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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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진
李址鎔

1870년 ~ 1928년

을사오적 중 한 사람.

매국노의 대표격이지만 이완용과 을사오적도 아닌 송병준의 유명세에 밀리는 인물.

전주 이씨 왕족으로딴 놈도 아니고 왕족이 나라를 팔아먹다니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의 손자이다. 본래는 왕실 직계와는 상당히 먼 방계로 세종대왕의 적5남 광평대군의 17대손이며 광흥령 이희하의 친아들이었으나 1881년 사망한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왕족으로 편입되었고 이로 인해 고종과는 5촌 당질의 관계가 된다. 본래 이름은 '이용구(李龍驅)'였다가 이재긍의 양자가 되면서 '이은용(李垠鎔)'으로 바꿨고 1900년 4살 난 고종의 3황자 이름이 '이은(李垠)'으로 결정되자 다시 '이지용(李址鎔)'으로 개명하였다.몇 번을 바꾸는거야 본인도 본인 이름을 헷갈릴 듯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경상감찰사, 황해감찰사를 거쳐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부터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 데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크리티컬은 내부대신(지금의 행정자치부 장관 격)으로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고 백작 작위를 얻은 것.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지용은 나라를 판 돈으로 도박에 올인했다고 한다. 사망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일본에게 속았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 후회가 동아공영론에 낚였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자신의 단순한 신세 한탄인지는 논란이 좀 있다. 그래도 후안무치하게 아들에게 "내가 보기엔 미국이 득세할 듯하니 넌 앞으로 친미파가 되라"라고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이완용에 비하면 훨씬 나은 태도를 보였다.

많이 알려진 이름이 아니기에 모르고 이지용을 이름으로 쓰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유명세가 없다...
아니! 내가 졸지에 친일파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친일파라니!

구한말 산홍이라는 기생에게 첩이 되달라고 구애했으나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란 말을 들을 정도로 개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기사

드라마 각시탈이시용 백작이 바로 이지용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MBC 드라마 조선 왕조 오백년 - 대원군에서는 박형준이, KBS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김정균이 그를 연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