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 Белорусская операция, Белорусская настунательая операция «Багратион»
독일어 : Operation Bagration
바그라티온 작전 | ||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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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44년 6월 22일 ~ 1944년 8월 19일 | ||
장소 | ||
소비에트 연방, 벨로루시, 헝가리, 발트 3국,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 ||
교전국 | 소비에트 연방 폴란드 동부군 |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 |
지휘관 |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이반 코네프[1] 콘스탄틴 로코솝스키[2] 게오르기 자하로프[3] 이반 체르냐홉스키[4] 이반 바그라먄[5] | 발터 모델[6] 발터 바이스[7] 쿠르트 폰 티펠스키르치[8] 니콜라우스 폰 보어만[9]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10] |
결과 | ||
소련군의 승리 | ||
영향 | ||
독일 중부집단군의 궤멸 | ||
병력 | ◆칼 하인츠 프리저[11]의 추측 총 병력 230만 명[12] 전차 2,715대 돌격포 1,355대 포 24,363문 항공기 5,327기 ◆데이비드 글랜츠의 추측 총 병력 167만 명 전차 5,818대 포 3만 2천여 문 항공기 7,790기 | 총 병력 103만여 명[13] 전차 800대 돌격포 530대 포 2,589문 항공기 602기 |
피해규모 | 총 피해 77만 명 전사/실종 18만 명 부상/질병 59만 명 전차/돌격포 2,957대 손실 포 2,447문 손실 항공기 822기 격추 | 총 피해 60만 명 전사/실종 25만 명 포로 15만 명 부상 20만 명 전차/돌격포 1천여 대 손실 중포/항공기 1,700대 손실 |
1 개요
소련군이 1944년 6월에 가한 대공세. 나치 독일에게 사형을 집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 작전이었다.[14] 작전 지도를 보면 형세가 딱 바르바로사 작전의 복수로 받아들여지는데, 의미심장하게도 소련은 뒤통수를 맞은 1941년 6월 22일로부터 정확히 3년만에 인민의 역습을 단행, 침략자들을 응징하였다.
2 배경
소련은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 국방군이 점령했던 지역들을 해방하고 있었다. 쿠르스크 공세 이후 900일 가까이 굶어 죽어가던 레닌그라드가 해방되었고 이후 북부와 남부 전선 쪽으로 공세가 계속되었다. 북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에 밀려 퇴각을 계속했고 이 와중에 남아 있는 건 이른바 "벨라루스 발코니"라고 명명된 돌출부에서 버티고 있는 중부집단군뿐이었다. 참고로 벨라루스 발코니는 위의 지도에서 보라색으로 표시된 지역이다.
한편 독일군도 소련이 벨라루스 돌출부를 절단하면 대다수의 병력이 고립될 것을 염려했다. 또한 벨라루스 지역 대부분이 늪지와 숲으로 덮힌 곳이 많고 전차가 지나갈 길목이 몇 군데 되지 않는 걸 이용해 도시들과 길목에 요새를 세워 만일의 공격에 대비해 두고 있었다.
3 소련군의 작전 입안과 공세 준비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세를 펼치고 있던 1944년 3월부터 소련군은 다음 공세의 기회를 찾기 위해 각 지역을 점검하였고 점검 끝에 벨라루스에 버티고 있던 독일 중부집단군을 정면으로 공격해 소멸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이 나온 이유는 다른 방면으로 주공을 돌릴 경우 벨라루스에 있는 독일의 중부집단군이 측면을 칠 우려가 있는 데다가, 해당 돌출부를 감시할 만한 병력을 떼어놓아야 하므로 비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벨라루스에 대한 공세가 성공하면 아직 멀쩡한 독일군의 야전군 몇 개를 제거할 수 있고, 북부집단군의 보급로와 퇴각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 영토를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었고, 폴란드에 소련군이 진주하여 베를린을 노려 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벨라루스에서의 성공은 다른 전략적 공격 축선에서의 추가적인 공격을 펼치는 데 필요 조건이 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의 제정 러시아군 장군이었던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이 공세는 1944년 여름에 시작할 5개의 공세인 카렐리야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루블린-브레스트 작전, 야시-키시테프 작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전이 될 것이었다. 계획의 전모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부참모장 알렉세이 안토노프만 알고 있었다. 보급과 작전 단계의 어려움 때문에 5개의 작전은 북에서 남으로 시차를 두고 진행될 것이었다.
마지막 전략 계획이 고안되기 전에 스타브카는 야전 조직과 그 사령관들을 교체했다. 규모가 큰 서부 전선군은 관리가 수월하도록 제2 벨라루스전선군과 제3 벨라루스전선군으로 나누어졌고, 다른 전선군들도 개칭되거나 담당 지역이 조금씩 바뀌었다. 공세가 개시될 프리퍄티 습지 북쪽에는 카렐레야전선군, 레닌그라드전선군, 제1, 2, 3 발트전선군, 제1, 2, 3 벨라루스전선군이 배치되었다. 프리퍄티 습지 남쪽에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이 배치되어 추후 공세에 가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제1 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을 맡고 있던 주코프의 후임으로 이반 코네프가 임명되었다.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스타브카 대리로 전선에 파견되어 주코프는 제1벨라루스전선군과 제2벨라루스전선군의 조율을 맡고, 바실레프스키는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라루스전선군의 조율을 맡았다.
한편 전선군 사령관들은 배치된 77개 사단과 5개 전차군단, 총 100만의 군대로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에 대해 확실한 전력 우위를 점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소련 전선군들에는 5개 야전군과 2개 전차군, 1개 폴란드 야전군, 11개 전차군단 등 총 40만 명이 증강되었다.
스탈린은 작전의 구체적 사안을 마련하기 위해 5월 22일에서 23일까지 독일 중부집단군과 대치중인 대부분의 지휘관들을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작전 회의에 불러들었다.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중부집단군의 대부분을 민스크 동쪽에서 포위 섬멸하고 이 작전과 함께 이반 홉하네스 바그라먄의 제1발트전선군과 이반 체르냐홉스키의 제3벨라루스전선군이 비테프스크의 독일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이 나왔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2개 전차 군단을 이끌고 프리퍄티 습지 바로 북쪽, 보브루이스크 주변에 배치된 독일군에 대해 이중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겠다는 방안을 제출했다. 복잡한 기동 작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스탈린은 보브루이스크 작전에 심하게 반대했지만 로코솝스키는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
회의 끝에 마침내 바그라티온 작전의 최종적인 윤곽이 나왔다. 공세는 벨라루스 발코니의 독일군 진지의 남익과 북익에서 야전군 규모의 기동 집단이 각각 전술적 포위진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1발트전선군과 제3벨라루스전선군이 협조, 스몰렌스크 북서의 비테프스크를 포위하고, 제1벨라루스전선군은 보브루이스크를 포위한다. 동시에 북쪽에서는 제3벨라루스전선군과 협조한 제5근위전차군과 1개 기병-기계화 집단이 민스크를 향한 종심 깊은 포위전을 실지한다, 제1발트전선군은 북익을 보호하기 위해 드비나 강 서안을 따라 동프로이센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한다. 제1벨라루스전선군 좌익에서는 추후, 프리퍄티 습지 남쪽에서 코벨 지역으로부터 비스와 강을 향해 제2전차군이 공세를 시작한다. 공세 날짜는 잠정적으로 6월 15일에서 20일로 결정되었다.
스타브카는 바그라티온 작전의 기본 지침을 5월 31일에 하달하였다. 작전 계획에 따라 대군의 보급품을 옮기고 전선군을 따라 수많은 부대들이 기밀을 유지하며 전략적으로 이동했다. 남부 전선에서 주공이 있을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무에 모든 일은 극도의 기밀 유지 하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다 보니 결국 원안대로 시간을 맞추는 건 어려워졌고 작전 날짜는 갈수록 연기되었다. 계속 작전이 연기되자 스탈린은 아예 공세 날짜를 바르바로사 작전이 6월 22일에 벌어진 것을 복수하는 의미로 6월 22일로 정했다.
4 양 군의 상황
4.1 독일군의 상황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군의 동부전선 병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병력은 서부전선의 적을 막기 위해 차출되었으며 특히 루프트바페는 연합군의 폭격에 대응하기 위해 서부전선으로 전력이 집중되기 시작해 독일 동부전선군 휘하의 전투기는 4,000여 대에 불과했던 반면 소련군은 7,000여 대의 전투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는 동부전선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원수를 경질시켰다. 클라이스트 원수가 경질되면서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은 남우크라이나집단군으로 개칭되었고 신임 사령관으로 히틀러의 신임이 두터운 페르디난트 쇠르너가 임명되었다. 쇠르너는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전임자인 클라이스트에 비해서 역량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독일군이 벨라루스 발코니에서 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독일군은 소련군의 하계 공세가 우크라이나에서 남부 폴란드와 발칸 반도로 진격하여 다른 추축국들을 전쟁에서 떼어 놓는 것이라고 오판하고 있었다. 이게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게, 동유럽 추축국들이 독일을 배신하고 떨어져 나가는 정치적 타격은 무시하더라도 독일의 생명줄인 루마니아의 플로예슈티 유전지대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의 주력 기갑 장비들은 당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프랑스와 북우크라이나 일대에 주로 배치되어 중부집단군은 보병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에른스트 부슈 원수가 이끄는 독일 중부집단군의 전력은 34개 보병사단, 2개의 공군 야전사단, 7개 보안사단, 2개의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구성되었고 펠트헤른할레 기갑 척탄병 사단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주요 전력들은 방어 거점이 아닌 행정 거점에 배치되어 있었고 각 보병사단과의 간격은 기준의 배인 24Km~30Km인 상태였다. 그리 밀집되지 못했던 독일군은 예비대도 없이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야 할 상황이었고 예비는 3개 사단이 전부였는데 그 중 제20 기갑사단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였다. 또한 장비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3기갑군은 이름만 '기갑'이지 편제상 기갑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방어할 벨라루스 돌출부의 경우 남쪽의 대습지와 동쪽에 흐르는 몇 개의 강을 제외하면 전혀 방어할 지형이 없는 곳이며, 여기에 있는 도시들도 지하실이 없고 목조 가옥이 많은 등 요새화하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게다가 간신히 참호선을 마련한 제1선이 돌파되면 더 이상 제대로 된 방어선을 건립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족한 병력과 낡고 수량이 적은 장비만으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면...
4.2 소련군의 상황
독일군이 이렇게 빈약한 데 비해 소련군의 공세 준비는 어마어마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에 참여하는 4개 전선군은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의 좌익을 제외하고 14개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4개 항공군, 118개 소총병 사단과 2개 소총병여단, 2개 기병군단, 8개 기계화 또는 전차군단, 수십 개의 포병 제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병력은 125만 4,300명이었고 전차와 자주포 4,070대, 야포 2만 4,363문, 항공기 5,327대로 장비했을 뿐 아니라 추가로 항공기 1,007대가 더 있었다.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좌익은 41만 6,000명의 병사와 1,748대의 전차와 자주포, 8,335문의 야포와 박격포, 1,456대의 항공기가 5개의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1개 항공군, 36개 소총병사단, 2개 기병군단, 4개 전차 또는 기계화군단으로 이루어졌다.
5 기만 작전
소련은 벨라루스 돌출부를 공격한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돌출부는 놔두고 돌출부 남부나 북부에 대한 공격을 한다고 독일군을 속이기 위해 대대적인 기만 작전을 펼쳤다.
레오니드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전선군과 키릴 메레츠코프의 카렐리야전선군은 핀란드를 공격하는 '카렐리야 작전'을 시작하여 하계 공세의 막을 열었다. 카렐리야 작전은 하계 공세의 첫 단계로 핀란드를 전열에서 이탈시키고 독일군이 중부집단군에 대한 소련군의 공세 준비를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핀란드의 이탈로 독일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겨울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소련군은 별다른 고전 없이 핀란드를 잘 상대했고 그 공으로 메레츠코프와 고보로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남부에서는 가짜 사단을 편성해 남부로 공세를 펼친다는 내용의 거짓 무전을 계속 보내 독일군을 기만했다. 남부전선의 제2, 3 우크라이나전선군은 5월까지도 병력을 집중시킨 것처럼 위장하고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연출시켜 독일은 공세가 정면으로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 믿게 되었다. 게다가 작전 계획이 연기되면서 독일은 정확한 공세일도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결국 독일군은 돌출부의 남쪽과 북쪽에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될 것으로 오판했으며, 당분간 벨라루스 돌출부 자체에는 별 일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덕분에 독일 육군 총사령부는 중부집단군 소속의 제56기갑군단을 북우크라이나집단군에게 넘겨 버렸다.
6 공세 시작
소련군은 6월 22일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6월 21일 밤부터 독일군 후방 지역에 소련 공군이 폭격을 시작했고 소련군 스페츠나츠 대대들은 독일 전방 거점들 사이로 이동하여 방어진을 1겹씩 벗겨 내었다. 스페츠나츠의 성공으로 많은 경우 긴 시간의 준비 포격 없이 공세가 시작되었다.
비테프스크 지역에서 6월 24일에 제43군이 독일 E 분견 군단의 잔여 병력을 쓸어버린 다음 비테프스크 서쪽에서 드비나 강을 건넜고, 25일 정오 즈음에는 제39군의 기갑 부대와 합류하여 독일 제53군단의 퇴로를 차단했다. 제6근위군은 제1 전차군단의 지원을 받으며 방향을 돌려 퇴각하는 독일 제3기갑군을 추격했다.
남쪽에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가 24일에 돌격을 개시했는데, 로코솝스키는 공병들로 하여금 프티치 강 동쪽을 따라 늪지에 나무 둑길을 만들어 전차부대를 몰래 늪지를 지나게 해서, 독일군이 예상못한 늪지에서 기습을 시작했다. 독일군 방어진이 무너지자 로코솝스키는 늪지 둑길 위로 기갑 부대를 투입시켜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후방으로 침입했다. 6월 25일 정오에는 제1근위전차군단이 40킬로미터나 진격하여 보브루이스크 남쪽에 접근하고 있었고, 이사 플리예프[15]가 이끄는 기병-기계화 집단이 그 뒤를 이어 슬루츠크를 향한 서진을 준비하였다.
26일에 제9전차군단은 로가체프 서쪽 독일군 방어진을 돌파하고 보브루이스크 바로 남쪽 베레지나 강의 도하점을 점령하려고 했다. 강의 서안에서는 제1근위전차군단이 접근 중이었다.
소련 기갑 부대의 진격이 있은 뒤, 소련 제3군, 48군, 65군이 독일 제35군단과 제41기갑군단의 일부, 제20기갑사단을 보브루이스크 남동쪽에서 포위하였다. 포위진에서 벗어나려는 독일군이 티톱카의 교차로에 몰리자 소련 공군이 가차없는 맹공을 퍼부었다. 이 공격에서 얼마 안 되는 독일군만이 보브루이스크 북서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탈출은 소련 지휘관들이 휘하 부대에게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민스크로 진격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소련군은 작전의 다음 단계로 오르샤와 모길료프를 공격했다. 소련 제49소총군은 6월 24일에 독일 제39기갑군단과 제12군단 사이로 소규모 돌파를 감행했다. 독일군의 재앙 소식을 들은 독일 제4군은 서서히 모길료프로 퇴각했다. 6월 27일, 제49소총군은 모길료프의 남과 북에서 강을 건넜다. 독일군은 민스크로의 퇴각을 심각히 고려해야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모길료프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다수의 독일군은 이 명령을 거부하고 서쪽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돌출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5일까지 독일은 정면 공격이 양동 작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진행되면서 독일군도 소련의 주공이 정면이라는 것을 알았다. 보브루이스크와 모길료프 같은 포위전이 거듭되었지만 독일군 장성의 공공의 적 히틀러는 소련군의 공세에 대해 독일군이 도시를 "요새화"해서 막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후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적백내전으로 수립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종심작전 교리를 부활시켰고, 이 교리에 따라 소련군은 독일군의 요새를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우회해 포위해 버렸다. 아돌프 히틀러의 삽질로 병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았던 중부집단군은 소련의 압도적인 포격에 의해 그대로 각개격파당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벨라루스 발코니 북쪽에는 독일 제3기갑군과 제4군 사이에, 남쪽에는 제4군과 타격을 입은 제9군 사이에 커다란 틈새가 생겼다. 파벨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 소속 2개 전차군단과 제3독립근위기계화군단이 북쪽 틈새를 파고들었는데 휘하 여단들을 평행하게 진격시켜 베레지나 강의 도하점을 찾도록 했다. 남쪽 틈새로는 플리예프의 기병-기계화 집단이 프티치 강을 건너 슬루츠크로 진격하였고 6월 29일에는 슬루츠크를 점령했다.
독일 육군 총사령부(OKH)는 뒤늦게야 이러한 공격에 대응하여 몇몇 기계화 부대들을 철도와 도로로 이동시켰다. 독일 제5기갑사단이 보리소프까지 열차로 이동하여 후방 부대들과 함께 벨라루스 발코니 북쪽의 틈을 메우려고 했지만 기껏해야 몇 번의 기습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몇 시간 지연시키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7 민스크 해방
7월 2일, 돌출부의 중심부이자 교통의 요지인 민스크와 그 주변에는 약체의 독일군만이 남아 있었다. 독일군이 방어 준비를 채 갖추기도 전에 소련군의 소규모 선견대가 민스크로 돌입해 버렸다. 민스크 북쪽에서는 제5근위전차군 소속 제29전차군단이 도시를 지나 서쪽으로 진출하여 스비슬로치 강의 도하점을 점령했다. 7월 3일에 민스크 북서쪽 외곽에서 제3근위전차군단이 들어왔고 북동쪽에는 제4근위전차여단이 독일군을 소탕했다. 민스크는 독일군이 방어를 조직하기도 전에 점령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7월 3일 오후, 제1근위전차군단의 선견대가 남쪽에 도착하여 민스크 함락을 완료했다. 그들 뒤에는 남동쪽에서 제3군, 북동쪽에서 제31군의 소총병 부대가 따라왔다. 그리하여 민스크가 점령된 그 순간, 소련군에게 우회된 채 민스크 동쪽에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던 독일 제4군에 대한 포위망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돌출부 정면에서도 독일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후방까지 소련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포위망이 만들어진 것이다.
훨씬 남쪽에서는 보브루이스크의 독일군 제9군의 2개 군단이 소련군 2개 전차군단의 포위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육군 총사령부는 이곳의 상황 타개를 위해 제12기갑사단을 파견했다. 제12기갑사단은 6월 27일에 보브루이스크에서 50Km 떨어진 오시포비치까지 열차로 이동했다. 제9군 참모장은 사단장에게 말했다.
"반갑네. 그런데 제9군은 없어졌어."
정말 안습하게도 이 말은 어느 모로 보나 맞는 말이었다.
6월 30일, 제12기갑사단은 포위망에서 탈출한 제9군 소속 1만 명을 구해냈다. 하지만 나머지 6만 명은 소련의 집중적인 항공 공격을 받았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한편 그때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던 히틀러는 6월 27일에 '작전 명령 제8호'를 배포하여, 이미 포위되어 버린 병력으로 전선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건 이미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헛소리라는 것이 입증된 명령이었다. 당연하게도 독일군 지휘관들은 반격을 할 병력을 재편성하기 위해서라도 퇴각이나 기동을 허가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청했지만 매번 거부당했다. 그 결과 비테프스크에서 제53군단이 항복했고, 민스크 동쪽에서 제4군의 대부분이 포위당했다.
7월 3일, 제5근위전차군은 민스크 서쪽에서 재집결하였고 이 사이 오부호프의 기병-기계화 집단은 독일 제5기갑사단과 제39기갑군단의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독일군을 상대로 몰로데치노에서 전투를 개시했다. 남쪽에서는 이사 플리예프의 기병-기계화 집단이 바라노비치로 접근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북쪽에 제7기갑사단, 남쪽에 제4기갑사단을 추가로 투입하여 저항에 나섰다.
7월 5일, 제5근위전차군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로의 진격에 가세했고, 7월 8일에는 제3벨라루스 전선군의 기병-기계화 집단, 제5소총군, 제11근위군이 빌뉴스를 포위하여 독일군을 밀어내고 구원 병력을 차단했을 뿐 아니라 네만 강을 향해 진격을 속개했다. 빌뉴스에서의 전투는 7월 13일까지 계속되었고, 제5근위전차군은 시가전에 휘말려 손해를 보았다.
이날 새로 도착한 독일 제6기갑사단은 적진을 30Km나 뚫고 들어가 수비대의 일부를 구원해 내는 데 성공했지만, 같은 날 소련군은 네만 강에 도달했다. 그사이 바그라먄의 제1발트전선군이 폴로츠크를 점령했고, 인접한 제2발트전선군과 함께 드비나 강의 양안을 따라 북서쪽으로 진격해 나갔다.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에서 새로 이동해 온 제2근위군과 제51소총군이 바그라먄의 전열에 가세하면서 이미 쇠약해진 중부집단군의 북익을 쳤다. 이 축으로의 잔격은 리가를 지나 발트 해 연안을 노린 것으로, 독일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의 연결을 끊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
빌뉴스의 점령과 동시에 독일은 남쪽의 교통 요충지인 리다와 바라노비치를 잃었다. 소련 제50소총군과 제49소총군은 민스크 포위전을 종료한 뒤 원래의 전선군으로 복귀했고, 제2/1 벨라루스 전선군은 각각 독일군 후방 깊숙한 곳의 그로드노와 비아위스토크를 노렸다. 1주일 만에 벨라루스 남부에서의 진격은 폴란드 국경을 향한 훨씬 큰 규모의 전투로 확대되었고, 제1벨라루스전선군의 좌익도 코벨 서쪽에서 전투를 개시했다.
소련군의 진격은 선두 기갑 부대가 소모되어 무뎌지면서 7월 말에 마침내 둔화되기 시작했다. 3주 동안의 전투나 기계적 마모에 의한 전차의 소실 때문에 전차 부대들은 수리와 재정비가 필요했다. 제5근위전차군의 손실이 가장 심각했는데 파벨 로트미스트로프는 이 손실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곧 소련 기갑-기계화군 총감으로 승진하긴 했다. 물론 표면상의 승진이었다.
독일군 수뇌부는 급격한 소련군의 진군 속도로 인해 패닉 상태에 빠졌다. 히틀러는 사수를 명령했고 중부집단군 사령관도 계속해서 교체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히틀러는 에른스트 부슈를 해임하고 '방어전의 귀재'로 칭송받는 발터 모델 원수를 중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또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으로 독일군 수뇌부가 마비되면서 혼란은 더더욱 심해졌고 결국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헸고 결국 독일군은 엄청난 출혈을 당했다.
소련군은 기세를 몰아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루블린-브레스트 작전, 야시-키시티프 작전을 속행해 바르샤바까지 진격을 계속했으나 지나치게 빠른 진격으로 인해 보급 문제가 생겼고 교량이 파괴되어 버린 데다 중부집단군이 퇴각했다가 다시 재편성해 전열을 가다듬자 소련군은 진격에 큰 부담을 느꼈다. 결국 공세는 바르샤바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종결되었다.
그런데 소련이 무너진 후 공개된 문서들에서 스탈린은 막바지에 이미 바르샤바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상태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수백km를 달려온 소련군 앞에는 전열을 정비한 독일군 사단들이 버티고 있었고, 이들의 필사적인 파쇄 공격으로 소련군 부대들이 잇달아 패퇴하여 수십 km를 다시 밀려난 연후에야 비로소 스탈린도 공세를 종결하는 데 동의했다.
8 결과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일 집단군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중부집단군은 이 작전에 의해 30개 이상의 사단이 전멸함으로서 완전히 궤멸되었다.
이 작전은 사실상 동부전선의 승패를 결정한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1945년 1월부터 시작된 비수아-오데르 공세에서 소련군은 독일 영내로 진입하지만, 그때는 이 작전의 여파로 이미 독일군은 패잔병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에 승패는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제시한 소련군의 종심타격 작전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소련군은 불과 5주 만에 700Km를 진격했으며 앞서의 동부전선에서의 두 주요 전투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 비해 사상자도 적게 나온 데다 전과만을 보았을 때는 두 전투를 능가하는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냉전 당시 서방 세계에 소련 기갑 부대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후에 만주에서 진행된 소련의 만주 작전 또한 이런 공포에 큰 역할을 했다). 소련은 승리를 기념하며 독일군 포로 5만여 명을 모스크바에서 행진에 동원했는데[16], 이때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서 청소당했다는 의미로 독일 포로들이 지나간 다음 청소차들이 뒤를 이어 행진했다.
또한 이 전투로 소련군은 독일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 독일의 동맹국들을 공격해 9월 초순부터 발칸 반도 대부분과 핀란드의 항복을 받아냈다. 사실상 이 전투로 독일은 동맹국들을 잃고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폴란드에서는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소련은 모종의 이유로 이 봉기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 이때 소련이 이 봉기를 지원할 수 있었느냐 능력이 딸려서 없었느냐에 대해선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한데, 양쪽 의견 모두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어 현재로써는 단정이 어렵다. 분명한 건 카틴 학살 사건과 더불어 폴란드 사람들이 소련의 ㅅ, 러시아의 ㄹ자만 나와도 이를 북북 가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봉기는 독일군에게 진압당했다. 이후 폴란드는 소련에게 점령당하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다른 동맹국들도 중립을 선언하거나 연합군 측으로 돌아서려 하자 독일은 동맹국 내 친독파를 지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이들의 탈퇴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동맹국 군대들의 상당수가 도망가거나 편을 바꿔서 소련군과 같이 독일군에 맞서기까지 했다. 결국 히틀러가 안 그래도 불안정한 동맹국들의 정권들을 건드려 놓은 탓에 오히려 이들 지역을 점령한 소련이 공산 정권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줬다.
이 전투에서 보여 준 소련군의 대진격은 훗날 벌어질 만주 작전과 더불어 같은 연합군에게도 충공깽을 안겨 주었다. 소련군 하면 떠오르는 기갑 웨이브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 ↑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 ↑ 제1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 ↑ 제2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 ↑ 제3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 ↑ 제1발트전선군 사령관
- ↑ 중부집단군 사령관. 6월 28일 전까지는 에른스트 부슈가 사령관을 맡았다.
- ↑ 제2군 사령관
- ↑ 제4군 사령관
- ↑ 제9군 사령관. 6월 28일 전까지는 한스 요르단 장군이 사령관을 맡았다.
- ↑ 제3기갑군 사령관
- ↑ 전격전의 전설의 저자.
- ↑ 폴란드 증원군 7만 9천여 명 포함.
- ↑ 비전투 요원 48만여 명 포함.
- ↑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난다. 이는 나치 독일이 연합군과 소련군을 상대로 배치한 병력 규모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연합군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형성한 시점에서 나치 독일이 서부전선에 전개한 사단 수는 약 20개 남짓, 반면 동부전선에는 300개가 넘는 독일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이들을 쓸어 버리면서 들이닥친 게 바그라티온 작전이다.
- ↑ 이후 전후까지도 살아남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U-2기 격추 사건을 지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 ↑ 이들 포로 행렬의 최선두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 장성 20여 명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