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

姜元龍
1917년 7월 3일 ~ 2006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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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목사. 일제강점기 한국의 장로교 교단 중 하나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회자이자 정치인, 철학자, 통일운동가, 교육자, 시민사회운동가였다.

1917년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태어났으며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재학 시절이던 1931년 개신교인이 된다. 개신교인이 되자 집안의 반대는 당연히 심하였고 그의 조모는 슬퍼하셨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농촌 계몽운동에 감화되어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신념을 안고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으며 당시 1935년에는 만주의 북간도 용정의 용정중학으로 진학, 윤동주, 문익환을 만나 인연을 세웠고 브나로드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중도파 정치인들과 같은 노선을 걸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경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조봉암과 생전에 친분이 두터웠으나, 기본적으로 반공보수 성향인 강원용은 조봉암의 지지요구는 거절하였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 반 독재운동에 헌신했었다.

하지만 5공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는 당시 신군부에 호의적으로 돌아서면서 5공 시대의 변절자 가운데 으로 꼽히면서 변절의 아이콘 가운데 하나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노태우 정권 때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박노해 석방 탄원서에 제일 먼저 서명할 정도로 인권 문제에 대해선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말년에는 386세대가 오만과 독선에 빠져있다면서 참여정부의 실정을 크게 비판하면서 친노 및 한겨례신문과 충돌하였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과도 비슷[1]했지만, 반발이 존재했던 김수환과 달리 5공 시절 이미 변절자로 취급받았던 강원용에 대해서는 큰 논란도 뭐도 없었다. 강원용이 우파로 돌아섰다라는 비판 받은지 20년이 다되어가던 상황이었는데 논란이 있을 리가...

강원용 목사는 친미 보수 성향의 기독교 목회자로, 평생동안 반미 성향이나 좌파/사회주의 노선은 일관되게 멀리하였다. 조봉암을 포함한 혁신계 인사들과 친분에도 불구하고, 같이 활동하자는 제안을 끝끝내 뿌리친 것도 이때문이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때도 그의 남로당 경력에 주목해서, 미국 외교관들에게 "박정희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자"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그만큼 일관된 친미반공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국시를 반공으로 내걸고 극단적인 반공노선으로 치닫은 것도 이러한 미국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멀어진 것도, 고령으로 건강때문에 활동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당시 민주화운동, 학생운동권에 반미성향[2]과 좌파노선이 전면적으로 대두된 것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

월간 신동아 2003년 12월호부터 5회에 걸쳐서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라는 인터뷰가 연재되었다. , , , ,

2006년 8월 17일, 노환과 더위로 인하여 사망. 향년 90세.

저서로 <역사의 언덕에서>가 있다.
  1. 당시 노무현 지지자들은 수꼴들에게 영혼을 팔았다며 패드립을 일삼았다. 참고로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낙태 같은 성 윤리 문제에 관해서 일부 좌파들도 모욕을 일삼았다가 비슷한 성향의 진보좌파 논객 진중권에게 극딜을 맞았을 정도. 김수환 항목 참고.
  2. 광주학살과 12.12가 가능했던 것이 미국의 승인 혹은 묵시적 동조가 있었던 것으로 봤던 것이 가장 큰 배경. 평시 군 통수권이 미군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협조 없이는 군대를 움직일 수가 없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