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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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訥, 1158~1210

1 소개

고려 후기의 승려.

속성 정, 호 목우자(牧牛者[1]), 시호 불일보조.

종래의 9산 선문을 조계종에 통합하는 등 교종을 중심으로 교선일치를 시도한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한 인물. 특히 의천의 천태종이 실패로 끝난 데 반해 지눌의 법통은 현재 대한민국 조계종이 주류로 자리잡을 정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2 생애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국학의 학정을 지낸 광우이다.

의종 19년인 1165년 출가하여 종휘의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명종 12년이던 1182년 승과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포기하고 개경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여했다. 창평 청원사에서 6조의 《단경》을 읽고 대각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1185년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 교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명종 18년이 되던 1188년에 공산(현재의 팔공산)의 거조사에 머물면서 세속화되어 가던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정혜 결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 적극적 보살행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깨달음 이후 남아있는 무명을 수행으로 사그라뜨리자는 돈오점수와 이론 학습과 참선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으로써 체를 삼고 교로써 용을 삼아야 한다."고 말해 선, 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그의 사상에는 "교는 부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의 마음이라."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2]

희종은 즉위하자 송광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현재의 송광사)라 고쳐 제방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를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이 시기 무신정권이 기존의 귀족 중심 교종[3]을 밀어내고 선종 위주의 조계종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는 해석도 많다. 이후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입적하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라 하고, 국사에 추증하였다. 그의 뒤는 유불 일치설로 유명한 혜심이 이었다.

지눌의 불교 개혁을 계기로 불교가 안전한 영적 정화를 이루어 고려말까지 부패하는 일이 거의 없이 고려를 영적으로 잘 이끌어왔다면 설사 차기 왕조에서 성리학이 나라를 완전히 지배한다 해도 불교는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고 백성들에게 필요한 개혁과 발전을 끓임없이 설파했을 것이고, 중국에 사실상 구애받지 않고 넓게 보아 나라의 수명을 510여년으로 제한하지 않고 더 영속할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돈오돈수를 주장한 성철스님이 지눌을 비판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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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징기스칸 4에서는 원판에는 등장하지않아지만, 유통사의 건의로 정발판에서만 등장했다. 지력이 71이라서 쓸만한 편.
묘하게 김갑수를 닮았다.

4 관련 항목

  1. 소 키우는 사람이라는 뜻.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을 "목민관"이라고 불렀던 것이나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의 "목"과 같은 한자이다. 목민(牧民)은 당연히 백성을 돌본다는 뜻. 백성을 가축 취급한다는 개드립도 있다
  2.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선종 중심의 교리가 드러난다는 주장도 있다. '말씀'과 '마음'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본질에 가까울지는 예상이 가능하지 않은가.
  3. 교종, 특히 법상종은 문벌귀족들이 특히 신봉했던 종파이다. 때문에 왕들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법상종을 통합하려 했고, 무신정권은 선종을 중심으로 법상종천태종을 포함한 교종까지 통합하려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