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Third Battle of Kharkov

독소전쟁중 1943년 2월 19일부터 3월 14일까지 하리코프를 두고 벌어진 전투. 독일에서는 '도네츠 전역', 소련에서는 '돈바스-하르코프 작전'으로 부른다. 독일군 장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지휘아래 독일이 승리를 거두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붕괴위기에 처했던 독일의 동부전선이 안정화되었다.

1 당시 스탈린그라드 이외의 카프카스 지역의 전황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막바지에 이른 1942년 12월, 스탈린그라드를 한참 포위하고 있던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외곽의 독일군을 밀어붙였다. 소(小) 토성 작전의 후속 작전으로 이어진 이 공세는 스탈린그라드 밖의 돈 집단군과 A 집단군 외에도 중부집단군까지 목표로 한 대공세였다.

스탈린그라드 서쪽의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과 안드레이 예레멘코의 남부 전선군은 기병과 전차 전력을 증상시켜 제1, 2, 3 근위군과 제51군을 선봉으로 겨울폭풍 작전의 목표 달성 실패와 소토성 작전으로 지쳐있던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을 보로실로프그라드와 로스토프로 밀어붙였다. 여기서의 소련군의 공세 목표는 돈 집단군과 후퇴 중이던 독일 A 집단군의 연결을 끊어 놓는 데에 있었다.

당시 만슈타인은 아돌프 히틀러의 전략 예비대 투입 거부와 A 집단군 후방 엄호 필요가 맞물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히틀러는 돈 강 남안의 쿠반 반도에 집단군 급의 병력을 남겨 두기를 원했는데 이는 소련군이 카프카스 유전 지대에 대한 공세를 펼칠 경우 아조프 해의 유일한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새로운 위협에 신속히 후퇴하지 못했고 만슈타인은 A 집단군의 사활이 걸린 보급 요충지인 로스토프를 사수해야 했다. 로스토프 사수를 위해 홀리트 분견군과 급조된 프레터-피코 분견군[1]이 치르 강을 필사적으로 사수하려 했다.

하지만 두 분견군의 양측은 지나치게 공백이 넓었다. 북쪽 측면으로 제1,3 근위군, 제5 전차군과 제5 충격군이 압박을 가해 왔고, 남쪽으로는 제2 근위군, 제51군, 제28군이 12월 24일에 시작된 반격을 기점으로 몰려왔다.

두 분견군은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1월 3일까지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도네츠 강으로 밀려났다. 그 사이 소련 제51군의 제3 근위 기계화 군단으로 개칭된 제4 기계화 군단은 로스토프를 목표로 돈 강으로 나아갔다. 제4 기계화군단의 진격은 6호 전차 티거로 무장한 제503 중전차대대에 의해 간신히 저지되었다.

1월 7일에 지모프니키 일대에서 벌어진 503 중전차대대의 활약으로 18대의 T-34가 작전 불능이 되고 반면, 티거의 손실은 1월 9일에 2대, 10일에 2대에 불과했다. 한편 양 군 모두 러시아의 겨울날씨에 작전을 방해받았다. 1월 24일에 일어난 짧은 해빙 때문에 도로에 웅덩이가 형성되었는데 이 웅덩이가 26일의 강추위로 다시 결빙되는 바람에 기동이 지지부진해져 버렸고 여기에다 3일간 강풍을 동반한 폭설이 몰아닥쳤다.

만슈타인은 이 소강상태를 틈타서 제1 기갑군을 로스토프 북쪽으로 이동시켜 홀리트 분견군을 지원하려 하고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주장에 따라 1월 27일에 제1 기갑군 사령부 및 예하 군단 사령부들을 로스토프 북쪽으로 이동시키기로 걸정했다. 하지만 말이 기갑군 전체가 이동한 거지 실제 이동한 병력은 1개 기갑사단과 1개 보병사단, 2개 보안사단밖에 없었다. 나머지 부대는 일시적으로 제17군과 함께 쿠반 교두보에서 수세로 돌아섰다. 만슈타인 입장에서는 무척 실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로스토프 일대에서 공세가 계속되는 동안 필리프 골리코프의 보로네시 전선군은 1월 13일에서 27일 사이에 제40군, 제6군, 제3 전차군에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을 발동시켜 돈 강 상류를 따라가며 이탈리아 제8군의 잔여 병력을 일소하며 진격로를 열어놓았다. 1월 24일에는 브랸스크 전선군의 제13군이 보로네시 전선군 소속의 제38군, 제60군, 제40군과 합류하여 보로네시 돌출부와 돈 강 상류를 방어하던 독일 제2군의 3개 군단 중 2개 군단을 포위했다.

그 사이 시작된 소련군의 공세인 갈로프 작전과 즈베즈다 작전에서는 보로네시 전선군의 제40군, 제69군, 제3 전차군과 남서 전선군의 제6군, 제1 근위군, 제3 근위군이 마르키얀 포포프 기동 집단을 선봉으로 로스토프 북서쪽에서 쇄도해 왔다. 만슈타인은 에버하르트 폰 막켄젠의 제 1기갑군 병력을 더 끌어오고 헤르만 호트의 제4 기갑군 병력도 끌어와서 이 공세를 차단하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로스토프에 대한 압박을 풀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2 낙관주의에 빠진 소련군과 별 작전의 시작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의 항복을 받으면서 계속 몰아치던 소련군의 공세 목적은 독일 돈 집단군과 A 집단군을 섬멸하고 중부집단군까지 피해를 주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소련군이 당시 수행할 수 있는 작전의 능력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소련군의 회복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전사자 50만의 피해는 쉽게 복구될 수 있는것은 당연히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아직 1943년 초까지는 소련군의 역량이 크게 신장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서 독일군을 죄다 몰아내려는 대규모 공세를 벌이려 하고 있었는데 이는 딱 모스크바 공방전 직후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 때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독일군을 막아낸 것이 독일 국방군 전체를 이긴 것인 양 착각하고 전 전선에서의 반격을 명령했다. 제한적 축선에서 병력을 집중한 반격도 힘들 지경인데 전 전선에서 독일군에 대한 총반격을 개시하라는 건 누가 봐도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었지만 서기장 동무가 까라면 깔 수 밖에 없었다. 일명 '42년 동계 전역'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총반격은 재앙으로 끝났으며 이 때 입은 소련군의 손실은 독일군이 청색 작전을 수행하는 걸 더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승리는 스탈린을 다시 들뜨게 만들었고 결국 이와 같은 무리한 공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1년 가까운 그 끔찍한 혈전에서 붉은 군대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는 것은 소련군과 소련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고 균형추가 소련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는 걸 말해줬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 하나만으로 소련군이 다시 공세를 가하면 독일 국방군이 죄다 붕괴될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주의는 엄연히 착각이었다.

독일 제6군이 야전군급 제대 독일군 중에서 상당히 정예화된 군대 중 하나라 할지라도, 스탈린그라드에서 역포위당해 항복한 독일군은 기껏해야 1개 야전군 및 제4 기갑군과 이탈리아 제8군의 일부였다. 아직 소련군이 상대해야 할 독일군은 잔뜩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전투 하나에서 이긴 것 가지고 스탈린은 또 대책없는 낙관주의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소련군에게 더 심각한 것은 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를 비롯한 붉은 군대의 수뇌들과 바투틴을 비롯한 전방 사령관들마저도 이와 같은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42년 겨울에 스탈린이 위험천만한 공세를 펼치려 할 때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이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반대의 결과로 둘 다 좌천돼 버려서 스탈린의 뜻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1943년 겨울에는 이 둘 또한 남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죄다 몰아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과 스타브카(=소련군 최고사령부)가 오판을 깨닫건 말건 1943년 2월 2일에 공식적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종결된 이후, 마침내 소련군은 하르코프와 벨고로드, 쿠르스크에 대한 공격 작전인 '별 작전(Operation Star)'을 개시했다. 남서전선군의 선봉인 4개 전차군단과 2개 전차여단, 3개 소총병 군단, 2개 스키 여단으로 구성된 포포프 전차군이 2월 초 돈 강을 넘어 독일군 후방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1 근위전차군단과 제25 전차군단이 야전군 예비로서 포포프 전차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포포프 전차군은 2월 12일에는 크라스노아르메스카야에 도달했고 2월 15일에 남서전선군 사령관 바투틴은 새롭게 들어온 2개 전차 군단을 투입하여 파블로그라드를 관통하여 드네프르 강 상류에 있는 자포로제로 진격을 시도했다. 자포로제는 교통의 요충지로 로스토프로 향하는 철도와 도로에 교차점인데다가 돈 집단군과 제4 항공군의 사령부가 있는 엄청나게 중요한 도시였다.

골리코프의 보로네시 전선군은 1월에 일찍 작전을 개시했다. 골리코프는 모스칼렌코 중장의 제40군과 류발코 중장의 제3 전차군으로 하여금 벨고로드와 하르코프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게 했다. 모스칼렌코가 하르코프 남서쪽으로 파고들면서 헝가리 제7군과 이탈리아 알파니 군단을 강타했고 그 뒤로 제3 전차군이 쇄도해 왔다. 1월 28일에 제40군과 제3 전차군, 제69군은 독일 제3군과 제 3군단의 얇은 남쪽 측면을 뚫고 포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르코프 일대까지 소련군이 몰아닥치자, 이에 B 집단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남작후베르트 란츠 산악대장이 이끄는 란츠 분견군을 급조해 고작 4개 사단만이 소련군에 공격에 맞서고 있던 하르코프 북익을 틀어막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란츠 분견군만으로 4개 야전군 병력을 틀어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유일하게 믿어볼 만할 란츠 분견군의 카드는 LSS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으로 구성되어 막 하르코프에 사령부를 차린 파울 하우저SS 기갑군단 뿐이었다.

로스토프에서는 소련군 제2 근위군과 제28군이 접근하자 제4 기갑군과 홀리트 분견군이 2월 8일을 기해 로스토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2월 6일에 란츠에게 SS 기갑군단을 이용해 하르코프 북쪽으로 쇄도해오는 보로네시 전선군에게 반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남서전선군에 대해 역공을 가할 것을 명령했다. 란츠는 이 무리한 명령에 진짜 복종할 뻔했지만 하우저는 명령을 거부했고 란츠 또한 반격 계획을 철회하고 바익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바익스는 히틀러에게 하르코프를 포기할 것을 요청했지만 히틀러의 답변은 오로지 '현지 사수' 하나였다.

히틀러는 2월 13일에 B 집단군을 해체하고 돈 집단군과 합쳐서 남부집단군을 재창설하게 했다. 그리고 그 사령관에 만슈타인이 임명되었다.

3 만슈타인, 히틀러를 설득하다

한편 모스칼렌코의 제40군은 2월 9일에 벨고로드를 점령해 독일 제169사단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여 도네츠 강 도하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제69군은 독일의 정예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 사단을 맞아 진격이 지연됐지만 결국 2월 4일에 목표였던 볼첸스크에 도착해 하르코프를 남쪽에서 압박하기 시작했다.

벨고로드가 함락되자 란츠는 하르코프 동부의 독일군이 포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르코프 시 내로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명령에 따라 LSSAH와 다스 라이히, 제168사단은 하르코프로 철수했고 그로스 도이칠란트는 벨고로드와 하르코프를 잇는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2월 9일에 소련 제3 전차군와 제12 전차군단은 야음을 틈타 도네츠 강 도하에 성공하여 LSSAH의 방어선을 강타했다. 하지만 요제프 디트리히가 이끄는 LSSAH의 강력한 분전으로 제3 전차군의 진격속도가 둔화되고 말았다. 제3 전차군의 발목을 잡는데 성공한 LSSAH는 14일에 하르코프 시로 철수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와 168사단도 벨고로드에서 서서히 철군했으나,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철군 중 소련군의 공격을 받아 (벨고로드에서 축출당한) 169사단이 하르코프 북부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남서로 이동하는 동안 남부로 후퇴하고 말았다.

2월 13일 소련의 제4 전차군단은 방어선을 뚫고 하르코프 북쪽외곽에 방어라인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란츠는 이 기간동안 소련군에 대한 반격을 명령하고 하르코프의 방어선 정비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도록 했다. 하지만 2월 11일 LSSAH 사단과 1개의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 기갑척탄연대는 남동방에서 소련군에게 공격당해 3일동안 30마일의 진격을 허용하며 적의 공세를 거의 늦추지 못했다. 소련의 제 6기병군단이 그들의 우월한 험지기동능력을 이용하여 독일 전차들을 깨끗이 쓸어버렸다.

2월 15일 SS 부대들은 더 이상의 항전을 포기하고 하르코프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2월 14일, 6기병군단을 추격하던 그로스도이칠란트와 SS들은 벨고로드-하르코프의 철로를 따라 진격한 소련 제 40군의 맹렬한 공격에 직면했다. 2월 14일 소련의 제 183소총사단이 도시 북부교외에 도착했고, 곧 이어 2개의 사단이 추가로 도착했다. 40군의 잔여병력들은 하르코프 후방의 남서쪽으로 이동하였고, 동반한 제3 전차군은 하르코프 외곽에 도시로 진입가능한 6마일의 회랑을 개척했다. 이제 하르코프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독일군이 여전히 하르코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소련군은 결국 도심 진입에 성공했다. 이에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서쪽을, 다스 라이히는 북쪽을, 증강된 LSSAH 1개연대는 동쪽을, 320사단은 남동쪽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르코프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자 SS기갑군단장 하우저는 결단을 내렸다. 이건 미친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라며 더 이상의 무의미한 하르코프 수비를 계속 하지 않고 하르코프를 빠져나가겠다며 란츠에게 통보한 것이다.

뒤늦게 하우저의 탈출 요청을 받아들인 란츠는 기겁을 하며 SS 기갑군단의 탈출을 중지시켰다. SS 기갑군단은 결국 하르코프에 남았지만 2월 15일에 소련군이 도심으로 밀려들자 결국 후퇴를 용인했다. 북부 교외의 다스 라이히 사단이 우선 후퇴하자 소련군이 그 틈을 메웠고 다스 라이히 소속 기갑척탄병들은 소련군 제160소총사단과 제16전차군단을 맞서 분전했지만 소련군의 맹공을 막아내는데 실패했다. 마침내 2월 16일, 소련군은 하르코프를 탈환했다.

그리고 2월 14일에는 남부전선군 소속 제2 근위군과 제28군이 로스토프에 입성해 독일 제1기갑군의 잔존 병력과 시가전을 치르며 결국 로스토프를 탈환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로스토프에서 소련군을 막아서 시간을 버는데 성공한 클라이스트의 A 집단군은 1기갑군, 제17군을 포함해 무사히 후퇴하는데 성공했다.[2]

하우저의 탈출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엄청나게 분노했다. 히틀러는 란츠가 하우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며 란츠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캠프 분견군을 지휘하고 있던 베르너 켐프 대장을 임명했다. 이때 란츠 분견군도 켐프 분견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2월 17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조인트를 까러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 사령부가 있는 자포로제로 수송기를 타고 직접 날아갔다.[3]

하지만 히틀러가 아무리 열받아 있어도 현실은 현실이었고 히틀러는 되려 만슈타인의 브리핑을 듣자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상태가 아니었던 히틀러는 그냥 조용히 만슈타인의 상황 설명을 들으며 심각한 전황을 깨닫고 하우저를 처벌하고 현지사수 명령을 계속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2월 18일, 독일 제1 기갑군과 켐프 분견군 사이에 하리토노프 중장의 소련 제6군이 맹렬한 공세를 감행하여 마침내 두 야전군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다. 켐프 분견군의 남부를 돌파한 소련 제6군은 곧 SS 기갑군단의 배후인 크라스노그라드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고 쿠즈네초프 중장의 제1 근위군은 남쪽의 파블로그라드에서 철도망을 차단하는 전과를 거둔 것으로 모자라 선두의 전차들이 남부 집단군 사령부 동쪽 약 45km 지점까지 진출하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히틀러까지 소련군에게 잡혀버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히틀러는 엄청 열받아 만슈타인에게 고래고래 화를 냈지만, 화낸다고 해결된 상황이 아니었다. 그 때, 제40 기갑군단의 감청반이 어마어마한 대어를 낚아왔다. 다름아닌 소련군이 차랑 연료와 기타 보급이 고갈상태라며 지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감청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계속된 과도한 공세에서 비롯된 일로 이 시점의 소련군은 병참선이 지나치게 신장된 상태였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자신의 기동 방어 계획과 하르코프 역탈환 계획을 설명하며 히틀러를 설득했다. 히틀러는 당연히 탐탁치 않아 했지만, 만슈타인이 누구이던가? OKH의 모든 두뇌들이 끙끙거리며 마지노선 돌파 계획을 생각할 때 하인츠 구데리안과 떡 하니 낫질작전을 내놓아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를 6주만에 털어버린 장본인이자 바르바로사 작전 때는 제56 기갑군단을 이끌고 독일 북부집단군이 유일하게 작전 목표를 달성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여기에 크림 반도와 케르치 반도 공략을 입안하고 수행했으며 공자 입장에서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세바스토폴 공략도 예상보다 더 적은 피해를 입으며 완수한데다가 스탈린그라드에서는 5배가 넘는 소련군에 맞서 돈 전선군을 이끌고 150Km를 진격해 들어가 제6군을 거의 구출할 뻔한 무시무시한 굇수이자 본좌다. 개인감정 빼고 만슈타인의 전공만 따지고 봤을 때 히틀러는 결국 만슈타인을 믿을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만슈타인의 요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히틀러는 여기에 덤으로 전력이 약화된 7개 기갑, 기갑척탄병 사단을 남부집단군 휘하에 배치시켜 주었다.

그런데 2월 19일, 보급이 한계에 다달은데도 불구하고 제1 근위군과 제6군은 자포로제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만슈타인과 제4 항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상급대장[4]은 히틀러에게 즉시 자포로제를 빠져나갈 것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간발의 차이로 자포로제 비행장에서 전용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떠나는 데 성공했다. 그 동안에도 비행장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으니 정말 간발의 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 아깝다[5]

만슈타인은 남부집단군 소속인 호트의 제4 기갑군, 막켄젠의 제1 기갑군, 홀리트 분견군, 켐프 분견군, 하우저의 SS 기갑군단, 리히트호펜의 제4 항공군의 재정비를 속행했다. 그 결과 남부집단군은 1월에 하루 평균 350소티의 항공 지원을 받은 것과 반면에 이제는 1,000소티에 달하는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만슈타인의 반격 준비는 시시각각 갖춰지고 있었다.

4 소련군의 공세 확대

1월에 시작한 하르코프와 로스토프에 대한 공세가 성공적으로 돌아가는 듯 하자 스탈린과 스타브카의 기대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공세가 성과를 보이고 독일군 남부전선이 무너지는 듯해 보이자 스타브카는 별 작전의 본디 목표를 훨씬 거대하게 만들어 독일 중부집단군까지 확대하려 했다.

스탈린과 주코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나자 즉각 포위 작전에 동원된 병력들을 이동시켜 보다 북쪽에 위치한 새로운 목표로 보냈다.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가 지휘하는 돈 전선군 사령부와 예하 소총군 중에 제65군과 제21군이 새롭게 편성된 제2 전차군 및 제70군과 협력하여 보로네시-리브니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으며 돈 전선군은 중부 전선군으로 개칭되었다. 제16 항공군과 제2 근위기병군단도 이 지역으로 재배치되었다. 나머지 돈 전선군의 제24군, 제64군, 제66군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재편성에 들어갔고, 바투틴이나 로코소프스키의 명령에 따라 어디에라도 합류할 태세로 대비하고 있었다.

확대된 별 작전은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해 연속적으로 3개의 공세 작전을 펼치기로 되어 있었다.
-1단계로 2월 12일에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이 협격하여 오룔 돌출부의 독일군을 포위한다.
-2단계로 2월 17일에서 2월 25일 사이에 이들 2개 전선군이 새롭게 투입된 중부 전선군과 조우하여 브랸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일소하고, 데스나 강을 넘을 공고한 교두보를 확보한다.
-마지막 3단계로 25일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이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남쪽의 이웃 전선군과 협동하여 르제프-뱌지마 돌출부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섬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모든 공세들은 보로네시 전선군과 남서 전선군이 거둘 것으로 예상되는 성공과 일치되도록 시간을 잡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3월 중순에 드네프르 강 서쪽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세우는 것과 실제로 시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로코소프스키의 충격 집단은 부대 재편성에 불과 6일의 시간을 배당받았고, 전혀 새로운 지역으로 공세를 준비하는 데 5일의 추가적인 시간을 받았을 뿐이었다.

제2 전차군과 제2 근위기병군단은 이미 리브니 지역에 집결했지만, 제70군은 겨울의 러시아 도로를 200킬로미터 이상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제21군과 제65군은 스탈린그라드 지역으로부터 철도와 도로를 통한 힘든 이동을 감수해야만 했다. 초봄에 내리는 폭설이 이동을 방해했고 라스푸티차가 수시로 찾아왔다. 집결지에서 공격 예정지로 이동하는 도로는 이미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스탈린그라드로부터 북쪽으로는 오직 단선의 철도선 하나만 존재했고, 이미 작성한 시간 계획표는 허구임이 드러나 버렸다. 로코소프스키는 이 계획에 반대를 표시했지만 별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별별 애로사항 때문에 소련군은 2월 25일 이전에는 공세에 나설 수 없었고, 25일 당일이 되어서도 제2 전차군과 제65군은 철도 하차점에서 공격 집결지로 이동 중인 상황이었다.

로코소프스키는 2월 25일에 로딘의 제2 전차군과 바토프의 제65군을 선봉으로 내세워 공세에 착수했다. NKVD 요원으로만 구성된 정예 부대인 타라소프 중장의 제70군과 치스챠코프 중장의 제21군이 도착 즉시 공격에 가담했으나 전력이 완전히 집결하지는 못했다. 양측 야전군은 진흙탕으로 변한 도로에서 교통 체증에 시달리며 행군 중이었다.

그 사이 2월 22일에 브랸스크 전선군의 제13군과 제48군이 독일 제2 기갑군의 우익을 강타했고, 바그랴먄 중장 휘하의 제16군이 지즈라 북쪽에서 독일 제2 기갑군의 다른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씨와 독일군의 교묘한 방어로 바그라먄의 진격은 방해를 받았다. 2월 24일까지 서부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의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중부전선군의 상황은 이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제13군의 우측면 엄호하의 바토프의 제65군은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독일군 후방까지 돌파해 들어갔다. 로딘의 제2 전차군과 기병-소총병 집단은 세프스크를 통과하여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를 향해 빠르게 서진을 계속했다.

3월 1일까지 로코소프스키는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북쪽으로는 독일 제2 기갑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남쪽으로는 독일 제2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이때까지 제79군은 전방으로 추진하여 바토프의 우익에서 전열에 합류했으며, 독일군 후방 깊숙한 오룔과 브랸스크로의 진격을 노리고 있었다. 3월 7일까지 크류코프의 기병-소총병 집단은 로브고로드-세베르스키의 외곽에 도달했고, 독소전 전체의 동계 전역을 통틀어 붉은 군대 최고의 진격을 달성하게 되었다. 표면상으로 볼 때 소련군은 상당한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소련군 그 누구도 자신들이 이미 만슈타인의 낚시바늘에 낚였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4.1 역관광-포포프 전차군의 괴멸

만슈타인을 비롯한 남부집단군의 독일군 수뇌들은 애시당초 소련군의 공세를 전면에서 직접 막을 생각이 없었다. 되려 독일군은 소련군의 공세가 공세종말점까지 다다라서 더 이상의 돌파력을 발휘하기 힘들게 만들어 진격을 돈좌시키고 병참과 보급선을 신장시키며 소련군의 양 날개가 깊숙히 진격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소련군의 출혈을 일으키면서 수행하는 기술적인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즉, 만슈타인은 제40 기갑군단의 감청 정보에 기반해 소련군의 공세종말점을 예측하여 전형적인 '기동 방어'(Mobile Defence)를 통해 소련군을 괴멸시킬 계획을 세운 것이다. 소련군은 진격목표 달성이라는 달콤한 미끼에 걸려들어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밀려 패퇴하는 줄로 착각하고 조금씩 함정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포포프 기갑군을 중심으로 한 남서전선군의 병력들은 크라스노아르메이스카야를 넘어 드네프르 강 북안까지 진격하며 계속된 출혈과 늘어진 병참선으로 인해 진격속도가 저하되고 있었다. 중부전선군 또한 이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오룔을 향해 뚫은 로코소프스키의 돌파구는 적진 깊숙한 진격으로 인해 양익이 허술해지게 되었고 그 옆으로 다른 전선에서 증원온 독일군 병력들이 집결하고 있어서 자칫하다가는 돌파구의 퇴로가 막혀버려 포위당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로코소프스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직 스탈린그라드에서 재편성 중이던 제21군, 62군, 64군을 끌어올려 했지만 이들은 이동 중이어서 투입이 불가능했다. 한편 라스푸티차로 인해 후속병력들의 공세 집결이 늦어지자 로코소프스키의 진격은 한계에 달하여 결국 목표인 오룔의 남서쪽에서 치열한 저항에 부딪히자 진격을 멈추어 버렸다. 로코소프스키는 이제 로딘의 제2 전차군을 브랸스크에서 오룔로 옮겨왔지만 되려 이건 중부전선군의 좌익과 중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곧이어 독일 제2군의 여러 사단들이 집결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소련군의 공세가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만슈타인은, 드디어 벼르고 별려왔던 반격을 시작했다.

제1 목표는 만슈타인의 사령부가 있는 자포로제를 줄기차게 위협하고 남부집단군 후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소련군의 전략기동군(OMG) 역할을 하고 있던 포포프 전차군과 포포프 전차군의 후속으로 들어온 제1 근위군과 제6군 이었다. 포포프 전차군은 힘든 진격 끝에 파블로그라드에서 진격이 잠시 돈좌된 상태인데다가 무리한 진격과 보급선의 예하 가동 가능한 전차 전력이 군단급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만슈타인은 포포프 기갑군을 일거에 포위해버리기 위해 막켄젠의 제1기갑군 예하 제40 기갑군단은 북서쪽과 북동쪽으로, 하우저의 SS 기갑군단은 동쪽으로, 호트의 제4기갑군 예하 제48 기갑군단은 북쪽으로 진격시켜 파블로그라드 일대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2월 20일에 다스 라이히 사단이 파블로그라드 시내에 돌입해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22일에는 소련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막켄젠의 제1 기갑군은 북동쪽과 북서쪽의 사단들을 넓게 전개시켜 포포프 기갑군 및 제6군의 포위망을 넓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태를 인지하지 못한 포포프는 "우리 군은 퇴각하는 독일군의 진로를 차단 중."이란 전문을 모스크바에 보내고 있었다. 막켄젠은 이 전문을 감청하며 낄낄 웃었다.

결국 2월 23일에 이르러서야 포포프는 함정에 빠졌다는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전선에 합류한 토텐코프 사단은 북동쪽에서 포포프 전차군에 대한 압박을 시작했고 동쪽에서는 호트의 제4 기갑군 소속 제48 기갑군단이 파블로그라드 동쪽에서 제1 근위군을 강타했다. 남쪽에서는 마찬가지로 제4 기갑군 소속인 제40 기갑군단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만슈타인의 포위가 성공한 것이다.

기갑부대의 맹진으로 포포프 전차군과 제1 근위군, 제6군에 대한 포위가 성공하자 2월 24일 만슈타인은 포위망 안에 갇힌 소련군에 대한 공격 암호 "봄이 왔다. 봄이 왔다."를 발령했다. 명령을 받은 호트와 막켄젠은 포포프 전차군과 제1 근위군을 떡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전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포위당한 소련군은 혼비백산하며 사방에서 몰려오는 독일군의 공세에 무너져 갔고 그리하여 제6군, 제1 근위군, 포포프 전차군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북쪽의 포위망이 비교적 약해서 살아남은 소련군이 적잖이 탈출해서 포로를 9천명밖에 잡지 못했지만 만슈타인이 구사한 한번의 역관광으로 순식간에 3개 야전군이 사라져 버리고 소련군 남부전선에는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구멍이 뚫려버렸다.

그리고 3월, 만슈타인은, 하르코프에 대한 진격을 속개했다.

5 하르코프 재점령과 하르코프 전역의 종결

삽시간에 일어난 역관광으로 소련 포포프 기갑군, 제1 근위군, 제6군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도상에서 지워지자 자포로제에서 하르코프에 이르기까지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버렸고 스탈린과 스타브카는 이 엄청난 재앙에 경악했다. 게다가 다른 야전군들이 독일 중부집단군 공략에 투입되느라 정작 하르코프에는 제25 근위소총병 사단과 기타 제대 몇 개 이외에는 다른 수비병력이 없어져 버려 사실상 하르코프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 바투틴은 중부집단군 공략에 참여하고 있던 류발코가 이끄는 제3 전차군을 하르코프에 투입하지만 제3 전차군의 진격로 정면으로 하르코프로 진격하던 하우저의 SS 기갑군단이 가로막았고 측면으로는 호트의 제4 기갑군 소속 제6, 17 기갑사단이 밀고들어왔다. 여기에 덤으로 아직 전력이 온전한 켐프의 켐프 분견군까지 가세하자 제3 전차군은 하르코프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개발살이 나고 말았다.

유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은 하르코프로 곧장 들이치지 않고 제1 기갑군을 하르코프의 북서쪽으로, 제4 기갑군은 북동쪽으로 이동시켜 하르코프 포위를 완성했다. 그리하여 제1 기갑군은 도네츠 강 남안에, 제4 기갑군의 선봉은 하르코프 남쪽에서 약 16킬로미터 밖에 있는 모슈 강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3월 5일,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보고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흡족해하던 히틀러는 3월 7일에 즉시 하르코프를 재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하필 그때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는 바람에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때문에 히틀러가 원하는 대로 하르코프를 재빨리 점령할 것은 힘들어 보였지만 하늘이 독일 편이었는지 난데없이 강추위가 시작돼서 라스푸티차로 진흙탕이 됐던 도로들이 죄다 얼어붙어 버렸다.

땅이 얼어붙어 기동이 원활해지자 만슈타인은 호트와 상의 끝에 하르코프를 스탈린그라드의 재탕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SS 기갑군단이 모슈 강을 도하해 켐프 분견군과 합세하여 하르코프를 물샐틈 없이 포위하고 조금씩 포위망을 좁히기로 결정했다.

SS 기갑군단은 명령을 받고 모슈 강을 도하, 3월 9일에는 하르코프 시 외곽에 다다랐다. 하우저는 공격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던 데다가 히틀러가 상황이 괜찮으면 하르코프 시를 점령해 나가도 좋다고 하자 LSSAH 사단을 선봉으로 하르코프 시 공략을 시작했다.

LSSAH 예하 제1 SS기갑척탄병 연대는 제1 SS기갑연대의 전차와 돌격포 지원을 받아 연대장인 프리츠 비트 대령이 지휘하는 '프리츠 비트 전투단'으로 개편되었고 하르코프 북쪽 방향에서 소련군의 방어망을 분쇄해 나갔다.

쿠르트 마이어 소령이 지휘하던 LSSAH 직할 기갑수색대대는 과감하게도 하르코프 시의 중심지인 붉은 광장으로 빠르게 진격해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소련군과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마이어의 과감한 공격이 소련군에게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제2 SS 기갑척탄병 연대 제3대대장인 요하임 파이퍼[6] 소령이 단 2대의 하프트랙을 '파이퍼 전투단'로 편성해 마이어의 기갑수색대대 구출에 나섰다.

소련군의 공격이 파이퍼 전투단으로 집중되어 파이퍼가 직접 MP40을 잡고 교전해야 할 정도의 위기를 맞지만, 전투단은 결국 붉은 광장에 도달해 제1 SS기갑수색대를 지원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제2 SS 기갑척탄병 연대 1대대가 증원되면서 SS는 붉은 광장을 거점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시내의 소련군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붉은 광장은 LSSAH 기갑수색대대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라이프슈탄다르테'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소련군 최후의 거점인 하르코프 트랙터 공장이 점령되면서 하르코프 시가전은 3월 14일에 종지부를 찍었다. 탈출하던 소련군은 다스 라이히와 토텐코프가 친 포위망에 걸려 섬멸되었다. LSSAH는 벨고로드로의 진격을 속개하여, 벨고로드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한편 독일 남부집단군이 하르코프와 벨고로드를 재점령하고 북상을 해서 로코소프스키의 측면을 압박하려는 움직이려 하자 스타브카는 제62군과 제64군을 어떻게든 로코소프스키에게 보내 하르코프 북쪽에서 전선을 회복하려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도 상관없이 스타브카는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갈 예정이었다.

3월 7일에 로코소프스키는 공세를 축소하되, 북쪽의 오룔을 목표로 한 공세는 지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코소프스키는 겨우겨우 제21군을 전선에 합류시키고 오룔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려 했지만 독일 제2군은 같은 날에 제4 기갑사단과 헝가리군 부대들을 집결시켜 로코소프스키의 서쪽 측면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크류코프의 제2 근위기병군단은 계속된 진격에 지쳐있는 데다가 너무 넓게 펼쳐져 있어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결국 스타브카는 중부에서의 모든 공세를 중단할 것을 결정하고 로코소프스키에게 더 이상 공세를 하지 말고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소련군의 무리한 1943년 동계 공세는 만슈타인의 계략에 말려들어 막을 내렸다.

6 평가와 결과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승리는 급격하게 소련측으로 기운 독소전쟁의 균형추를 어느 정도 독일측으로 돌려놓았다.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로 기고만장해 있던 붉은 군대는 52개 사단을 날려버리며 큰 충격을 받았고 독일군은 급한 불을 껐다.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대패로 심대한 타격을 입은 독일군은 만슈타인의 대승으로 한숨 크게 돌릴 수 있었고 이후 벌어진 해빙기 덕분에 급한 불은 껐다. 당분간 소련군의 공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동부전선은 크게 안정되었다. 반면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와 르제프에서 입은 인적 손실에 하르코프의 대패까지 겹쳤지만, 독일군과 소련군은 모두 이후 몇개월간은 공세를 펼 수 없었다. 양군 모두 스탈린그라드에서 너무 손실이 컸고, 소련군은 만슈타인에게 관광당했지만 다른 이런저런 이유 및 해빙기의 나쁜 도로사정 때문에 전선에는 소강상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승리는 소련이 독일 중부집단군까지 쉴 틈 없이 몰아붙일려던 야심차기 짝이 없던 작전 자체를 좌절시켜버리고 말았다. 물론 중부집단군을 향한 로코소프스키의 공세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위협적인 공세 중 하나였다는 점을 보아 만슈타인의 대활약은 남부집단군과 물론이고 중부집단군도 온전하게 만들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군다나 이 전투 직전에 클라이스트는 A집단군을 무사히 후퇴시키는데 성공해서 남부전선에서 소련군은 더 이상 스탈린그라드에서 얻은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남부집단군의 병력들은 대다수가 겨울폭풍 작전 와중에 많이 지치거나 스탈린그라드에서 힘을 많이 소진한 병력들이었다. 이런 비교적 약체의 병력으로 그런 엄청난 전과를 이뤄낸 만슈타인의 승리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로서 만슈타인은 이전의 전투들과 더불어 희대의 본좌이자 명장으로 찬양받게 되는 기록을 남겼다.

만슈타인의 눈부신 재능에 힘입어 독일군이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이 승리가 만슈타인빠들이 주장하듯이 독소전쟁의 균형추를 다시 평형으로 바꾼 것은 아니며, 실제 역사에서도 소련군은 이 패배와 상관없이 베를린으로 진격했다.[7] 사실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략적 처지는 하르코프 전투 이전에 비해 그다지 바뀐 것이 없었다. 일단 독일군이 소련군의 50여개 사단을 섬멸시켰다고 하지만 당시 소련군의 사단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여파로 소모가 극심하여 이미 하르코프에 도달하기 전에 각 사단의 정원이 3000명 이하로 내려갔고, 그리하여 병력손실은 8만여명에 불과(...)했다(독일측 손실은 만여명). 이정도면 독일의 3배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 소련측으로서는 "견딜만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독일군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수십만명의 병력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더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동안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섬멸되었고, 서부의 영미군의 압박도 이제 점점 가시화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으로서는 점점 불리해질 뿐이었다. 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이쯤해서 전략적 후퇴를 하기를 바랬고, 무솔리니같은 경우는 히틀러에게 그쯤해서 스탈린과 강화하기를 바랬으나,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고 이어지는 여름에 쿠르스크에서 선빵을 날렸다가 그만... 이후 결과는 쿠르스크 전투 참조.

한편, 소련군은 독일군이 아직 얕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며 더 이상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에 정진했다. 특히 소모의 한계를 넘어선 공세는 역공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으며, 이후에 쿠르스크 전투바그라티온 작전에서는 전력이 소진되기 전에 진격을 정지시키고 재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소련군은 1개 전선군이 재편성할 동안 다른 전선군이 공세에 나섰다가 정지하고, 재편성을 마친 다른 전선군이 다시 공세에 나서는 식으로 피스톤과 같이 각 전선군이 공세에 나서는 전법을 완성시켰다. 독일군은 예비군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전법에 크게 당했다.

어쨌든 이 전투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마지막으로 거둔 대규모 승리이다.

만슈타인이 하르코프와 벨고로드를 재점령함에 따라, 소련군 쪽에서 한 지역이 전선에서 돌출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쿠르스크였다. 이 쿠르스크를 둘러싼 대 전투는 쿠르스크 전투 항목을 참고.

7 여담

독일군은 하르코프를 재점령한 후, 미처 후퇴하지 못한 소련군 병원의 부상병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기에 책임이 있는 독일군 지휘관 세명은 훗날 소련의 군사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알파캣이 그리는 월드 오브 탱크 의 역사웹툰에선 이 전투를 다루며 명장 만슈타인의 대승이라고 평하였다.

[1]
크롬이나 파이어 폭스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8 같이보기

  1. 분견군은 독일군의 편제로 군단과 야전군의 중간급 제대로서, 군단과 사령부가 확대되어 다른 이웃 군단글까지 지휘할 때 편제되는 임시 편제다. 대개 지휘관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 클라이스트는 그 공으로 원수로 승진했는데 후퇴에 노이로제를 보이던 히틀러가 후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며 그 공을 치하하고 승진시킨 드문 예였다.
  3. 실제 히틀러는 만슈타인을 해임해 버리고 자신이 직접 남부집단군을 지휘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그랬다면 세계 평화가 더 빨리 왔을 텐데
  4. 그 유명한 붉은 남작과는 사촌간이다.
  5.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가 떠나자마자 만슈타인은 히틀러 뒷담을 잔뜩 깠다고 한다.
  6. 아르덴 대공세의 그 파이퍼 전투단 사령관 요하임 파이퍼다.
  7. 유명한 전쟁사가인 데이비드 글랜츠나 앤서니 비버 모두 이 전투는 독일의 전략적-전술적 대승이긴 하지만 일시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말하자면 독일군이 승리한 1944년의 마켓 가든 작전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파멸의 시간을 잠시 늦췄을 뿐이라고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