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왕

1 고려의 33대 왕

"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32대 우왕 왕우33대 창왕 왕창34대 공양왕 왕요
묘호없음
시호없음[1]
사시윤왕
(允王)
왕(王)[2]
창(昌)[3]
배우자없음
아버지고려 우왕
어머니근비 이씨(謹妃 李氏)
생몰년도음력1380년 8월 7일 ~ 1389년 12월 14일
양력1380년 9월 6일 ~ 1389년 12월 31일 (만 9세 3개월)
재위기간음력1388년 6월 ~ 1389년 11월 무인일
양력1388년 ~ 1389년 (1년 5개월)

고려 제33대 왕. 우왕과 이인임의 친척이었던 근비 이씨 사이의 아들.

아버지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대권을 손에 넣은 이성계 암살 시도 등으로 폐위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사실 우왕이 폐위 된 이상 즉위 가능성은 없었으나,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조민수이색이 옹립한 것.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이미 이성계 일파에 의해 정국이 장악된 시대이니만큼 실권이라고는 없었던 허수아비 왕이었다.

창왕의 1년 치세 동안에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이것은 정도전 등을 위시한 신진 사대부들의 계획안이었고 그저 숨가쁘게 왕좌를 유지할 뿐이었다. 급기야 우왕의 복위 시도 이후, 우왕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신돈의 아들이라고 몰려 폐왕의 지위까지 빼앗겼고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므로 결국 창왕도 신돈의 손자라는 명분으로 폐위당하였다.[4] 따라서 시호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늘날 창왕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그냥 이름이 '창'이기 때문이다.

이 후에 강화도로 쫓겨났다가 강릉에 유배되있던 아버지 우왕과 함께 이성계 일파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 때 창왕의 나이는 만 9세, 한국나이로 10살[5]이였다. 고려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죽었고, 한국의 모든 군주들을 통틀어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은 왕이 되어 버렸다.[6] '소년 군주'하면 조선단종이 잘 알려졌지만 실은 이 창왕이야말로 진정한 비극의 소년 군주. 폐위된 후부터 신진사대부 일파에 의해 신돈의 손자란 의미에서 '신창(辛昌)'으로 불렸다. 이후 조선초기에 작성된 고려사동국통감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서적들에는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반역 열전에 올라갔다. 이는 조선개국의 명분인 폐가입진론[7], 우창비왕설[8]을 주장하기 위한 당연한 왜곡으로, 창왕의 본명이 왕창이 아닌 신창이라는 것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보통 사극에서는 사약으로 사사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칼에 목이 베어 죽었다.[9] 고려사 원문에도 우왕과 창왕의 죽음에 모두 誅(벨 주)자를 쓰고 있다. 안습.

무덤 기록이 전무하고 무덤 역시 발견되지 않았으며 반역자의 손자로 취급되었으니 제대로 무덤에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짧은 치세 동안 군사적으로는 제법 큰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박위쓰시마 섬 정벌. 이 원정에서 박위는 전함 1백 척을 인솔하여 쓰시마 섬을 원정, 무려 전함 3백척을 불태우고 개선했다. 훗날 세종대왕 때에 이루어진 쓰시마 원정이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의외의 고전이 있었던 반면에 이 원정의 전과는 대단했다.[10] 하지만 박위의 원정은 창왕의 치세에 있긴 했으나 창왕의 치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박위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을 이끈 인물이었고, 당시 창왕은 실권이 없었다. 박위는 창왕을 쫓아내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하여 조선이 개국공신이 되었고, 훗날 1차 왕자의 난 때 궁궐의 경비를 맡다가 살해당했다.

창왕 본인은 그 나이치고 상당히 똘똘하고 영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단종이나 영창대군과 달리 이 쪽은 이상하게 동정을 별로 못 받는다. 단종숙종대에 이르러, 영창대군인조반정을 통해 신원이 된데 비해서 창왕은 그런 거 없다. 왜냐하면 단종과 영창대군은 조선 시대 왕과 왕족인 것은 둘째치고, 문종의 후사를 이었다는 정통성은 있었던 반면 창왕은 이색, 조민수에 의해 옹립되었고, 신돈의 손자/가짜 왕씨라는 이유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을 뿐더러 고려 시대 왕이라서 고려를 멸한 조선 때 당연히 복권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시조 이성계를 위시로 한 역성혁명파가 완전히 승리하여 고려를 멸했고 조선의 건국은 표면적으로 신씨의 씨앗에게 장악되고 힘없는 왕씨 왕조를 대신한다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이 망한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조명 못 받는다.[11] 지못미 아마 그가 우왕의 자식인 이상 그가 살아날 가망이 없었고, 살아나도 고려는 국가 막장 테크를 고스란히 밟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최종 단계로.

사극에서는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데, 대표적으로 KBS 용의 눈물과 KBS 정도전이 있다. 물론 실제 인물의 당시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역배우들이 이 배역을 소화한다. 용의 눈물에서는 4회에 폐위되어 사사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죽음의 공포 앞에 떠는 어린 폐주의 입을 강제로 벌려 사약을 들이붓는 장면이 나온다.

정도전에서는 아역배우 김준성군이 이 배역을 맡았다. 왕자 시절에 첫 등장했을 때에는 이인임을 할아버지라 부르면서 어린 시절의 부왕처럼 이인임을 크게 믿고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회군 이후 부왕이 폐위되자 조민수와 이색 등에 의해 추대되어 즉위하기는 했지만 너무도 어린데다[12] 권신들의 편의에 맞춰 옹립된 왕인지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결국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팬들 사이에서도 창왕 역할을 맡은 아역배우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만 사이에서 눈치나 봐야 하는 역사 속의 어린 왕은 가여워하는 반응이 대다수. 결국 역사대로 폐가입진의 논리를 앞세운 정몽주[13]에 의해 폐위당한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쓰러지는 장면을 끝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등장은 하는데, 고려왕의 비중이 적은 작품이다 보니 몇 번 등장하지 않았다. 이색과 조민수의 의해 왕위에 옹립됐을 때 첫 등장, 이인겸을 복귀시키겠다고 선언해 이성계를 서늘하게 했다. 그 이후 등장은 정몽주의 보고를 받을 때, 다음에는 우왕의 주도하고 무명이 숟가락을 얹은 이성계 암살 계획의 책임으로 귀양을 가는 장면이다. 참고로 초반 빼고 나머지 등장한 두 장면 모두 대사없이 아이 특유의 서럽게 펑펑우는 장면만 나왔다. 이래저래 안습.

2 백제 위덕왕의 다른 명칭

백제의 위덕왕의 이름은 부여창(扶餘昌)인데, 당시 백제의 왕명 표기법이 이름 + 왕이어서 당대 백제 사리함에 창왕이라고 표기되어져 있다.[14]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 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백제 왕흥사 사리함
  1. 창왕은 후대에 붙여진 왕호로, 이름인 '창'에다 '왕'을 붙여서 창왕이라 부른다.
  2. 창왕이 왕씨 핏줄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는 것은 조선 건국세력의 주요 명분이었으므로, 조선 5백년 내내 '신창'으로 지칭되었다.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신창이라고 써 놨다. 조선이 망하고 창왕이 왕씨냐 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도 신辛씨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 하나, 이는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의 왜곡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두산백과위키백과에도 창왕의 본명을 왕창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는 선대 왕인 우왕 역시 마찬가지.
  3. 이 때문에 수창궁을 잠시 피휘하여 수창궁을 일시 수령궁(壽寧宮)으로 개칭하고 대비 이씨를 옮기었다.
  4. 우왕이야 실정을 명분으로 내쫒을 수 있었지만 겨우 9살, 왕이 된지 1년 남짓인 창왕은 그럴 수가 없으니 그냥 혈통 자체를 부정한 것 이다.
  5. 오늘날 나이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더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6. 반대로 한국의 모든 군주 중 가장 장수한 왕은 고구려태조대왕 혹은 장수왕이다.
  7. 가짜(왕)를 폐하고 진짜(왕)를 세운다.
  8. 우와 창은 왕씨가 아니다
  9. 아무래도 어린 소년이 참형을 당하는 묘사는 잔혹하기도 하거니와 창왕 또래의 자녀를 둔 시청자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큰지라...
  10. 다만 왜구의 준동을 완전히 막아버렸다는 역사적 의의를 보자면 세종 때의 원정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박위가 비록 저런 전과를 올렸지만 세종 초기까지도 왜구의 준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 그렇다고는 해도 고려 말에 비하자면 세종 때는 조선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일본도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가 안정되어 왜구가 많이 뜸해졌기에 고려 말과 조선 초를 단순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1. 다만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 등 여말선초를 다룬 드라마 등의 매체를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권신들의 꼭두각시로 이용된 후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버림받고 결국 죽임을 당한 창왕이 가엾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있다.
  12. 확실하게 생몰년도가 남아있는 왕들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창왕과 비슷하거나 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은 고구려 태조왕, 충목왕, 조선 헌종 정도의 몇몇 왕들밖에 없다. 그나마 이 왕들은 모후를 따르는 사람들의 세력 기반이라도 탄탄해서 어린 왕을 지켜줄 수 있었지만, 창왕은...
  13. 정몽주는 공양왕을 옹립한 흥국사 9공신 중 한 명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여 원래는 창왕의 선위를 도모했던 이성계 일파에게 근비와 정비의 부탁을 받고 이성계를 설득하러 간 정몽주가 폐가입진을 앞세워 창왕을 폐하고 정창군 왕요, 즉 공양왕을 옹립할 것을 건의해 방향을 바꾼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드라마 상으로 보면 정몽주만 믿었던 정비와 근비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셈이다. 그래서인지 극 중에서 결국 정몽주는 편전으로 군사를 몰고 들어가 어린 왕과 그의 모후를 끌어내린 뒤 홀로 텅 빈 편전에 털썩 주저앉아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괴로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14. 백제 무령왕의 경우에도 부여사마(扶餘斯麻)가 이름인데 무령왕릉에 있는 당대 금석문에 따르면 사마왕(斯麻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