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전승남 |
생년월일 | 1974년 11월 26일 |
출신학교 | 학동초 - 언북중 - 덕수상고 - 중앙대 |
입단 | 1997년 2차 2순위 |
투타 | 우사우타 |
소속팀 | LG 트윈스 (1997~2004) |
등번호 | 40번 (1997~2004) |
'LG 트윈스 등번호 40번 (1997~2004) | ||||
김영직 (1987~1995) | ➡ | 전승남(1997~2004) | ➡ | 신창호 (2006~2007) |
LG 트윈스에서 활약했던 사이드암 투수. 현재는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사이드암 투수의 전형적인 레파토리인 싱커-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했는데, 싱커의 구속보다는 페이스 조절로 승부를 봤던 유형으로 안정된 폼, 탄탄한 투구 밸런스에 제구력이 대단히 뛰어났던 투수. 다만 선발투수로 발돋움할 찰나에 부상을 입고 스윙맨으로 활동하는 바람에 관리를 잘 받지 못해 선수생활을 길게 가져가지 못한 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1974년생으로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으며, 전 농구선수 서장훈과 NC의 배터리코치인 이도형과는 학동초등학교 동창이다. 1997년 LG 트윈스의 2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
LG 입단 전인 중앙대 4학년 때 이병규, 조인성, 김선우 등과 함께 애틀랜타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적이 있다. 그는 1997년 입단 첫 시즌부터 불펜 투수로 뛰며, 1군 32경기에 등판해 123이닝 6승 5패 ERA 3.29로 선전했다. 하지만 입단 동기인 외야수 이병규가 워낙 잘 해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참고로 이 시기에 이만수가 은퇴하기 전 현역에서 마지막으로 친 홈런을 맞은 투수가 그였다.
1998 시즌은 ERA가 4.15로 상승했지만, 1군 33경기에 등판해 112와 2/3이닝 6승 7패로 필승조로 활동했다.
그러나 1999 시즌은 부상으로 말아먹고 만다.
2000년은 2점대 ERA를 찍었다만, 1군 19경기 40이닝 소화에 그쳤다. 아무래도 입단 초기 2년간 워낙 굴려진 탓에 부상을 입어 소화 이닝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2001~2002 시즌은 불을 지르며 잊혀지나 싶었다.
하지만 2003년에 필승조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68경기 106 2/3이닝 ERA 2.45 8승 2패 2세이브 11홀드는 그의 커리어 하이였다. 그리고 그 해 시즌 초반 36과 1/3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전승남은 소리없이 사라지는데, 24경기 18이닝 5점대 ERA로 제대로 말아먹은 것.
하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2004년 9월에 리그를 강타한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된 것. 결국 재검에서 공익 판정을 받았다. 시즌 후 전승남 본인은 공익으로 입대하면서 소집 해제 후 팀에서 입지가 좁아질 걸 우려해, 2004 시즌 후 LG 구단에 자진 방출을 요구하며 팀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이는 본인이 프로 무대 복귀를 하지 못하고 쓸쓸히 은퇴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2006년에 소집 해제된 후 미국 무대를 노크하며 메이저리그 팀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7년 말에는 한국프로야구 복귀를 노리며 이적을 시도했지만, 결국 활동할 팀을 못 찾고 은퇴했다.그러니 왜 성급하게 판단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