남원, 수원, 죽산 등지에서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하여 1896년 1월 일어났다. 약 2000여 명으로 구성된 박준영의 의병은 이천과 광주에서 일본 수비대에게 승리하고, 이천과 여주에 창의소를 설치했다.
그들은 1896년 2월 25일 남한산성을 공격하고, 점령까지 했으나 일부 의병이 매수당해서 함께 의병을 일으킨 김하락이 안동으로 물러나자 남한산성에서 물러나고 한성부 진격은 무산되었다.
2.3 강원도
강원도 릉에서는 1895년 1월 30일 민용호(閔龍鎬)를 대장으로 삼고, 송형순, 이병채 등이 결집했다. 평창, 영월, 정선 등 강원도 출신 포수들이 호응하면서 의병이 일어났다. 강릉부 관할 9군을 총괄한 영동9군창의소(嶺東九郡倡義所)를 설치하고, 강릉부 경무관 고준석을 처단하면서 기세를 높였다.
한편, 강원도 춘천에서는 문인 이소응과 이진응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춘천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약 400명을 포섭하고 춘천 관찰부를 기습하여 점령한 후 봉의산에 진영을 설치했다.
2.4 전라도
기우만 등이 광주에서 호남창의진(湖南倡義陳)을 편성하여 위세를 떨쳤다. 그 후 기우만은 나주, 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2.5 경상도
경상도 진주에서는 안의 출신의 유생 노응규가 1896년 1월 7일 기의하여 19일 진주성을 점령한 후, 부산 진격 중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산청에서는 곽종석 등 200여 명의 유생들이 의병진을 편성한 후 안동부를 점령하고 권세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1896년 1월 31일 관군에게 패배한 후 후퇴했다. 김천과 성주에서는 허위 등이 기의하여 대구로 진격하다가 관군의 공격으로 패주했다.
2.6 기타 지역
동학 농민 운동 때처럼 황해도 등지에서 일어나지는 않은 듯싶다. 사례가 있다면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추가 바람.
3 조정의 조치
선무사를 파견하는 지역도 있었으며 세력이 큰 지역은 군사를 보내 진압하기도 했다. 의병의 열약한 무기 때문인지 관군이 대다수 지역에서 승리했다.
4 한계
의병들은 징치의 깃발 아래 모였을 뿐, 훈련도 제대로 안 되었고 무기도 제대로 안 갖춰진[6] 상태였다. 더불어 의병들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봉건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유생 출신 의병장들은 왕의 해산 명령에 반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몇몇 의병장들은 동학군을 쫓아냈다! 의병 대부분 "동비들은 일본보다 위험한 놈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학자들은 동학군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었는데도 말이다.[7]
또한 가장 큰 호응을 받은 충청도의 의병장이었던 유인석은 불경죄를 빌미로 부하였던 김백선을 처형해버렸다. 이로 인해 의병들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1896년 5월 정부군과의 접전에서 패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5 여담
- 고종이 아관파천을 위해 의병 궐기를 촉구했다는 해석이 있다. 당시 궁 주위를 일본군이 수비하고 있었는데, 의병 궐기를 이용해 수비를 분산시키고 슬쩍 빠져나갔다는 이야기. 아관파천 직후에 의병 해산 명령이 내려진 점 등을 보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 시험에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을 비교하는 문제가 자주 나온다.
그러니까 이 문서를 보며 공부하자정미의병은? - 가장 큰 호응을 얻은 의병장 유인석은 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 충청북도 제천시의 지역 축제인 제천의병제는 바로 이 을미의병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 ↑ 이렇게 세 의병 활동을 전기(을미), 중기(을사), 후기(정미) 의병으로 나누기도 한다.
- ↑ 고종도 머리를 잘랐고, 유길준이 세자의 머리를 직접 잘랐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무차별적으로 상투를 잘렸다.
- ↑ 고종 33년 1월, 음력으로는 아직 을미년이다.
- ↑ 이는 단발령에 의해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효경(孝經)》에 나오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신체와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지키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는 구절 때문이다.
- ↑ 《홍길동전》에 나오는 활빈당이 아니다. 다만 그 활빈당에서 이름을 따오긴 했다.
- ↑ 농기구를 사용하여 싸우는 의병도 있었다.
-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다.
쫓겨난 동학군들은 활빈당에 들어갔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