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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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33대 창왕 왕창34대 공양왕 왕요고려 멸망/조선 개국
초대 조선 태조
묘호없음[1]
시호공양왕
(恭讓王)[2]
능묘고릉(高陵)
왕(王)
요(瑤)
배우자순비 노씨(順妃 盧氏)
아버지왕균(王鈞)
어머니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
생몰년도음력1345년 2월 5일 ~ 1394년 4월 17일
양력1345년 3월 9일 ~ 1394년 5월 17일 (만 49세 2개월)
재위기간음력1389년 11월 ~ 1392년 7월 17일
양력1389년 ~ 1392년 8월 (4년)

1 소개

고려의 제34대 왕이자 마지막 왕. 창왕이 폐위되자 이성계 일파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했다.

부계로는 20대 왕인 고려 신종의 7세손이고, 모계로는 충렬왕의 고손자[3]가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성계와 계실 강씨의 아들 이방번이 그의 형인 정양군 왕우의 사위였기 때문에 옹립되었다.

왕 자리와는 거리가 멀어 치부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아서 부유하게 살았던, 평범한 왕족이었으나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망국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2 공양왕은 무능하다?

당시 정국은 이성계 일파가 잡고 있어서 실권은 없었지만, 왕은 이성계 일파에 대한 대항마로 이색정몽주 같은 반 이성계파 인사들에게 주목했고 그들을 이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여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했다. 치부에 힘쓴 배경 탓인지 우왕창왕 시절 토지개혁을 추진했던 조준정도전을 즉위 전부터 미워했던 탓도 있다.

망국의 군주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그저 멍 때리고 있다가 이성계에게 왕 자리를 뺏기고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인상이 있지만, 실상 기록을 보면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이성계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우왕창왕의 처리. 기록 상으로는 당초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의 처단에 대해 조금 더 미루자는 입장이었으나 왕의 결단으로 이 둘은 신속히 제거되었다.

사실 이성계의 입장에서도 '주위의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우왕과 창왕의 빠른 처리는 그렇게 좋은 일은 되지 못했지만, 아무튼 왕위에 오른 공양왕의 입장에서는 우왕과 창왕이 살아있어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즉, "결정은 내가 내리지만 전왕을 시해했다는 욕은 이성계가 다 먹겠지??"라는 계산에서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이었고 실제로도 백성들의 여론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4]

특히 반 이성계파의 정점으로 유능한 관료이자 유력한 정치인이기도 한그리고 공양왕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기도 한 정몽주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정몽주는 공양왕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성계 일파를 계속 공격했고 급기야 1392년 이성계가 아들을 마중나가면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당했을 때에는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 이성계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정몽주는 왕에게 크리티컬 히트를 날릴 것을 계속 주문했지만 왕은 여기서 어물어물거려 결정타를 날리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이성계의 부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심한 편도 아니었고, 특히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의 빠른 행동력으로 인해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와 버렸고 이들을 일망타진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공양왕 자신이 바로 그 이성계에게 옹립된 왕인 데다가 방계 왕족이라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성계 일파를 완전히 몰아낸 다음에도 사대부들이 공양왕을 확고하게 지지해준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세력을 꺾었으니 이쯤에서 숨을 고르면서 '세력 균형'을 잡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실제로 고려 명종무신정변으로 무신들에게 옹립되었는데, 정변을 주도한 1세대 무신집권자들이 이의민의 죽음을 끝으로 모두 사라지자 최충헌에게 폐위되어버렸다.

거기에 이성계 일파를 일단 조정에서는 몰아냈다고 해도 이미 물리적인 군사권은 오로지 이성계의 것이었고 이성계가 평화적인 왕위 양위를 위해서 물리력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 뿐이지, 이렇게 밀어붙이다 이성계가 마음을 바꾸거나 혹은 공양왕이 자신과 수하들을 갈아버린다고 위험하게 생각하는 순간 그냥 (실제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해서 왕조를 바꿔버릴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무신정권 시절이나 바로 전 왕인 우왕 창왕처럼 그냥 퇴출시켜버리고 다른 왕씨를 옹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공양왕은 숨을 고르고 이성계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사직은 이미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 고려 왕조의 멸망

결정적인 타격은 이방원정몽주 암살이었다. 명망 있는 대신이자 반 이성계파로써 왕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정몽주 조차도 무참히 살해되고 그에 대해서 왕이 이성계 일파에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이로써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지자 왕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조회가 끝나면 대신들이 왕이 아직 자리에 있는데도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리거나 연회에서 공양왕 면전에서 술주정을 하는 대신도 있을 지경이었다.

급기야 신하인 이성계에게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5] 사실 동맹이란 것은 나라와 나라 또는 세력과 세력 간이 맺는 것이지 군주와 신하가 맺는 것이 아니다. 무슨 현대 국제법의 교전단체 개념도 아니고 다만 고려의 역사에는 무신정권이라는 전례가 있었으니 그를 모범으로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과거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 집권한 사례도 있으니, 무신정권 시대의 전례를 따라 이를 반복하여 이성계의 실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고려왕조는 그저 허울만 남는 한이 있어도 왕씨 왕조는 지키겠다는 처절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씨막부 다음은 이씨막부?

또한 이성계는 단순한 권신이 아니라 동북면[6] 지역을 통째로 사실상 독립왕국으로 경영하면서 만주지역에까지 자신을 섬기는 부족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린, 고려 역사상 최강의 권신이요 군벌이었다. 이미 일개 신하로 볼 수준을 넘어서버린 것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건국자라서 묻히는 감이 있지만 동북면에서의 이성계의 입지는 이미 왕이나 다름없었고 우왕이 즉위하던 시점에서 이성계를 건드릴 사람이 없었으며 위화도 회군을 하기 전에 사병 군사력이 이미 고려 전체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 1392년 7월, 왕대비 안씨의 이름으로 왕은 폐위되고 원주로 유배되었다. 7월 16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7] 이로써 고려 왕조는 34대 475년만에 멸망했다. 정몽주가 죽은지 4개월 만이었다.

애초 이성계가 왕위를 단순 찬탈하고자 했으면 위화도 회군 때 이미 왕위에 오를 힘이 있었지만 최대한 보기 좋게 왕위를 이어받고 싶기에 세운 것이 공양왕이었다. 그래서 선양이라는 이상적인 역성을 꿈꾸던 이유로 공양왕과 정몽주는 끝까지 이성계를 견제할 수 있었지만 결국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사실 유명한 삼국지조조사마의 일가가 '보기 좋은 선양'을 위해 허수아비 앉혀놓고 공들인 수십년의 시간에 비하면 고작 쿠데타 4년만에 다 죽이고 왕이 된 이성계는 상당히 빨리 판을 뒤집은 편이다.

백관들이 왕대비 안씨의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의 집을 찾았을 때 이성계는 사양의 뜻으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백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번의 사양 끝에 옥새를 받들었으며, 즉위식에서 또한 자신의 몸이 성하지 못해 도망가지 못했다며핑계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4 최후

유배된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고려 왕실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끊이질 않고 왕씨 왕족들이 역모를 일으킨다는 말도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불안감탓에 결국 조선 개국 후 대대적인 왕씨 몰살극이 벌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강의 반란모의 이후로 거제도강화도에 귀양가 있던 왕씨들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되어 있다.[8]

결국 폐위 2년 후인 1394년 3월 삼척으로 유배되었고, 음력 4월 17일 삼척고돌산의 살해재[9]에서 정남진에 의해 왕세자 왕석, 왕자 왕우와 함께 교살되었다. 향년 50세.[10]

공양왕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삼척시에 2개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공양왕의 유족과 조선왕조측에서 인정하고 예우해준 것은 고양에 있는 무덤으로, 시체를 확인한 후 삼척에서 이장한 것이다. 때문에 공양왕릉으로 가는 공양왕길도 삼척과 고양 2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2군데 존재하는 능에는 여러모로 심상치 않은 전승들이 내려오고, 이에 대한 기록들도 모순되어 공양왕의 죽음에는 상당히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실록에는 삼척에서 교형에 처해졌다고 하는데, 고양시의 공양왕릉 주변 지역에는 공양왕이 탈출해서 이 근처까지 왔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으며[11] 실제로 조선왕조에서도 고양시의 능을 공인된 것으로 다뤘다. 왕씨 세력 학살과 엮어 보면 공양왕이 유배지 삼척에서 탈출을 감행해 모종의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된 뒤 그 일체가 조선왕조에 의해 은폐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도 있다.

반면에 사서 기록에 따르면 공양왕의 처형은 왕씨 몰살과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12] 실록의 기록을 신뢰하게 되면 공양왕이 무언가 큰 사건을 일으키려고 탈출한 게 아니라 단순히 처형을 피하기 위해 탈출했다가 잡혀 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順妃盧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의 재위 3년 만인 1394년에 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다. 원래 폐위 직후에 공양군(恭讓君)[13]으로 불리었으나, 1416년에 조선 태종이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

이성계에게 견제와 방해를 시도했고, 최후에도 저런 수상쩍은 사건이 있어서인지 능에 대한 예우는 그야말로 안습. 본래 왕릉보다 높은 곳에는 무덤을 못 쓰게 되어 있고 근처의 숲에서는 나무도 함부로 자를 수 없을 만큼 예우받아야 하는데, 공양왕릉은 아무리 능 근처 지역이 명당자리로 꼽혀 왔다지만 왕릉을 대놓고 굽어보는 자리에 조선시대 민간인, 사대부들의 묘가 수두룩해서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망국의 슬픔이 절절하게 와닿는 모양새.

5 평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에 언급한 것처럼 그저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고 나름대로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왕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망설인 것이 결국 자신의 나라와 목숨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적어도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같지만 실은 조선 태종 이방원이 내린 시호인 '공양(恭讓 : 공손할 공에 양보할 양)'이라는 이름에 꼭 걸맞는 왕은 아니었던 셈.[14]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냥 부유하게 살다가 갔을지도 모르는 인물. 애초에 이성계가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유도 알고 있었을 테니 그냥 이성계가 하자는 대로 해서 끝까지 목숨을 보전하자는 생각도 했겠지만, 어떤 길을 택하든 이성계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던 듯하다.[15] 어쨌든 모든 망국의 왕들이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잔혹한 숙청을 당한 안습의 군주.

한국 역사의 다른 마지막 임금의 최후에 비교해 보더라도 훨씬 비참한 편이다. 고조선 준왕은 그래도 목숨과 어느정도 세력을 부지한 채 달아나 재기할 수 있었고, 금관가야구형왕은 그래도 신라의 지배계층인 진골로 편입되었고[16], 경순왕과 자견왕은 신라, 탐라 멸망 이후 고려 왕조의 지배층이 되어 높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17] 보장왕의자왕, 풍왕[18], 대인선이 패망한 후 당나라, 요나라로 끌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고[19], 순종황제의 경우에는 일제가 내린 '창덕궁 이왕'직을 순순히 받고 당구나 치면서 놀면서 살다가 자연사했고 일족도 일제가 망할 때까지는 일본 귀족 대우를 받았다. 반면 공양왕은 폐위 후 본인도 유배ᆞ사사당하는 것은 물론 왕씨 일족들까지 대부분 조선 조정에 의해 참혹하게 학살당했으니...

물론 그나마 왕건에게 쫓기던 중 농민들에게 맞아 죽고 왕건이 세운 고려왕조 시기 내내 일방적으로 격하된 태봉궁예나 왕위에 오르자마자 1년도 안돼 나라가 고려에게 멸망, 흡수당한 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고려의 후삼국통일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조차 없는 후백제신검[20]이나 발해가 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당한 후 망한 발해 대씨 왕족 후손이란 명분을 앞세워 발해 유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아 옛 발해 땅에서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요가 지배하던 옛 발해 땅 일부 지역을 점령, 장악하는데 성공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라 요나라에게 대항했다가 요나라 대군의 공세와 내부 배신으로 1년도 채 못가고 요나라에게 멸망당한 흥료국의 대연림, 자기 아버지가 신라 왕이 되지 못했다고 분노가 폭발하여 신라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끝내 패사한 장안국김헌창, 적국 고구려의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이 멀어 적국으로 배신을 하려던 낙랑공주를 죽여가며 사직을 지키려다 고구려한테 나라가 망해버린 최씨낙랑국최리 같은 사람들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성계는 주성왕제신의 이복형 미자계를 송에 봉해 상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을 본받아 공양왕의 형이자 자신의 사돈인 정양군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해 고려 임금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왕우가 이성계의 사돈이었기 때문에 그와 두 아들 왕관, 왕조는 왕씨 숙청 때도 무사할 수 있었으나, 왕우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자 왕관과 왕조가 피살되면서 귀의군의 직계가 단절되었다.

6 사극에서

공양왕이 나오는 드라마로는 KBS 용의 눈물, SBS 대풍수, KBS 정도전, SBS 육룡이 나르샤 등이 있다.

<용의 눈물>에서는 중견배우 김영선[21]이 연기했다. 어보를 갖고 온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자신은 왕 하기 싫다[22]고 말하는 장면에서부터,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의 공양왕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역사대로 폐위되었다가 결국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자신의 혈족들이 떼로 죽었으니, 우리만 어찌 살아남길 바라겠냐며 사약을 거부하고, 의연하게 죽고 싶다며 단검으로 배를 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장면에서 마지막 유언은 "왕씨의 혼령들이여!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을 잊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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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에서는 배우 남성진[23]이 연기했다. 첫 등장에서 자신에게 어보를 바치려는 배극렴을 보고 담장을 넘어 도망가려다가 그 곳에 이지란이 있어서 망했어요. 결국 왕으로 즉위하지만 정사를 돌보는 것에는 무관심하여 이에 대해 간언하는 이색에게 "반석이니 뭐니 하는 것은 수시중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과인이야 옥새만 제때제때 찍으면 되는 것이고요."라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인다. 급기야는 누가 듣겠다면서 이색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할 정도.

그러면서 나인들과 놀기에만 바쁜 한심한 임금으로 그려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부러 이성계 일파의 눈에 나서 방심하게 하여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암군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몽주에게 "왕씨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과인은 바보가 될 것이오. 지키는 것은 그대가 하시오."라는 말을 남긴다. 물론 이성계에게 그 수를 간파당하지만,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공양왕에 대한 재평가를 반영한 모습. 그리고 실제로 그가 결코 허수아비 임금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심한 간언을 하는 윤소종을 하옥하는 것에서도 드러났다. 특히, 이성계가 낙마할 당시 아예 정몽주에게 살수를 보내 암살하자는 제안까지 하는 장면도 있다.[24]

하지만 정몽주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후 이성계 일파가 조정을 장악한 뒤에는 완전히 허수아비 임금으로 전락했고, 마지막 최후의 수단으로 이성계와 동맹을 맺기 위해 이성계 집 앞에 가지만, 그 자리에서 대비 안씨가 내린 폐위의 교지를 받고 끌려나간 뒤 유배되어 사사되었다는 나레이션을 끝으로 극에서 퇴장했다. 이때 공양왕이 남긴 마지막 말이 참으로 처량한데,

"결국은 이렇게 되고야 말았구나! 500년 왕씨의 사직이 이 왕요의 대에서 결단이 나다니. 내 이래서 왕이 되지 않으려고 하였거늘, 내 이 죄를 어찌 갚을 것인고. 죽어서 열성조들의 용안을 또 어찌 뵙는다는 말인가! 이놈의 팔자 한번 고약하지 않은가!"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이도엽이 분하였으며, 줄거리 상 즉위 이전 정창군 왕요였던 시절부터 등장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1. 망국의 왕이라 묘효가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망국의 왕인데다가 고려충렬왕 이후엔 몽골의 침입으로 원나라의 속국 취급을 받아 묘호를 받지 않았고 원의 치하를 벗어난 군주였던 공민왕 역시 묘호를 받지 않았다. 이는 조선 초기 묘호에 대한 논의에도 영향을 주어 묘호를 받지 못했던 공정왕(정종)이라던지 선대왕의 묘호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성종의 주장까지 이어진다.
  2. 망국의 왕이라 시호가 없었다. 그래서 공양군(恭讓君)으로 불리었다가 조선 태종대에 시호를 공양왕으로 받았다. 간성에 유배된 적이 있어 간성왕(杆城王)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3. 충선왕의 이복형 강양공의 3남 연덕부원대군의 외손자.
  4. 이러한 공양왕의 모습에 대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979년최 모씨와는 다르다며 은근히 까는(?)표현을 사용했다. 만화에서 등장하는 공양왕의 모습이 최 모씨와 판박이임까지 반영해 보면 확인 사살급.
  5. 이 동맹제의를 했던 시점이 폐위 일주일 전의 일이다.
  6. 지금의 함경도.
  7. 정확히는 책봉 전이므로 "권지고려국(왕)사"(즉, 왕의 직무대리) 명나라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그 이듬해 2월까지 7개월간 '고려'라는 국호를 계속 썼다.
  8. 섬 하나를 그들의 영토를 주겠다며 그들을 모두 배에 모았지만 이미 배 바닥에 구멍을 뚫어놓은 상태였고 당연히 배는 항해중 그대로 침몰하여 그 안에 타고있던 왕씨 일가는 모두 몰살되었다... 그리고 이 계획을 간파한 살아남은 몇몇 왕씨 일족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성씨를 바꾸고 살았다고 한다.
  9. 지금의 삼척시 원덕읍 동막리와 근덕면 궁촌리로 가는 고개. 이 '살해재'란 이름부터가, 공양왕이 여기서 살해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0. 참고로 사위인 우성범(禹成範)과 강회계(姜淮季)는 공양왕이 폐위되는 1392년 7월에 참수당했다.
  11. '식사동'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공양왕을 알아본 동네의 승려들이 먹을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밥골'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한자로 변해 '식사동'이 되었다고 한다. 전승에서는 공양왕이 '승려들이 정신을 차려 보니 곱게 죽어 있었다'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이 곳에서 조선측의 추격자들에게 피살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2. 관원들을 삼척, 강화, 거제도에 같은 날 동시에 보내 각 지역에 있던 왕씨들을 몰살시켰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3. 살아 있을 당시에 이렇게 불렸던 것이니 시호라기보다 왕자들에게 부여되는 군호처럼 존호(尊號)로서 부여된 것이다. 물론 사망 후에는 '공양왕'으로 추봉되기 전까지 그게 그대로 시호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어차피 존호도 시법에 따라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법상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남에게 그 자리를 넘긴 사람에게 주는 글자들로 구성된 '공양'군도 여기에 해당된다.
  14. 여담이지만 시호가 비슷한 공민왕도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여서 일을 망친 적이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15. 실제로도 이성계 입장에서는 설사 공양왕이 고분고분하게 나오더라도 폐위한 그를 살려두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자칫 살려두었다가는 남아있는 고려 충성파들의 구심점이 되어 고려부흥운동을 일으킬수 있는 빌미가 될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아들 이방원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뒤 고려 왕족들을 이미 거의 다 죽여놓고도 학살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16. 김유신과 신라 태종 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는 구형왕의 증손이다.
  17. 경순왕은 탐라 자견왕보다 한술 더 나아가서 이후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와 혼인했으며, 그의 백부의 딸은 왕건의 제4비인 신성왕후가 된다. 신성왕후의 손자가 고려 현종인데, 이후 고려의 왕은 공양왕까지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이다. 거기다 경주 김씨는 김부식 대에 이르러 고려의 주요 귀족 가문으로 부상하며, 조선 시대에도 왕비까지 배출한 주요 양반 가문 중 하나였다.
  18. 백제의 경우 마지막 임금이 풍왕이냐 의자왕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의 사학자 순암 안정복은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풍왕의자왕에 이은 백제의 왕으로 인정, 기록했으며, 아울러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 이후 3년에 걸친 백제 부흥운동사를 백제 역사로 포함시켰다.
  19. 하지만 사직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뒤 사망한 기록과 년도가 상세하게 적혀져 있는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과 달리 풍왕과 대인선은 백제와 발해가 망한 이후 당나라, 요나라로 압송되어 끌려갔지만 이후 어떻게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혀 없다.
  20. 참고로 후백제의 신검 같은 경우는 왕건이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는 역사의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끝까지 왕건에게 저항했던 신검이 좋은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사극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실제로 이 설을 채택해서 왕건이 신검에게 벼슬을 내렸다가 마음을 바꾸어 신검 형제에 대한 처형을 명령하는 내용으로 그렸다.
  21. 성우 김영선과는 동명이인이다. 성우 김영선은 <용의 눈물> 방송 당시 MBC 전속 신인성우였다. 다만 MBC 특기인 원로성우 정승현이 이 드라마에서 정몽주 역할로 나오기는 했다.
  22. 결국엔 이성계에게 자신의 목숨만이라도 보전해달라는 조건 하에 왕이 되겠다고 제안하지만, 이마저도 상큼하게 씹힌다.
  23. 야인시대곽영주, 대조영의 이문, 전우의 염하진, 광개토대왕의 고창, 징비록이덕형 등으로 열연했다. 참고로 그의 부친은 용의 눈물에서 목은 이색을 연기한 원로배우 남일우.
  24. 이 장면은 용의 눈물 초반 장면에서 완전히 뒤집한 신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는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를 참형에 처하라 했고, 공양왕은 다소 우유부단한 포지션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