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종교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이 문서가 다루는 종교, 종교인에 대한 내용은 읽는 이에 따라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잘못된 요소가 있을 수 있으므로 이 문서에 쓰여진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마십시오. 편집할 시에는 문화상대주의를 기반으로 객관적으로 작성하고,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은 신중히 검토한 뒤 작성하십시오. 또한 문서의 사실에 관한 내용을 수정할 때에는 신뢰가 가능한 출처를 기입하시거나, 토론 과정을 거치신 뒤 하시고, 다른 종교를 비방하거나 비하하는 내용을 넣지 마십시오.
이 틀을 적용할 경우, 문서 최하단에1 개요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혹은 정의)을 부정하지 마라.[1]
얀 후스, 옥중에서 편지를 보내며
참고로 체코 공화국의 표어(진실만이 승리한다)는 이 말에서 따온 것이다.
얀 후스(Jan Hus, 1372?~1415.7.6)
15세기, 종교개혁의 조그만 촛불을 밝힌 신학자
보헤미아(現 체코)의 종교개혁자이다.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보다 100여 년 전 활동한 종교개혁자이기도 하다.
프라하대학 신학교수 및 총장을 역임했다.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온갖 더러운 부패상을 비판하며 성경을 절대적 권위로 강조하였다.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한 이후 화형당하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을 후스파(Hussites)로 부른다.
2 주요 활동
얀 후스는 체코의 후시네츠에서 태어났다. 출생 년도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1372년으로 추정된다. 프라하대학에서 공부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398년에는 자신의 모교인 프라하대학의 교양학,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한때 로마 가톨릭 사제였고 교회의 설교자로도 활동하였다. 1402년에는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는 체코어의 철자를 개량하고 찬송가도 보급하며, 체코인의 단결과 독일에 대한 저항을 강조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활동도 전개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의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많은 설교와 강연, 저술 활동을 통해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며 초대교회의 순수한 열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청렴하고 순수한 교회, 재물과 부패에 찌들지 않은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가난한 민중의 환영을 받았고, 그는 계속해서 농민 계몽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면벌부 판매, 성직매매에 저항했고 성경과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자)의 저서를 체코어로 번역하여 체코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며 가톨릭 교회의 사치스러움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만찬에서 평신도도 포도주를 마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성만찬에서 포도주는 사제만 마실 수 있었는데, 얀 후스는 신약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체코 개신교의 상징이 성찬용 잔(chalice, 성작)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성만찬 문서 참고.
1411년,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던 얀 후스는 대립교황 요한 23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와는 다르다!)에 의해 파문당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로마 교회는 1414년 10월에 열리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얀 후스는 공의회에 참석한 자신을 곧장 끔살시키려는 가톨릭의 음모라고 판단했다. 죽임당할 것이 뻔했으므로 초기에는 가지 않으려 한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얀 후스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얀 후스는 그 약속을 믿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하려고 마음먹었다. '설마 나를 죽이기야 하겠나'라는 생각으로 얀 후스는 콘스탄츠로 향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이...
얀 후스가 가지고 있는 황제의 안전통행장을 무시하고 얀 후스가 콘스탄츠에 도착하자마자 법정에 세웠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아 억울하게도 공의회에 의해 이단 판결을 받고 체포되었다. 당시 가톨릭에서는 이 판결을 공의로운 재판으로 보았으나, 당시의 후스파를 비롯한 근현대 개신교계는 이를 부당하고 그릇된 재판이라고 보았다. 현대의 많은 개신교도들은 얀 후스를 성경대로 살려 하며 교회 개혁을 추구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성도, 순교자로 본다. 그는 감옥에 갇혀 끔찍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대의를 굽히지 않았고, 1415년 7월 6일 화형당하였다. 그는 화형당하면서 "너희들이 거위(얀 후스)를 잡아 기어이 구워죽이고 있지만 백 년이 지나면, 백조가 나타나서 유럽을 뒤흔들 것이고 그 때는 구워 죽이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백조는 루터파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