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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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대 국왕
5대 모본왕 (고)해우6대 태조대왕 고궁7대 차대왕 고수성
시호태조대왕(太祖大王) / 국조왕(國祖王)
고(高)
어수(於漱)[1] / 궁(宮)
생몰년도음력47년(?) ~ 165년 9월(?) (118?세)
재위기간음력53년 11월 ~ 146년 12월 (93년 1개월)

1 소개

고구려의 제6대 .

삼국사기》에 '태조왕'이 아니라 '태조대왕(太祖大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 대왕으로 표기된 것은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7대 차대왕(次大王), 8대 신대왕(新大王)의 세 명 뿐이다. 그 세 명의 명칭[2] 때문에 이 시기에만 '대왕'이라는 말이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밝혀진 바는 없다.

'태조'를 붙였다는 점에서 묘호와 비슷한데, 삼국사기에서 차대왕에게 양위한 태조왕 본인이 자신을 '태조대왕'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어 학계에선 묘호가 아니라 묘호와 비슷하게 지은 호칭이며 후에 이 호칭이 시호가 된 거라는 게 통설이다. 그러나 본래 묘호로 붙인 거였는데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엔 저렇게 알려진 것일 수도 있고, 본인이 스스로 저렇게 부른 호칭이 시호만이 아니라 묘호도 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사실 묘호를 이런 경우는 태조가 아니라 세조로 붙인다.

2 이력

고구려 전기 최고의 정복군주. 위에 쓴 재위 기간과는 달리 후한서에선 84년에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대왕은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동생인 재사의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고 한다. 사실 모본왕 사후 왕에 추대된 건 재사였지만, 재사는 자신이 나이가 많다고 사양해 그 아들이 즉위했다. 당시 태조대왕은 10살도 안 되는 나이였기에 초기에는 태후가 섭정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성한 뒤엔 왕자 고수성과 함께 요동 및 우북평, 상곡, 어양 등지를 공격하여 유린하였다. 태조대왕이 노쇠한 이후에는 고수성이 병권을 잡고 이곳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높였다.

146년에 수성에게 선위했는데 이에 대해선 역모를 일으켜서 왕위를 넘겨받았다고도 한다. 어쨌든, 태조대왕은 약 19년 뒤, 별궁에서 118살의 나이로 승하했다 한다.

참고로 공인된 최장수 기록은 1997년 사망한 잔느 칼망의 만 122세이며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으며 그리고 당시보다 엄청나게 많은 인구수의 현대인에서 뽑고 뽑은 기록이 이 정도다. 상식적으로 너무 장수했기 때문에, 수성이 태조대왕에게 선위받을 무렵인 100세 무렵에 태조대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니까, 무력으로 왕권을 탈취했기 때문에 후세의 정당성 부족으로 태조대왕의 수명을 일부러 늘렸다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의 치세를 합쳐 태조대왕의 치세로 만든 것이라거나, 반대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앞당기기 위해 일부러 수명이 부풀려졌고 사실 고구려가 실질적으로 건국된 것은 태조대왕 대라는 설도 있다.

'태조'라는 묘호를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세 고구려 인들은 실질적으로 고구려를 혹은 기틀을 세운 왕으로써 보았던 듯하다. 이를 묘호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의견도 있는데 묘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도 없다. 고구려에서 태조왕 이전은 실제로는 추존왕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4] # 예를 들어 진흥왕순수비에는 태조를 언급하고 있고[5], 무열왕의 묘호를 당나라가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태종으로 올렸다. 또 일본측 기록이기는 하나 백제에서 '도모왕(都慕王)'을 태조라고 불렀다는 기록(속일본기)도 있다. 그러니 고구려의 태조대왕도 이런 의미일 수 있다. 참고로 조·종으로 끝나는 묘호는 당나라 이전에는 아무 군주한테나 올리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 이전의 한반도 왕조도 묘호를 함부로 올리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인데다 현재는 기록까지 많이 없어졌으므로 원래 얼마 없던 묘호의 흔적을 더욱 찾기 어려운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태조왕 이전은 고씨 고구려가 아닌 해씨 고구려였다가 태조왕이 되어서야 고씨가 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태조대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가 왕권을 잡아 이런 시호를 받은 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지만 계루부의 왕권 장악은 추모왕대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애초에 고구려의 초기수도인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이 계루부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3 정복전쟁과 영역의 확정

고구려 초기 최고의 정복군주 중 한 명으로, 56년 동옥저 병합, 68년 갈사국 항복, 70년 조나 병합, 72년 주나 병합으로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했다. 그리고 책성, 남해(동해안 연안), 부여 지방을 순수하여 확장된 영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한나라(후한)와도 피터지게 싸웠으며, 한나라를 막기 위해 요서에 10성을 쌓기도했다. 일각에서는 요동을 확보해야 요서 10성 축성이 가능하다며 고구려가 이때 이미 요동을 확보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통설은 아니다. 요서와 요동은 북방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요동을 완전히 장악해야만 요서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

105년에 요동의 요새 지역으로 들어와 여섯 현을 공격했다[6]가 가을 9월에 요동태수 경기에게 격파되었다. 112년에는 예맥, 현토 등을 공격했으며, 118년에는 예맥과 함께 현토를 공격했다.

121년에 한나라에서 유주자사 풍환, 현토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둥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수성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현토, 요동을 습격해 2천여 명을 죽였으며, 여름 4월에 선비족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면서 채풍이 추격하자 신창현에서 싸우다가 채풍, 용단, 공손포 등을 죽였다. 12월에는 마한, 예맥의 수천 기병을 인솔해 현토를 포위했다.

4삼국사기》 초기기록에서 태조대왕의 나이와 관련된 문제

태조대왕은 서기 53년에 7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146년에 왕위를 수성에게 물려줄 때까지 무려 93년간 왕위에 있었다. 더구나 그 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고 기록되어지니,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7] 사실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인물 2위다.[8] 다만 장수왕과는 다르게 의혹이 많고 정확하지가 않다. 확실시 되는 통치기간이 긴 왕은 스와질란드의 소부자 2세라는 왕이며 이 분은 19-20세기 인물이라 출생의혹이 적다.

물론 한 명쯤 특이하게 장수할 수는 있지만, 고구려 국왕의 나이 문제는 태조대왕만 있는 게 아니다.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의 동생인) 차대왕은 71년에 태어나서 7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다시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 동생인) 신대왕은 89년에 태어나서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70대인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형제간에 나이 차이가 43살까지 벌어진다는 것도 이상하다.[9]

모본왕이 죽었을 때 유리명왕의 아들인 재사가 자신이 연로하다며 사양해서 아들인 태조대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 기록에도 의문이 생긴다.[10] 그리고 수렴청정을 했다는 태후는 기록을 보면 선왕의 부인이 아니라 재사의 아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사의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재사보다 형일 대무신왕 무휼이 서기 4년에 태어났으므로 서기 53년에 재사는 50이 되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평균수명이 짧아서 40대도 연로하다고 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조대왕도 100살이 훨씬 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차대왕과 신대왕은 각각 75세,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는 점과 비교하면 이는 이상해 보인다. 물론 어느 쪽이 이상하냐고 하면 재사보다는 태조대왕 쪽이겠지만...

또한 재사의 아들이라는 차대왕, 신대왕은 각각 서기 71년, 89년에 태어난 점을 상기하자. 연로하여 왕위에 오를 수 없다던 사람이 20~40년 후까지 아들을 낳은 셈이다. 유리명왕이 서기 18년에 사망했으므로 신대왕이 태어났을 때 재사는 최소한 71살은 되었을 것이다. 물론 모본왕이 죽었을 때 35살인 사람이 스스로 연로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나이는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며, 다른 역사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후한서의 기록을 따른다면 태조대왕은 왕위에 오른지 69년만에 사망했고,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오른 것이 된다. 기록의 차이에 대해서는 김부식도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후한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에 고구려 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태수 요광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에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은 한나라의 산 포로를 돌려보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 계사(癸巳)에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丙戌)(146)에 이르러 친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살이었으며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 그러므로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 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달라 서로 합치되지 않는다. (후)한서의 틀린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참고

자치통감에서는 122년의 기사에서 태조왕의 뒤를 이은 수성을 고구려 왕이라 표기하면서 차대왕이 한인 가운데 살아있는 자들을 돌려보내고 현토에 와서 항복했으며, 이후 예맥이 따라서 항복해 동쪽 변방에는 사건이 적어졌다고 한다.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관계나 차대왕의 즉위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이 탓인지 신대왕 역시 기록마다 달라 혼란스럽다. 후한서의 기록이 좀 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김부식이 후한서의 기록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 약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이라는 점을 여러 인물의 말을 통해서 반복해서 서술하고 있다.

사실 후손인 장수왕도 98세까지 살았다고 하고 동시대 인물인 명림답부도 113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김부식 입장에서는 "저렇게 오래 살았다는데 삼형제설이 틀렸다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긴 있다. 다만, 왕들의 수명이 현실적이라 비교적 백제본기에 비해 신뢰를 얻고 있는 고구려본기 에서 특정한 시간대에 연속해서 왕들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수 없다.

아버지 재사의 연령 문제에 관해서는 태조대왕부터 해씨가 아닌 고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 《삼국사기》에 태조대왕을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된 점[11] 등을 들어 태조대왕은 사실 유리명왕과 혈연관계가 없는 새로운 왕조의 시조이며 이전의 왕과 무리하게 혈연관계를 주장하다가 설정오류가 생긴 것이라는 주장[12]도 있지만,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추모왕을 시조로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재사는 나이를 올려잡건 내려잡건 설명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라서, 유리명왕과의 혈연관계를 부정해 봐도 별 도움은 안 된다.(…)

다만 유리명왕이 다시 해씨 성을 사용했다는 점을 들어 아예 초대왕 고추모와 2대왕 해주류(유리명왕)가 혈연관계가 아니었고 이후 모본왕이 실각하고 추모왕의 후손인 재사의 아들 궁이 왕위에 올라 계루부의 왕위가 다시 이어졌다고 보는 설도 있다. 해씨 고구려설 참조.

남당 박창화도 태조왕의 나이를 의심하여 그의 위서 남당유고에서는 태조왕을 두명의 왕으로 분리해놓았다.

보면 25년조 기사와 46년조 기사 사이에 21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각에선 그 정도 기간이 모본왕과 태조왕 사이에서 임금이 없이 국가가 운영된 과도기가 아니냐는 의견도 제시 중이다. 다른 건 몰라도 어딘가를 순수하는 건 다른 실력자가 아닌 국왕이 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는 것이 이 의견의 근거 중 하나. 이렇게 하면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세 임금의 나이를 적어도 약 20년 씩은 낮춰서 생각할 여지가 있게 된다. 그렇게 계산해도 여전히 납득되는 연대는 나오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조선의 중종의 즉위과정과 비교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키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보인다.
아마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참고한 해동고기의 내용에 몇가지 오류가 있던 것이 있었을 듯 하며, 거기에다 훗날 명립답부에 의해 즉위하는 신대왕이 정통성 확보를 위하여 연도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一月 태조왕이 즉위하다
三年春二月 요서에 성을 쌓아 후한의 침략에 대비하다
三年秋八月 남부지방이 해충으로 곡식이 피해를 입다
四年秋七月 동옥저를 정벌하고 영토를 넓히다
七年夏四月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얻다
七年秋七月 국내성 지역에 큰 홍수가 나다
十年秋八月 사냥을 나가서 흰 사슴을 잡다
十年秋八月 남부지방이 풀무치 피해를 입다
十六年秋八月 갈사국왕의 손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다
十年冬十月 겨울에 천둥이 치다
二十年春二月 조내를 정벌하다
二十年夏四月 국내성에 가뭄이 들다
二十二年冬十月 주내를 정벌하다
二十五年冬十月 부여가 신기한 사슴과 토끼를 바치다
二十五年冬十一月 국내성 일대에 눈이 많이 내리다
四十六年春三月 책성을 순수하고 돌아오다
四十六年冬十月 책성에서 국내성으로 돌아오다
五十年秋八月 사신을 보내 책성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다
五十三年春一月 부여가 호랑이를 바치다
五十三年春一月 요동을 침략하였으나 요동태수에게 패하다
五十三年秋九月 요동태수 경기가 맥인을 쳐부수다
五十五年秋九月 자주색 노루를 잡다
五十五年冬十月 동해곡수가 붉은 표범을 바치다
五十六年 가뭄으로 농작물을 거둘 수 없어 백성이 굶주리다
五十七年春一月 후한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九年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다
六十二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二年秋八月 남해 지역을 순수하다
六十二年冬十月 남해에서 돌아오다
六十四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四年冬十二月 눈이 많이 내리다
六十六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十六年夏六月 현도군을 공격하다
六十六年秋七月 황충과 우박 피해를 입다
六十六年秋八月 현명하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다
六十九年 후한이 침략해왔으나 수성이 이를 막다
六十九年夏四月 고구려가 후한 요대현을 공격하다
六十九年冬十月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하다
六十九年冬十月 숙신에서 사신이 오다
六十九年冬十一月 수성에게 나라 일을 맡기다
六十九年冬十二月 후한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다
七十年 후한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부여가 후한을 도와 실패하다
七十一年冬十月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다
七十二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七十二年冬十月 후한에 조공하다
七十二年冬十一月 국내성에 지진이 일어나다
八十年秋七月 수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건의하다
八十六年春三月 수성이 질양에서 사냥하다
八十六年秋七月 수성이 동생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다
九十年秋九月 환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어릴때 이름
  2. '태조'인 대왕, 다음 대왕, 새로운 대왕. one, another, the other
  3. 오히려 이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은게, 생애 전부를 왕을 하더라도 93년(...)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당시 고구려의 위치, 기후에 기반하면 평균 연령이 백제, 신라보다 훨씬 낮다. 참고로 요즘에도 90세 이상이면 고령 중에서도 높다. 84년이면 재위기간이 63년이니 그나마 아주 어릴 때 왕이 되었다가 노년이 되어서 물러나는 것으로 추측하면 이쪽이 합리적이다.
  4. 만일 이 태조왕이 진짜 고구려의 건국자라면 주몽신화도 설명이 가능하다. 왜 알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것도 실제로는 태조왕의 기나긴 재위기간에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5. 신라의 태조는 어떤 왕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 관계로 학자들 사이에 여러 설이 있다.
  6. 호삼성에 따르면 고구려 태조 때에 이르러 점차 강성해 자주 변경의 요새를 공격했으며, 이때 고구려는 요동성 신빈현에 도읍했다.
  7. 태조대왕, 장수왕과 달리 반대로 국내 왕들 중 가장 단명한 왕은 고려창왕으로 한국 나이로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주살되었다.
  8. 119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대단히 장수한 셈.
  9. 이복형제라고 둘러댈 경우 말이 되긴 하지만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직접 왕이 되지 않고 아들에게 양보한 이유가 자신이 나이가 많은 노인이기 때문에 사양한 것인데, 그정도로 나이가 많은 노인이 그 뒤로 최소한 40여년을 더 살면서 아들을 얻었다는 말이 된다.
  10. 재사가 왕에 오르지 못한 이유가 후대에 베트남의 권신 쩐투도(진수도)가 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쩐 왕조를 건국했는데 자신이 제위에 오를 명분이 없어서 조카인 쩐 태종을 옹립한 것이나 조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옹립한 것처럼, 재사도 왕위에 오를 명분이 없어서 아들인 궁을 옹립한것으로 생각된다.
  11. 김부식이 인용한 '해동고기'의 구절에도 국조왕으로 표기하고 있다.
  12. 두로라는 사람이 모본왕을 죽인 후 태자는 '불초하다'는 이유로 왕위를 잇지 못하고 태조대왕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이 기록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연상시키는데, 쿠데타라면 왕의 방계 혈족 뿐만 아니라 아예 왕족이 아닌 사람이 왕위에 올랐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