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희

尹恭熙
Victorinus Youn Kong-hi

역대 천주교 수원교구장
초대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제2대 김남수 안젤로 주교
역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제10대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제11대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 (서리)제12대 김수환 스테파노 대주교
역대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제6대 한공렬 베드로 대주교제7대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제8대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

1924.11.8~ 대한민국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 세례명은 빅토리노. 사목 표어는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 2016년 현재 한국 가톨릭 생존 주교 중 최고령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지학순 다니엘 주교, 김재덕 아우구스티노 주교, 두봉 주교,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 주교 등과 함께 70~80년대 교계 내외에서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특히 인권 보장과 민주화 운동에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어 유명하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에 입학해 철학신학을 배웠다. 북한 정권의 가톨릭 탄압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자 친구 지학순 다니엘과 월남해 학업을 계속하며 1950년 3월에 서울성신대학을 졸업하고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4월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해 사제 생활을 시작했지만, 2달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피난해야 했다. 전쟁 중에는 부산의 UN 포로수용소에서 군종 신부로 사목 활동을 했다. 전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1954년에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총무와 성신중고등학교[1] 라틴어 교사로 잠시 재직하다가 교황청으로 유학해 1957년에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1960년에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해 1960년 5월부터 다시 중앙협의회 총무로 복직했고, 1963년 10월에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수원교구장에 임명되어 주교 서품을 받았다. 하지만 수원교구 사목 도중 서울대교구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은퇴하자 임시 대리로 서울대교구에 약 1년 동안 재직하다가 후임자 김수환 스테파노 대주교에게 교구장 자리를 넘겨주고 수원교구 교구장으로 복귀했다. 비록 임시 대리 직함이었지만 그 동안 누적된 교구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써 후임자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고, 주교회의 임시 의장과 부의장 직책도 차례로 맡았다.

1973년 10월에 광주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교구 업무와 동시에 광주가톨릭대학교 이사장과 주교회의 의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임기 중 정부에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을 빌미삼아 천주교 안동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두봉 주교를 파면토록 교황청에 청원하자,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의논한 끝에 파면 시도를 막아내기도 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겪었는데, 처음에는 가톨릭센터 바로 앞에서 계엄군에게 무차별 구타당하던 시민들을 보고 아무 것도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교구 사제들의 호소에 힘입어 진실을 알려야 겠다고 결심하고, 시민수습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했던 당시 남동성당 주임 김성룡 프란치스코 신부에게 몰래 광주를 빠져나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1981년부터 매년 5월마다 광주광역시 남동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집전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폭도로 몰린 부상자와 구속수감자들의 명예 회복을 정부에 탄원했다.

2000년 11월에 정년이 되자 교황청에 사임 청원을 했고, 청원이 수리되면서 교구장 직책을 후임자 최창무 대주교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광주가톨릭대학교 주교관에 거주하며 원로사목자로 활동하고 있고, 광주대교구의 주요 행사나 광주가톨릭대학교의 특별 강의에 가끔 참석하고 있다. 2013년에는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이해 임동성당에서 감사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가톨릭센터 건물이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개축되면서 당시 윤 대주교가 사용했던 집무실이 관내에 복원되었다.
  1. 소신학교로, 지금은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