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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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 No. 81
이도형 (李到炯 / Dou-hyeong Lee)
생년월일1975년 5월 24일
신장182cm 95kg
출신지서울특별시 강남구
학력학동초 - 휘문중 - 휘문고
포지션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3년 OB 베어스 고졸연고지명
소속팀OB 베어스/두산 베어스(1993~2001)
한화 이글스(2002~2010)
코치경력NC 다이노스 2군 배터리코치(2014.11.03~)
한화 이글스 역대 주장
이영우
(2004)
이도형
(2005~2006)
정민철
(2007)

1 소개

OB/두산 베어스한화 이글스포수이자 병살. 현재는 NC 다이노스의 2군 배터리코치.

2000년대 중반 한화 이글스의 전성기시절 주축으로 활약하며 많은 사랑을 받은 타자이다. 그리고 불합리한 FA 제도에 후배 선수들을 위해 자신의 선수생명을 걸고 저항하며 작지만 값진 열매를 거둬들인 훌륭한 인격자이다.

2 선수 경력

OB-두산 베어스에 있다가 2002년 1월 17일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1] 같이 OB-두산에 있던 김인식 감독이 2004 시즌을 마치고 한화에 부임함에 따라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됐다.

데뷔 시절만 해도 공수 겸비의 유망한 포수로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2] 그러나, 후에 OB에 최기문, 진갑용, 홍성흔 등 국가대표 출신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바람에 포수 자리에서 밀렸으며, 1997년에는 시즌 중 현역으로 입대해야 했다. 그나마 지명타자 자리조차도 최훈재, 타이론 우즈, 강혁 등 줄줄이 강타자가 들어오는 바람이 밀렸다.

그러한 바람에 2000년에 제대하여 복귀하고 나서도 기회를 많이 잡지 못해, 2001 시즌 두산 베어스의 KS 우승 후 강인권를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포수 자리가 부실했던 한화 이글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2004 시즌 어깨 부상으로 포수로서의 활약은 접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장타력으로 지명타자로 들어서게 돠었다. 그러한 상황에 힘입어 2005 시즌에는 20홈런도 돌파하는 등 한화에서의 입지가 나름대로 탄탄해졌다.

2007 시즌에는 이도형을 포수로 돌림으로 신경현-심광호-이도형 간의 경쟁을 통해 언제나 2%, 혹은 그 이상으로 모자랐던 한화 포수의 질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신경현의 약진 등으로 인해 유야무야되고, 되려 부족한 타격훈련 탓에 그나마 있던 타격조차 밀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병살타율이 대단히 높았는데 2007 시즌에는 더욱 심해졌으니. 그 뒤 김인식 감독이 키우겠다던 정범모 등의 신인 포수, 그리고 지명타자 후보에도 김태완, 이영우 등이 있어 이도형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것으로 보였지만 2009년에는 오히려 비중이 더 늘었다. 지명타자. 포수, 1루수 등 전천후로 뛰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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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의 놀라움은 가공할 만한 타석 대비 병살타로써, 일설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든 병살타를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귀신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 그래서 이러한 그의 재능은 전형적인, 안 뚫리는 한화 야구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타 팀 팬들에게 더욱 사랑받고 있다. 한화 팬을 포함한 야구 팬들은 이러한 이도형에게 애증을 담고 있으며 야갤에선 특별히 그의 능력을 기려 '도형신', '병살의 마스터피스', '비밀번호 463(2루수-유격수-1루수를 가리키는 숫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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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도 안되는 병살 스킬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어째 다 초구타격이다...

청주 경기에서의 활약이 좋아 '청주 본즈'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특히 청주에서의 처가가 지방의 재력가인 탓에 한화 선수들이 청주로 오면 장모님이 자주 피자를 돌린다고 해서 '피자도형'이라는 별명도 붙었다.[3]

참고로 CJ 마구마구 2009 프로야구 4월 30일까지 청주구장에서 그의 성적은 11타수 9안타 2홈런 1볼넷 5타점 장타율 1.600 출루율 0.909 OPS 2.509. 오오 청주 본즈 오오

그러나 2009년에는 뇌진탕에 시달리던 김태균의 공백 속에서 사실상 타선의 대들보로 활약해서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타율 0.318(98안타 12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유일의 3할 타율을 달성한 것. 2006년을 기점으로 명백한 하향세를 보이던 터라 그의 재기는 더욱 놀랍다. 팀 배터리진의 불안에 다시금 포수 마스크까지 쓰게 되었고, 양대 거포 김태균이범호가 2010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김태완과 더불어 둘뿐인 검증된 장타자로 남은 그의 활용가치는 점점 솟아만 갔다. 역시 FA로이드는 무섭다 이건 팀의 주력이 빠졌기 때문에 반사 이익을 챙긴 것 같지만, 타자로서의 이도형의 타격 스킬 자체가 발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4]

특히 결정적인 두 방의 끝내기 홈런을 작렬시키며 어려운 시즌을 보내던 한화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7월 4일 기아전에서 선발 류현진의 12탈삼진 역투에도 불구하고 패색이 짙던 경기에서 한기주를 상대로 장렬한 끝내기 역전 2점 홈런을 쳐 한화 이글스의 12연패에 종지부를 찍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오오 피자신!

그 뒤 7월 16일 사직 롯데전에서 카림 가르시아의 숄더 태클을 맞고 KO. 다음날 바로 2군으로 내려갔다가 복귀한다. 그의 뜬금포는 여전히 건재해서, 정민철의 은퇴식이 있었던 9월 12일 대전 히어로즈전에서 9회말 끝내기 3점 홈런으로 9점차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으며[5] 선배의 마지막 가는 길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김태균이범호가 떠나간 2010 시즌에도 하루 2홈런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는 등 중심 타선에서 나름대로 제 몫은 해 주었으나, 김태완의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포지션도 아닌 1루수로 나왔다가 수비 중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2010 시즌 통째로 시즌 아웃.[6] 이도형과 김태완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 프런트미스송광민마저 군으로 끌려가 버린 한화 타선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진짜로 타 팀(FC 기탈리아 제외)의 1.5군~2군급 타선이 되었고, 김태완이 복귀할 때까지 망했었다. 게다가 김태완조차도 장성호의 영입 이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남은 시즌을 말아먹고 아시안 게임 출전도 불발되어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면서, 현재까지도 한화의 2010 시즌은 한화 역사상 최악의 타선을 보유했던 시즌으로 여겨지고 있다.

2.1 FA 신청과 투쟁

2010 시즌 종료 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FA를 신청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싶었고, 불공평한 FA 제도[7]에 맞서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소속 팀 우선협상 기간 동안 계약하지 못했다.

팬들은 FA 제도의 불합리함에는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2010 시즌에 한것도 없으면서 뭘 더 바라냐고 성화를 냈다. 사실 이도형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리 만족할 만한 팀이 없기 때문에 과연 좋은 계약을 맺을지도 문제고, 설령 조건이 어느정도 맞는다 한들 보상선수 문제로 인해 더더욱 조건을 맞추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도형 본인은 정 안 되면 은퇴라도 하겠다는 심사로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

2011 시즌 FA 자격자 계약 시한인 2011년 1월 15일 5시까지 계약이 되지 않았기에, 최종적으로 최영필과 함께 FA 미아가 되었다. 한화 구단은 한 번 만나서 계약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1월 14일 마지막으로 만나서 팀의 현장 직원을 제안했으나 이도형은 개인 사업(후술하는 사회인야구장 사업)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앞으로 1년 간 KBO에서 뛸 수 없으며, 나이를 생각할 때 사실상 선수로서는 은퇴다. 이미 한화 구단에서는 마감 시간 전에 이도형과 최영필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에게 넘긴 상황이었다. 최영필은 이듬해 보상권리 포기로 SK 이적에 성공하긴 했지만.

KBO의 FA 미아 사례로는 최영필과 이도형은 2006년의 노장진(전 롯데)-차명주(전 한화)에 이어 3번째, 4번째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해당 선수들은 모두 모 구단에서 활약한 공통점도 있다?!

그리고 KBO를 상대로 법정 싸움에 들어갔다. FA 계약의 보상규정 및 계약제한 기간 규정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 드디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샘이다. 물론 승소 여부를 떠나 앞으로 야구계로의 복귀는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판결 결과에 따라 KBO의 커트 플러드[8]장 마르크 보스만으로 기록될 지도 모르겠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류근관 교수는 2012년 1월 24일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칼럼에서 이도형 선수의 사례를 언급하며, 당시 프로야구의 FA 제도를 비판하였다.

가처분이 수용 되더라도, 이도형 개인에게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대가 개크보KBO라 어느 구단이 미움털 박힌 선수를 영입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그동안 운동을 쉬었기 때문에 제 실력 발휘하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판결이 유효하면 후배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혜택이 돌아갈 것이며, 야구 선배로서 훌륭한 귀감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결국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FA 협상에 대한 조항이 바뀌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

이도형의 정당한 요구덕분에 마침내 FA협상 실패시 1년간 자격정지 조건은 사라졌다. 대단한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사실 준척급 FA 선수들에게 강요되었던 진짜 독소조항은 자격정지가 아니라 2015년 현재에도 건재한 보상선수 규정이고,[9] 그동안 자격정지 철폐로 혜택을 입은 선수가 없다시피한 것만 봐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도형도 이 부분을 가처분 신청에서 함께 다루었으나 최종 판결에서는 쏙 빠진 것이다. 갑질을 투쟁으로 이겨냈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실질적으로 해결된 건 없는, 참으로 절묘한 판결이다

다만 이도형의 투쟁으로 불합리한 FA규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보상선수 규정 개선에 대해선 대부분이 동의하나 실제 제도개선 논의에서는 각팀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려 결국 매번 어물쩡 넘어가는게 문제. 이 분들이 나서야 하는데...

3 은퇴 이후

2011년 초 계약이 불발된 이도형은 선수 복귀 생각은 거의 없다고 하여 사실상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대신 수도권에 사회인 야구 전용 야구장을 지어서 사회인 야구 팀들에게 대여해 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2011년 난관을 겪었던 선수협 문제에 대해서도 소신있는 목소리를 내며 동료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이듬해 선수협 사무총장 선거에서도 박충식에 이은 2위의 득표를 기록하는 등(139표, 당선자 박충식은 183표) 선수들 사이의 신망도 두터운 듯.

2012년 9월 olleh TV 한화 편파중계에 등장했다. 그렇게 모진 대우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한화를 향한 애정은 식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깨알같은 어록.

2013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의 육성위원으로 위촉, 활동하였다. 팀이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7월부터 한화 공홈에서 준비한 편파중계의 해설위원으로 한화 팬들 앞에 다시 돌아왔다. 팬의 심정으로는 그저 고마울 따름.

2014년에는 일간스포츠에서 런칭한 스포츠 매체인 베이스볼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매체의 성격에 걸맞게 깊이있는 분석과 심도있는 인터뷰 등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4월부터 정규시즌 마감까지 6개월 가까이 아프리카TV에서 오승환이 속해있는 한신 타이거스 편파 중계 해설을 하기도 하였다.

4 지도자 경력

2014 시즌 후 강인권 배터리코치가 두산 베어스로 옮기자 1군 배터리코치로 보직이 변경된 최기문의 후임으로 NC 다이노스의 2군 배터리코치로 발탁되면서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 여담으로 2002년 1월 두 선수가 1:1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었던 적이 있다.[10]

5 트리비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KBO 끝내기 홈런 통산 1위다(6개).[11] 흠좀무.

병살로 유명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실제 통산 병살타 수는 99개! 세 자리수가 안된다! 다른 두산 출신 선수(안경현, 홍성흔, 김동주 등)에 비해 숫자 자체는 현저히 적다. 하지만 상술한 3명은 팀의 확고부동한 주전으로 출장이 이도형보다 훨씬 많았고 타격 전반에서 훌륭한 성적을 쌓은 반면, 이쪽은 커리어 전체나 출장횟수에 대비해서 기상천외한 병살타가 많았기에 병살왕 이미지가 붙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에 대해서 본인 타순이 주로 5번이나 6번에 섰으며 그 앞에는 김태균같은 역시 거포 타자들이 있었기에 병살타가 되기 쉬운 조건에 있을 때가 많아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전 농구 선수인 서장훈과는 서울학동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다고 한다. LG 트윈스에서 1997년부터 2004년까지 뛰었던 투수전승남도 이도형과 학동초등학교 동창이다.

야구게임에선 유독 저평가당하는 카드 중 하나. 특히 포수 수비가 최악이라 거의 대부분 야구 게임에서는 지명타자로만 굴려진다. 프야매 같은 온라인 게임은 물론이고 컴투스 프로야구 같은 모바일 야구 게임에서도 마찬가지. 분명 어깨 부상은 2004년에 당했는데 어째서인지 2003년 이전 카드들도 단체로 수비스탯들이 안좋다.

이사만루2015 KBO에서는 03 이도형밸붕급의 스탯을 자랑한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1994OB 베어스60112.26830314181019.420.317
199595283.29082120144838120.481.333
1996618.22241001100.278.222
199781208.212449153417116.337.263
1998현역으로 군 복무
1999
2000두산 베어스69125.26433612199010.376.314
20014086.2562271213607.430.312
연도소속팀경기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4사구장타율출루율
2002한화 이글스123365.24188150165536222.414.282
2003125365.26697190165840041.449.337
200466125.261438062710014.418.315
2005113391.258101181227243039.478.325
2006119426.25610922019
(5위)
6346032.441.306
200779177.186334062618021.311.271
20085467.2241510216203.328.254
200998280.31889151125633039.507.400
20102786.2912520413809.454.354
KBO 통산(15 시즌)11553154.25881514261305193175282.431.317
  1. 이 때, 트레이드 대상은 강인권(현 두산 베어스 배터리 코치) + 현금 5억원.
  2. 특히 1995년이 이도형이 주목을 받았던 시기다. 1995년에 14홈런을 기록했는데 그 중 12개가 홈 구장, 즉 잠실 야구장에서 친 홈런으로 당시 한 시즌 잠실 야구장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
  3. 피자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은 와전된 소문. 그나마 터지는 이도형의 안타를 '피자포'라고 부르는 까닭이 이것이다.
  4. 한국 나이 35세에 극단적 당겨치기 타법에서 벗어나 밀어치기를 구사하기 시작하며 스프레이 히터가 되었다.
  5. 역대 2위의 대역전승. 역대 1위는 당연히 이것.
  6. 팔이 부러진 경기는 2010년 5월 1일 경기로, 당시 부딪힌 선수는 삼성의 조동찬이다. 정확히는 왼쪽 상완골 골절이며, 철심을 박고 1년 반이 지나서야 철심을 제거할 만큼 큰 부상이었다.
  7. 18인 외 보상선수 문제로 대형 선수가 아니면 이적이 쉽지 않다.
  8.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10여년간 뛰다가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원치않는 트레이드를 당했는데, 이에 맞서 MLB에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FA제도 도입의 단초가 된 선수다. 자세한 내용은 FA 제도마빈 밀러 항목 참조.
  9. 보호선수 숫자 등 세세한 변화는 있었다.
  10. 이도형↔5억, 강인권.
  11. 2009 시즌 전까지 4개를 기록했다가, 그 해 끝내기 홈런을 2개나 쳐 '난세의 영웅' 인증을 하면서 기록 갱신. 참고로 공동 2위는 5개의 이승엽김태균. 다른 5개 기록을 가진 마해영심정수는 은퇴. 4위는 송지만(4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