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사

1 고구려의 현자 再思

再思

(? ~ ?)

고구려 동명성왕 때에 고구려의 개국을 도운 현자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오이, 마리, 협보 등과 함께 엄사수를 건너 부여를 탈출하여 모둔곡(毛屯谷)이라는 곳에 이르었을 때 만나는 세 명의 현인들 중 한명이다.

동명성왕과 만났을 당시에 재사는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으며,[1] 다른 두 명의 현인인 무골묵거는 각자 납의(衲衣), 수조의(水藻衣)를 입고 있었다. 이들을 범상치않게 여긴 동명성왕은 세 사람에게 각기 성씨를 내려주고 신하로 삼고는 "나라의 기틀을 열 현인들을 얻었다."라고 말하며 무척 기뻐하였다고 전한다.

재사는 이때 극씨(克氏) 성을 하사받았으며, 재주에 맞는 직위를 얻었다. 그리고 나서는 무골, 묵거 등과 함께 동명성왕을 따라 졸본천 지역으로 가서 고구려의 건국을 도왔다고 한다.

기록에서는 확실히 묘사되지는 않으나, 동명성왕이 이들을 신하로 삼고 기뻐했다는 대목을 보아할때 단순히 현명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무골, 묵거 등과 함께 모둔곡의 세력가였다는 설도 있다.[2]

  1. 이 마의는 말 그대로 마로 지은 옷으로 여겨진다.
  2. 그런데 이러면 대체 무얼 믿고 살던 곳을 떠나 동명성왕을 따라갔는지 의문이 생긴다.

2 고구려의 왕족 再思

再思

(? ~ ?)

고구려의 왕족으로,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동생이었으며 태조왕의 아버지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의 후임인 차대왕은 이 사람의 차남이라 한다. 하지만 이 학설의 경우 재사의 나이 문제와 겹쳐 논란이 있다. 참고로 후한서에서는 차대왕을 재사의 손자이자 태조왕의 장남이라 기록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1번 항목의 인물과는 이름의 발음이 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름의 한자까지 똑같아서 헷갈리기 쉬운 인물이다(...). 때문에 한때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신빙성없 는 설도 나돌았던 것 같다. 고구려의 왕족이기 때문에 성은 고(高)씨이니 헷갈리지는 말자.

서기 53년, 폭정을 일삼던 모본왕두로의 칼에 살해당한 후에 사람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당장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자신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를 사양하였다. 참고로 형인 대무신왕이 서기 4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해볼때 당시 재사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된다. 이 정도로도 당시로서는 이미 고령의 나이였는 의견도 있고 반론도 있다.

재사는 대신에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는데, 그 아들이 바로 태조왕이었다.

그런데 북사와 위서를 보면 정말 고령이라 왕위를 거절했을 수도 있다.
북사에서는 朱蒙死 子如栗立 如栗死 子莫來立乃并夫餘(주몽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즉위했다.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莫來)가 즉위하였고 이어 부여(夫餘)를 아울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다 위서를 보면 朱蒙死 閭達代立 閭達死 子如栗代立(주몽(朱蒙)이 죽자 여달(閭達)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 여달(閭達)이 죽자 아들 여률(如栗)이 대를 이어 즉위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유리명왕의 아들인 재사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조카 둘에다가 조카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왔으니 이 당시에는 70전후였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 이런 입장에서 보면 즉위시 10살도 안 되어서 섭정이 필요했던 태조왕의 나이가 문제이다. 재사는 태조왕을 몇 살에 낳은 것인가? 야마모토 이소로쿠? . 그렇다고 태조왕의 나이를 올려잡으면 이번에는 안 그래도 긴 태조왕의 수명이 한정 없이 길어진다. 재사계라는 혈족의 의미라면 이해할 수야 있겠지만. 물론 재사가 70전후의 고령이라는 입장은 차대왕신대왕이 재사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부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