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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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20대 신종 왕탁21대 희종 왕영22대 강종 왕오
묘호정종(貞宗) → 희종(熙宗)
시호인목성효대왕
(仁穆誠孝大王)
능묘석릉(碩陵)
왕(王)
영(韺)
불피(不陂)
절일수성절(壽成節)
배우자성평왕후(成平王后)
아버지고려 신종
어머니선정왕후(宣靖王后)
생몰년도음력1181년 5월 8일 ~ 1237년 8월 10일
양력1181년 6월 21일 ~ 1237년 8월 31일 (57세)
재위기간음력1204년 정월 가사일 ~ 1211년 12월 계묘일(7년)
양력

1 소개

고려의 제21대 왕. 신종의 큰아들이다.

아버지 신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그 역시 최충헌의 전횡 때문에 왕 노릇을 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일단 희종은 최충헌을 진강군개국후에 봉하는 등 최충헌의 존숭에 열을 올렸는데, 그 길기로 유명한 최충헌의 관직명인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바로 희종이 즉위한 직후다. 또한 최충헌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들어주었다. 사실 권력이 없었으니 최충헌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2 최충헌 제거 실패

어쨌든 재위 초반에는 이렇듯 최충헌의 말을 잘 듣는 군주로 보였으나 속으로는 최충헌의 전횡을 고까워하고 있었다. 결국 1211년 내시 왕준명 등 측근들과 함께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최충헌을 궁으로 불러들여 환관을 시켜 최충헌에게 "왕께서 공에게 술과 음식을 주신답니다"란 말로 그를 궁 깊숙한 곳까지 유인했다. 이 말을 믿고 들어온 최충헌에게 왕준명 쪽의 무사와 승려들이 달려들어 수행하던 사람들을 죽이고 그를 살해하려 하자 놀란 최충헌은 희종이 있는 대전의 문을 계속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외쳤으나 희종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사실 열어주고 무사와 승려들도 입장시켰으면 죽일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이 때서야 희종이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최충헌은 간신히 도망쳐 지주사 방의 장지에 숨어서 찾지를 못했고 수상하게 여긴 최충헌 측근들의 대응으로 결국 최충헌 살해에 실패했다.

2.1 폐위

당연히 빡친 최충헌은 왕준명 등을 숙청해 버리고 바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쫓아버렸다. 이후 영종도, 교동도 등으로 옮겨다니다가 1219년 개경으로 불러들인다. 그 이유는 자신의 딸과 최충헌의 아들 최성[1]과 혼인을 하게 되었기 때문. 그렇게 최충헌의 사돈이 된 그는 8년간 개경에서 잘 먹고 잘 산다.[2] 그러다가 1227년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교동으로 옮겨지고 결국 1237년까지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유배다닌 기간은 (중간에 개경에서 지낸 기간을 빼면) 18년[3]이었고 향년 57세였다. 최씨정권기에 집권한 고려 왕들 중 그나마 최충헌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던 왕이었으나 무참히 실패하고 꽤나 고단한 삶을 산 안습의 군주. 결국 죽어서도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고 강화도에 묻혔다.

여담으로 남한땅에 묻힌 3명의 고려왕 중 한명이다.[4] 능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의 석릉

3 기타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정태우가 희종 역으로 출연했다. 여기선 태자 시절부터 최충헌에게 불만을 품다가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원래 있던 태자비를 폐하자 반발하다가, 오히려 이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고 최충수를 몰래 불러 장인이라고 부르고, 신종의 밀지를 조작하여 보내는 등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충돌을 유도한다. 나중에 최충헌에게 밀지가 들통나서 그에 무릎까지 꿇고는 위기를 넘기고, 즉위후에도 최충헌을 한없이 후대하다가 기회를 엿보고 결국 암살을 꾀하지만 결과는 역사대로.

또 웹툰 와탕카 중 최충헌의 엄청나게 긴 관직명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서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

코에이 게임 원조비사 원판의 시나리오2에서 고려 국왕으로 등장한다. 모든 능력이 C로,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 한글판에서는 엉뚱하게도 희종 다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는 고려 고종으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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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또는 최전. 기록이 많이 엇갈리는 편. 확실히 아시는 분이 수정요망.
  2. 이걸 조선식으로 비유하자면 연산군이나 광해군반정으로 폐위+유배된 후 반정공신과 혼맥을 맺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서 산다고 생각해보자(!).
  3. 유배생활 역시 편치 않아 최충헌이 어떻게 지내나 살펴보고 오라고 보낸 부하의 보고에 의하면 물자가 결핍되어 창고에 달랑 쌀 6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래놓고 다시 불러들이기
  4. 나머지 둘은 강화도에 묻힌 고종과 고양에 묻힌 공양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