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1 개요

한국 불교 종파 중 하나로. 한국 불교 장자 종단이다. 공식 명칭은 대한불교 조계종.

한국불교조계종, 대한전통불교조계종, 대한불교통합조계종, 대한불교 조계종 삼화불교, 현대불교조계종, 세계불교조계종(…), 근본불교조계종 등은 모두 이름을 비슷하게 지은 종파인데, 헷갈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유사 조계종 명칭을 사용하는 곳이 무려 30여 곳이 넘는다.

2 구조

종지는, 석가모니가 주창한 3가지 깨달음인 자각·각타·각행원만을 근본교리로 받들며, 직지인심[1]·견성성불[2]하여 중생을 이끌어 지도함을 목표로 한다. 조계종을 중흥하여 개산조사 다음가는 공로를 세운 중흥조는 고려말 태고보우 국사, 조계종 본거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조계사다.

어느 종단이든 그곳이 지향하는 바를 알아보려면, 받들어 중시하는 경전이 무엇인지 살피면 된다. 불경이 8만여 권이 넘다 보니, 어느 경전에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 그 종단이 지닌 특징이 드러난다. 조계종 소의경전은 <금강경>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이나 현상은 모두 허망하다는 공 사상이 핵심인 경전이다. 조계종은 이 사상을 바탕으로, 화두[3] 참선을 주요 수행법으로 삼는다.

조계종단은 1920년부터 현재와 같은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재출범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현재 조계종 직무와 직위 제도는,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을 비롯하여, 감찰원(규정원)·총무원·원로회의·중앙종회가 있다. 실제로는 거의 총무원장 중심 체제다.

3 역사

중국 선종 불교에서 6번째 조사 조계 혜능 계통이 이어온 선 사상이 우리나라에 활발하게 소개되기 시작한 때는 신라 후반기다. 1172년(명종 2)에 건립한 대감국사 탄연 스님 묘비에서 처음으로 조계종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므로,[4] 고려 중기에는 조계종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추정한다.

고려 중기 당시, 화엄종 의천 스님이 천태종을 개창했을 때, 여기에는 법안종을 잇는 스님들도 대거 참여했다. 그런데 여기에 혜능 계통 선 사상을 고수하는 스님들이 반대하여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들이 천태종에 대응하고자 구성한 종단이 조계종이다. 이로 말미암아 조계종은 화엄종·법상종·천태종과 함께 고려 불교계를 주도하는 4대 종단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조계종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승과[5]를 별도로 시행하기 시작했다. 승가고시 스님 되려고 해도 시험에 합격해야 하다니..

그러나 이와 달리 보조 지눌 국사가 13세기 초, 조계산 수선사라는 절에서 사상을 크게 일으켜 세우기 시작한 때부터 조계종이 시작됐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그래서 조계종 종조는 보조 지눌이라고 주장하는 보조 법통설이 나와, 첨예한 조계종 종조 논란을 일으켰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 조계종 종조 논란 참조.

14세기 중간 무렵에는, 태고 보우 국사가 왕으로부터 승려 인사권을 위임받아 불교계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조계종이 불교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원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임제종을 적극 표절 표방하기 시작했다. 그후 조선왕조가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하면서 조계종단도 타격을 받아, 1424년(세종대왕 6)에 천태종·총남종과 함께 선종으로 강제 통합되었다. 데꿀멍

그 결과 조계종 특성은 희석되었고, 사회 경제 전반으로 기반이 무너지고 박탈당했다. 그리고 연산군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연이어 불교가 탄압 받으며 종단 자체가 사실상 해체되는 충공깽스러운 사태가 일어났으며 대부분의 스님들이 산속으로 도망쳐 망했어요 테크를 타기 직전에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3.1 조계종 종조 논란

그렇다면 과연 누가 조계종 종조일까? 보조 지눌일까, 태고 보우일까.

이 시기에 휴정 스님 문하에서 태고보우 국사를 우리나라 조계종 종조로 보기 시작했다. 1625년(인조 3)에 휴정 스님 상좌[6] 언기 스님이 태고보우 국사가 종조라는 태고법통설을 제기했다. 1630년에 묘향산과 금강산, 그 이듬해에는 대흥사에 각각 휴정 비문을 세우면서, 태고법통설을 정설로 받든다. 나아가, 휴정 스님 상좌들이 조선 중기 이후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면서, 우리나라 불교계 전반에 정통설로 자리잡는 듯 했으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근대 이후 학계에서 이능화가 최초로 조계종 종조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보조 지눌 국사 이후에 조계종이 성립됐다. 그러므로 조계종 종조는 보조 지눌!"이라고 밝혔다.(출처 : 1918년 조선불교통사)

이에 보태어,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며 조계종 연구에 몰두한 불화 이재열은 "태고 보우는 조계종 성립 후 200여 년이 흐르고나서 활동한 인물이므로, 종조가 될 수 없다."며, 보조 법통설에 힘을 실었다.

이렇게 태고 VS 보조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와중에, 1970년대 들어 성철 스님 등장으로 조계종 종조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967년 해인사 초대 방장이 되면서 현대 한국불교를 이끌기 시작한 성철 스님은, "조계 혜능을 원조로 임제선 계통을 이어 받은 태고가 종조"라고 주장했다.(출처 : 한국불교의 법맥)
여기에 당시 동국대 교수이자 훗날 총무원장까지 역임하는 지관 스님도 "보조 종조론은 모든 이가 공감하기 어렵고, 조계종 법통은 이미 오래 전부터 태고→환암→구곡→벽계→부용→서산 등으로 확정했다."며, 태고 종조설 굳히기에 들어갔다.(출처 : 조계종사. 동국역경원. 1976)

당시 성철 스님과 지관 스님이 지닌 종단 내 막강한 영향력 탓에 조계종 종조 논쟁은 태고 종조설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재열, 이종익, 고익진, 최병진 등이 연이어 조계종 종조 문제를 거론하고 연구하며 끊임 없이 의의를 제기한 탓에,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듯 진행해온 종조 논쟁은 1994년 종단 개혁과 함께 마련된 종헌 종법에서 도의 국사[7]를 종조로 확정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동안 종헌에서 종조는 보조 지눌과 태고 보우가 번갈아 차지했다. 1954년 불교정화 당시, 보조 종조설과 태고 종조설이 대립했다. 1962년 2월 불교재건 비상총회에서는 태고를 내세웠으나, 현 조계종단을 세운 비구 측은 보조를 종조로 한 종헌을 단독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80년 10․27 법난 이후 개정된 종헌은 태고를 종조로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4년 9월 29일에는 새로운 종헌에서 도의 국사를 종조로 내세우면서 태고는 중흥조임을 밝혔다. 그러니까 현 종헌은 도의 종조설과 보조 종조설, 그리고 태고 종조설을 절충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현행 조계종 종헌 종법에는 도의 국사를 종조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규정을 다소 애매하게 기록해놓아서, 논쟁이 다시 일어날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누구를 종조로 보느냐에 따라 조계종 정체성에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종단내 정치역학 문제와 맞물려 학계에서도 늘 민감한 부분이다.
  1. 교리를 캐거나 계행을 닦지 않고, 직접 사람 마음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깨닫게 하여 번뇌를 떠난 깨달음에 이름
  2. 자기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됨
  3. 참선하는 자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답을 구하려 애쓰는 문제
  4. 참고자료 : 한국불교와 조계종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5. 고려·조선 시대에 승려에게 시험을 보여 뽑던 과거 시험
  6. 불교에서의 제자를 의미한다
  7. 통일신라 성덕왕시대에 당나라로 가 조사((祖師)가 되어 신라로 돌아온, 중국으로 치면 선종의 시조인 달마 대사 같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