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토부키 조산원 사건

(이시카와 미유키에서 넘어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경고! 이 문서는 충격을 유발하는 내용 혹은 표현이 포함된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사용자에 따라 불쾌감, 혐오감,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 이미지, 외부 링크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열람에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문서를 열람하여 발생한 피해는 바다위키에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문서를 읽고 싶지 않으시면 즉시 닫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는 이시카와 미유키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寿産院事件(寿産院もらい子殺し[1]事件)

380px
범인 이시카와 미유키(石川ミユキ)의 사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절대 사람이 아니다.

1 개요

일본 도쿄 신주쿠에 있었던 코토부키[2] 조산원[3]에서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영아 연쇄 살해 사건.

2 상세

범인 이시카와 미유키는 본업이 조산사(당시의 명칭은 산파)로, 남편과 함께 신주쿠에서 코토부키 산원이라는 조산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베이비 붐으로 인해 출산율이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였고, 이런 시대적인 상황 때문에 조산원은 최고의 호황 업종이었다.

문제는 이시카와 부부가 운영하던 코토부키 조산원의 운영 상태가 그야말로 답이 없는 개막장이었다는 것이었다.

코토부키 조산원에서는 본업인 출산 보조 및 산후조리 외에도, 종전 전부터 신문 광고를 통해 갓난아기를 키우기 힘들어하는 부모와 아이를 입양하기를 원하는 부모를 모집하고 있었다. 아이 친부모에게는 양육비 명목으로 아이 1명당 4천~1만 엔 가량을 받았고, 입양을 희망하는 부모에게는 사례금 명목으로 500엔을 받고 입양을 중개했던 것. 물론 이는 불법이었고, 이 당시 아이를 입양하겠다며 코토부키 조산원에 찾아왔던 사람들의 상당수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들이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당시 코토부키 조산원에는 각지에서 맡겨 오는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

전쟁이 종식되고 베이비 붐이 찾아오자 조산원은 갓난아이들로 넘쳐났고, 이에 이시카와 미유키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 조산원에 맡겨진 영아들을 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우유를 제때 먹이지 않아 배고픔을 못 이긴 아이가 울어대면 이불을 덮어씌워 질식사시키거나, 아이를 그대로 방치해서 굶어 죽게 만드는 수법을 주로 썼다.[4] 게다가 이도 모자라 당시에는 귀한 배급품이었던 설탕이나, 아이를 맡긴 친부모들이 아이가 죽으면 장례용으로 써달라며 맡겼던 술도 빼돌려서 착복하는 등의 막장짓도 저질렀다. 조산원을 운영하면 정부로부터 유아용 주식 배급[5]을 수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제대로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아이들을 받았던 것.

이런 식으로 1944년부터 1948년까지 4년 동안 코토부키 조산원에 맡겨진 영아 204명 중, 무려 103명이나 되는 영아들이 죽어갔다.[6]

3 발각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 계기는 정말로 우연이었다. 1948년 1월 12일 밤 한 장의사 상자를 옮기는 것을 순찰중이던 두 경찰이 발견하고 이를 수상히 여겨 조사해보니 상자 속에는 5구의 영아 사체가 들어 있었다. 경찰의 추궁에 장의사는 코토부키 조산원에서 의뢰한 일이며, 지금까지 같은 방식으로 영아 1인당 500엔씩을 받고 30구 이상의 영아 사체를 매장했다고 자백했다. 즉시 수사가 시작되었고, 주범인 이시카와 미유키와 남편, 그리고 코토부키 조산원에서 근무했던 간호조무사인 여성(당시 25세)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어 기소되었고, 또한 영아들의 진단서를 위조했던 의사도 함께 기소되었다. 또한 사건 수사 과정에서 신주쿠 구청의 태도도 도마에 올랐는데, 갓난아기의 사망신고서가 대량으로 접수되었음에도 이를 의심하지 않고 서류상으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처리했다는 입장만 되풀이해 빈축을 샀다.

1948년 주범 이시카와 미유키는 징역 8년, 공범인 남편은 징역 4년이 선고되었다. 간호조무사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진단서를 위조한 의사는 금고형 처분을 받았다. 이후 이시카와 부부는 형량이 부당하다며 항소했고, 1952년 각각 징역 4년, 징역 2년으로 감형되었다.

"나는 성심성의껏 아이들을 돌보았다.

아이를 맡기러 온 어머니들에게 당신의 곁에 두지 않으면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몇번이고 경고하였지만, 엄마들은 막무가내로 아이를 맡기고 떠났다.
그러니 아이가 죽는 것도 당연하다."

이시카와 미유키가 남긴 말. 이쯤 되면 인간말종도 이런 인간말종이 없다.

4 그 외

이 사건의 여파로 일본 정부는 '산파'라는 칭호를 '조산사'로 변경하고, 국가 시험 제도를 도입하여 제대로 된 전문 의료 지식을 습득한 사람만 조산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피임약 사용과 경제적 사유로 인한 임신중절도 허가되었다.

이 부부가 저지른 짓거리가 워낙 막장이었던지라 당연히 사람들은 이들을 갓난아이를 잡아먹는 몹쓸 괴물들이라고 부르며 크게 비난했다. 이 사건에서 살해당한 영아들의 유해는 사건 현장 근처의 한 절에 매장되었다가 무연고 묘지로 옮겨져 합장되었고, 매장된 자리에는 영아들의 혼을 달래는 지장보살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한편 당시 일각에서는 아이들의 출생을 거론하면서 그깟 애들 좀 죽어도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는 인간같지도 않은 평을 하는 이도 있었다. 당시의 사회상을 감안했을 때,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던데다 개중에는 사생아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니, 이런 사생아들쯤은 조산원에 맡겨지거나 해서 죽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냐는 것. 당연히 이는 상식적이냐 아니냐를 떠나 명백히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고, 이에 대해 당시의 유명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미야모토 유리코는 "아이들에게 대체 무슨 기준이 있다고 정당하게 태어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7]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판가름하는가?"라고 일침했다.
  1. 'もらい子殺し'란 영아살해의 수법으로, 주로 불륜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등 부모가 여러 사정으로 키우지 못하게 된 신생아를 데려와 아이 친부모로부터 양육비조로 돈을 받은 뒤 아이를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일본에서 특히 횡행했다고 한다.
  2. 코토부키(寿)는 목숨이란 뜻이다. 그렇게 이름 지어놓고 어린애들의 목숨을 앗아가다니…
  3. 조산사가 상주하면서 임산부의 분만을 돕거나, 임산부와 신생아의 보건지도 등을 실시하는 의료시설. 대충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의 기능을 동시에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4. 이렇게 죽은 아이들은 제대로 매장한 것도 아니고 창고 구석에 있던 쌀 궤짝에 적당히 넣어뒀다가 후술될 장의사에게 맡겨 암매장하는 식으로 처분했다.
  5. 전술된 설탕도 이 유아용 배급품 중 하나였다.
  6. 이 103명이라는 숫자는 추정 수치이며, 희생된 영아들의 정확한 수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실제 희생된 영아 수는 대략 85명에서 149명 사이로 추산된다.
  7. 사생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