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 등장하는 war wagon을 찾으시는 분은 전차(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문서로.
war wagon
1 개요
여러모로 햇갈리게 흔히 전차(戰車)라고도 한다. 고대 전차처럼 '수레'라는 점은 똑같지만, 병기 자체를 타고 전장에 뛰어드는 공격 병기인 전차와는 반대로 아군을 보호/보조하는 방어수단의 성격이 강하다.
소설 초한지에서 초왕 항우를 한신이 평원에서 회전으로 관광해버린 신무기 철수레[1]와 삼국지연의에서 위나라 조진과 촉한의 제갈량이 대결할 때 조진의 구원군으로 온 서강족의 철차(鐵車)도 이것에 속한다.[2]다만 이런 형태의 전차는 후술하겠지만 좀 후대 물건이다.
사용법은 채리엇처럼 무장하고 돌진하기도 하지만 이는 드문 경우이며, 보통은 수레를 아군 진형 주변에 둘러쳐 바리케이드로 사용하여 작은 임시 고정진지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적군, 특히 기병의 돌격력을 상쇄시킬 수 있어 주로 기병대를 상대하는 데 많이 쓰였다. 그러나 진형의 특성상 상대가 공격을 해오는 형태에 따라 맞서는 방어전략을 중심으로 하기에 전투의 주도권은 일단 적에게 넘겨주게 되며, 더욱이 크고 무거운 수레를 사용하기에 진형을 짜고 바꾸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결과적으로 유연성이 부족하다. 때문에 상대가 변칙적인 공격을 할 경우 더욱 대처하기 힘들다. 특히 진형 형태가 아예 임시 고정진지가 생기는 형태이기 때문에, 상대가 장거리에서 강력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대포를 동원할 경우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3]
결국 근대시대로 접어들면서 대포의 발달로 이런 전투용 수레 진형전술은 완전히 사라지며, 현대에서는 시위대 진압시 버스나 방패가 달린 트럭/차량으로 차벽을 쳐서 시위대의 공격을 차단할 때 사용된다. 차벽 문서 참조. 그리고 컨테이너도 사용하기도 한다. 명박산성 문서도 참조.
다만 보병에게 이동식 엄폐물을 제공해준다는 전술 개념 자체는 계속 살아남았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투입된 최초의 현대 전차[4]는 보병에게 이동식 엄폐물을 제공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1930년대까지 보병전차라는 개념으로 꾸준히 개발되었다. 고대 전차와 같은 공격 병기로서의 전차는 순항전차 등이 계승한다. 이런 각각의 분류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하나로 통합된 것이 오늘날의 주력 전차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 전차(공격)와 전투마차(방어)의 결합으로 태어난 것이 현대의 전차라고도 볼 수 있다.
1.1 동아시아의 전투 마차
삼국지의 무대이기도 한 중국 삼국시대에서 돌격 목적이 아닌 전차가 확인된다.[5]대표적으로 삼국지시라즈 게임을 한다면 너무다도 잘아는투석기ㅣ.또한 당시 북방 기마민족들의 공격이나 적 기병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우마차를 사용해 임시 바리케이드로 사용해 방어진을 짜는 거진이 존재했는데, 이 때 수레에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돋은 가시나무를 싣고 다니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재빨리 제일 앞줄에 수레를 배치하고 가시나무를 쏟아 임시 방어선을 만드는 용도였다. 혹은 그냥 평범한 수레들을 배치하고 연결해 적의 돌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이후 중세시대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는데, 이전과는 조금 모습이 달라진다. 예전에는 그냥 보통 수레를 이용했는데, 이때부터는 일반 수레와는 달리 전면부에 큰 방패판을 세우고, 여기에 추가적으로 창검을 달아 적의 돌입을 저지하거나 성벽/성문이 파손되었을 때 배치하여 임시 방책으로 사용하거나, 공성전에서 전면에 앞세워 적의 화살을 막아내는 등 용도가 완전한 전투 전용으로 고정된다. 고려시대 우리 나라에서 사용된 검차가 바로 이런 종류에 해당하며, 조선시대에 사용된 화차도 방패와 창칼을 달아 유사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중국 송나라에서 사용한 항전차의 모습. 한국의 검차도 이런 종류였다. 뒤의 손잡이를 병사들이 밀면서 전진하고, 방패 뒤의 약간의 공간에서 궁노수들이 화살을 쏜다.
송나라 때 사용된 검차의 일종인 상차(象車)의 모습.
조선 후기 군사서적 <풍천유향>에 등장하는 검차와, 그 검차로 짜는 전차진의 개념도.출처링크
파일:/image/020/2008/09/04/200809040390.jpg
조선시대 사용된 문종화차의 모습. 우리가 흔히 아는 모습은 저기서 좌우의 방패와 전면부 칼날이 없는 형태로, 실제로 방패의 경우 초기에는 방패 장착 기종이 있었으나 이동시 불편함의 이유로 나중에 방패만 제거된다.
1.1.1 명나라 때의 재발견
이후 몽골의 원나라에서는 별다른 등장이 없다가, 명나라 시대 여진족, 특히 명 말기 후금(후일 청나라)이 건국되어 크게 성장하면서 다시 대두된다. 남방에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고, 북방에서는 기마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고 만리장성 수축에 공을 세운 척계광은 저서 '연병실기'에서 전차를 이용해 방어진을 짜는 거영과 전차의 설계도, 훈련법을 제시하였다. 다만 이 당시의 휴전 분위기로 척계광의 거영이 실전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일은 없다. 이 때문에 척계광의 거영이 몽골기병을 상대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지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떡밥이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쳐 척계광의 전술과 저술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기본 전투교본으로 사용되면서, 조선 정부가 척계광의 다른 저술 '기효신서'를 증보개정한 '병학지남'에서도 '연병실기'에 등장하는 전차전에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형상의 문제와 화기의 발달로 척계광식의 전차전은 그다지 널리 쓰이지 못했으며, 기존의 화차와 검차를 재개발하고 이를 이용한 진형이 주를 이루었다.
척계광의 전술에 등장하는 전차진형의 모습.
명나라에서 전차진에 사용하던 전투마차들의 모습.*
조선군이 전차진형을 짜는 모습의 일부를 복원한 모습 링크. 그림의 전차는 당시 사용되던 전차들 중 대형의 것으로, 내부에서 소형 포를 쏠 수 있도록 방패판에 대포구멍이 있다.
조선시대 화차방진도 링크. 화차를 사용해 방어진을 짜는 것이다. 네모난 직사각형이 화차, 작은 쥐처럼 생긴 것은 목화수거이다. 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화차항목 참조.
명나라 멸망 후 청대에도 전차는 여전히 활용되었다. 그러나 위에 나온 척계광식의 대기병용 전차진형이 아니라 송나라 때 것처럼 전면에 커다란 방패판이 달린 형태였고, 기병이 중심이었던 청나라의 특성상 사용빈도 역시 감소한다.[6]
계림 공성전 당시 남명의 포르투갈 용병이 청군을 공격하는 모습. 앞에서 말한 방패판이 달린 전차를 사용해 적의 총병대의 공격으로부터 아군 총병을 보호하면서 공격하고 있다
1.2 유럽의 바겐부르크
유럽에서도 근세 시기에 비슷한 것이 사용되었다. 바겐부르크(Wagenburg)라는 것으로, 사용법은 척계광의 전차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 강력함은 마차성(城)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애초에 바겐부르크란 이름 자체가 독일어로 마차(Wagen) + 성(Burg)의 합성어이니...
왼쪽의 4륜 수레가 대포를 장착한 바겐부르크. 오른쪽은 일반 포차다.
출처
대표적으로 바겐부르크를 사용한 사례는 유럽의 후스파에서 보인다. 보헤미아 지역의 종교 개혁가였던 얀 후스를 추종하던 후스파는 주축이 농민군이었기에 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 제국군과의 야전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후스파의 사령관 얀 지슈카는 마차로 방어진형을 짜서 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하는 전법을 들고 나왔고, 핸드 캐논과 석궁으로 기사들을 원거리에서부터 조진 후 근거리에까지 달라붙은 기사들은 마차 위에서 도리깨로 두들기는 전법으로 후스파의 여러 차례 승리를 이끌어내면서 불패의 명장으로 군림했다. 이러한 마차 방어 진형은 타보르라고 불리었으며, 이 영향으로 이후 동유럽에선 타보르가 자주 쓰이게 된다. 이 때문에 "최초의 탱크"라는 조금은 과분한 평가도 받는다.
당시 사용된 바겐부르크(Wagenburg)의 레플리카.
전형적인 형태.
바겐부르크 진형 중 하나의 모습. 저 반달형 진형 테두리의 작은 상자같은 것들이 전부 바겐부르크다.
얀 지슈카가 휘하 농민병들을 이끌고 바겐부르크 진형을 짜서 적 기병대를 상대하는 모습. 195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든 영화의 장면이다. : 영상 링크
1번
2번
좀 오래된 영상이라 화질이 안좋고 길지만 당시 전투모습을 잘 고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방어진형을 짜는 방어적 전술만 쓴 것은 아니었다. 종종 바겐부르크 자체를 적 진형으로 돌격시키며 싸우는 채리엇 식의 활용도 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빈도는 매우 낮았으며, 애초에 바겐부르크 자체가 대형 사륜 짐마차를 전투용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큰 덩치에 비해 느려서, 채리엇처럼 신속하게 움직여 적에게 충격력을 주긴 힘들었다 초기 채리엇이 4륜을 채택하다 2륜으로 바뀐 이유를 생각해보자.
애초에 잘 쓰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정규군들은 기병 전술이나 보병 장창진이 대중적이었던 것도 있고,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수레는 상당히 귀한 물건이다. 후스파의 바겐부르크 진형 전투도 어디까지나 후스파의 주축이 농민군이었기에, 이에 따르는 전투경험과 훈련도 부족, 병력 수 부족을 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이었다.[7][8]
이 약점은 결국 최후의 순간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30년 전쟁 시기에 바덴 변경백은 틸리가 지휘하던 가톨릭군에 맞서 바겐부르크에 대포를 실어서 전투에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 때 고정된 바겐부르크는 적의 변칙적인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적군이 가한 포격에 아군 진형 내 화약마차가 터지면서 진형이 통째로 박살나는 일을 겪고 말았다. 성공했다면 정말 탱크의 원형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무리였을 것이다.
이후 근대시대로 접어들어서는 화포의 발달로 전열보병이 주력이 되면서 바겐부르크가 직접적으로 전선에서 활약하는 일은 없었다. 이후 서부개척시대에나 비슷한 무기가 간간하게 사용되는 정도. 데뷔보다는 훨씬 초라한 몰락이었다.
- ↑ 하지만 이는 시대와 맞지 않는 물건이고 팽성전투의 후속격인 이 전투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 삼국지연의에 보면 전투가 벌어지면 서강군이 철차를 이어 성벽을 만들고 화살을 퍼부었다고 나온다. 물론 돌격도 한다. 거진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 ↑ 물론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 이 단점을 장점으로 상쇄시키는것도 가능하긴 하다. 전투 마차 전술의 달인인 얀 지슈카는 작전상 후퇴와 전투지역 선정을 훌륭히 해내서 이 전법만으로도 불패의 명성을 쌓았다.
- ↑ Mark I 탱크. A7V
- ↑ 돌격과 바리게이트 양쪽으로 사용된 예시는 춘추전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 말기의 전투 운용이 특히 그렇다.
- ↑ 청나라 태조(누르하치)실록에 보면 궁수나 총포수가 탑승하는, 앞부분에 대형 방패판이 장착되어 있는 수레를 앞세워 진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를 복원한 오스프리 삽화는 국내에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라는 책에 실려 있다. 해당 그림은 본문에 기재.
- ↑ 장창병 대 기병 전투시, 기병도 기병이지만 장창병 역시 우르르 돌진해오는 기병 앞에서 끝까지 창을 잡고 버티는 데는 상당한 강단과 훈련, 그리고 전투경험이 필요하다.
- ↑ 다만 헝가리의 장군인 야노슈 후냐디가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바겐부르크를 수비용으로 적극 활용한 예도 있다. 물론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세력이 쭉쭉 늘어나고 있었던지라 바르나 전투나 2차 코소보 전투 등에서 연패했지만, 오스만 제국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야노슈 후냐디의 아들이자 헝가리의 마지막 황금기를 이끈 국왕 마티아슈 1세는 이를 변형하여 마차 대신 파비스를 든 창병이 원형으로 진을 치고 그 안에 총병이나 궁병을 배치하는 전법으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