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네이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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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Joseph William "Joe" Namath
생년월일1943년 5월 31일
출신지펜실베니아주 비버 폴스
대학교앨라배마 대학교
체격188cm, 91kg
포지션쿼터백
프로입단NFL 1965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2순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AFL 1965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 뉴욕 제츠)
소속팀뉴욕 제츠(AFL/NFL) (1965~1976)
LA 램스 (1977)
제3회 슈퍼볼(1969) MVP
바트 스타
(그린베이 패커스)
조 네이머스
(뉴욕 제츠)
렌 도슨
(캔자스시티 치프스)
뉴욕 제츠 영구결번
No.12

미식축구 선수. 포지션은 쿼터백. 소속팀은 뉴욕 제츠로스앤젤레스 램스.

현재 NFL의 기틀을 마련한 계기로 여겨지는 제3회 슈퍼볼 MVP. 브로드웨이 조(Broadway Joe)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1]. 사실상 Mr.AFL이라고 해도 될 인물.

대학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선수로 그 유명한 폴 브라이언트가 이끄는 앨라배마 크림슨 타이드의 주전 쿼터백으로 활약했었다.[2] 4학년인 1964년에는 팀을 내셔널 챔피언쉽 우승으로 이끌며 브라이언트로부터 여태껏 지도한 선수 중 최고의 재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대학 마지막 해에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하는데, 불행 중 다행인지 이로인해 월남전 징병 대상에서 면제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AFL 소속 뉴욕 제츠에게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지명받아 프로에 입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 해 AFL 신인상을 타면서 제츠의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된다.

한편 그가 입단할 무렵의 AFL은 1960년 창설한 이래 1966년 NFL과 연합한뒤 그들의 자존심 대결이 된 2회 슈퍼볼까지 AFL팀이 압도적으로 패배하는 바람에, AFL은 슈퍼볼이 시행되기 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풋볼 팬들의 선입견처럼 2부 리그 취급을 받는 분위기였다.[3] 그동안 수많은 풋볼 리그들이 NFL의 독점을 깨기 위하여 아성에 도전했지만 결국 NFL의 넘사벽의 인기 앞에 실패로 끝났고[4] 그나마 NFL에 대항하자고 나선 신생 리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리그를 운영하고 있는 조직이 AFL이었다. NFL 프랜차이즈가 없어서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기타 미국 대도시[5]를 공략하며 착실하게 리그의 규모를 키워 온 AFL은 마침내 NFL과 연합하여 풋볼의 월드시리즈 격인 AFL-NFL 월드 챔피언십 게임, 후의 슈퍼볼 개최를 통하여 비슷한 이름의 MLB의 아메리칸 리그처럼 NFL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설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1회, 2회 슈퍼볼에서 바트 스타를 앞세운 그린베이 패커스에 AFL대표 캔자스시티 칩스오클랜드 레이더스가 2년 연속으로 20점차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이대로 가면 "갑툭튀듣보잡 신생리그 수준이 다 그렇지..." 라는 대다수 풋볼팬들의 선입견대로 수준낮은 팀들이 모인 마이너리그 취급을 받아, 슈퍼볼은 잠깐 해본 이벤트로 그치고 AFL은 NFL의 아성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수많은 리그 중 하나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야말로 존폐의 기로에 몰린 AFL로서는 뭔가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이었지만 1969년에 열리는 3회 슈퍼볼 역시도 NFL을 대표하는 슈퍼스타 쿼터백 조니 유나이타스가 이끄는 NFL 우승팀 볼티모어 콜츠의 압도적인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리그 차원에서의 앞길이 암담한 상황에서 AFL 우승팀 뉴욕 제츠의 쿼터백인 조 네이머스가 슈퍼볼 전날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팀이 이겨. 내가 보장하지. (We're gonna win the game. I guarantee it!) 라는 명언을 남겼고[6], 의 말처럼 슈퍼볼에서도 볼티모어 콜츠를 16대 7로 관광[7]을 태우면서 자신의 말을 지켰다. 당시 뉴욕 제츠의 우승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더 이상 AFL이 수준 떨어지는 신생팀의 리그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결국 NFL은 AFL과 리그 통합을 제의했고 AFL이 이에 동의하면서 통합 NFL이 출범했다.[8] 통합 이후 각 리그는 통합 NFL 산하의 AFC, NFC 양대 컨퍼런스 체제로 개편되었다. AFC와 NFC의 미묘한 라이벌 의식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조 네이머스는 이 영웅적인 활약을 한 1969년 시즌 이후로는 대학 시절 당한 무릎 부상이 재발, 부상에 시달리며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하고 1972년 부활하는 듯 하다가 다시 주저 앉으며 AFL을 지배하던 쿼터백다운 명성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1977년 LA 램스로 이적한뒤 34세의 나이로 은퇴한다. 하지만 은퇴 후 선수 시절 처음 미디어의 이목을 이끌고 다니던 첫 NFL 슈퍼스타라는 상징성과 슈퍼볼 우승 시즌의 엄청난 활약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NFL 명예의 전당에 오르게 된다.
  1. 준수한 외모에 빼어난 패션감각으로 뉴욕 Broadway의 화려함과 어울린다는 뜻의 별명.
  2. 펜실베니아 출신의 그는 특이하게도 흑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에서 학교 유일한 백인 선수로 뛰다가 당시 인종차별과 흑인 인권 운동이 한창이던 남부로 대학 진학을 하며 많은 문화적 차이를 느꼈었다고 한다.
  3. 이는 과거 아메리칸 리그를 2부리그 취급하던 MLB 초기의 내셔널 리그 프랜차이즈들과 비슷하다. 미국 야구속어로 내셔널 리그는 유서깊은 고참팀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Senior Curcuit, 아메리칸 리그는 듣보잡 신생팀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로 Junior Circuit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명칭은 아메리칸 리그 발족 초기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명칭이다.
  4. 오늘날에도 메이저스포츠 프랜차이즈가 없는 도시를 중심으로 NFL에 대항하고자 하는 풋볼리그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가 USFL이었고, 빈스 맥마흔의 흑역사 XFL도 그러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5. 1950~60년대에 급속도로 성장한 서부 및 남부지역의 대도시들을 주 타겟으로 삼았다. 대표적인 도시들이 샌디에이고, 덴버, 오클랜드, 휴스턴
  6. 사실 이 말은 콜츠빠였던 기자 한명이 "콜츠가 니들 묵사발 내버릴걸(They gonna kick your ass)"라고 비아냥대자 "이보쇼 잠깐, 내가 한마디 해드리지(Hey, wait a minute, let me tell you something..)"라고 한 후에 한 말이었다. 그도 회고하길 그때는 너무 감정적인 상태라 그렇게 얘기한 것이었다고.
  7. 이 당시는 지금처럼 패스전술이 발달한 고득점 리그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우세가 점쳐졌던 콜츠가 듣보잡 AFL의 팀에게 진다는 것 자체가 관광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8. 사실 가장 큰 계기는 한 명의 신인선수를 두 리그가 각각 지명하면서 영입을 위해서 경쟁하는 바람에 선수들이 양다리를 걸치고 이로 인해서 계약금 등 몸값이 폭등하는 폐단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AFL의 슈퍼볼 패배가 계속되었더라면 과연 AFL이 대등한 입장에서 NFL과 통합했을까? 아마도 유망한 신인들은 대부분 NFL을 선택하면서 AFL의 질적저하가 심해지고 마지막에는 대부분의 팀이 해체되고 그나마 시장성이 있는 극히 일부분의 팀만 개별 팀 자격으로 기존 리그에 편입되어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AAFC나 농구의 ABA 꼴이 났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NFL은 AFL 출신 팀들의 AFL 시절의 역사는 인정하지만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등 과거 AAFC 출신 팀들의 AAFC 시절의 역사나 우승기록 등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네이머스의 영웅적인 활약이 벼랑끝에 몰렸던 AFL을 구해냈고 NFL과의 통합 후에도 그 역사를 살려낸 셈이다. 이게 네이머스가 미스터 AFL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