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삼국사기표

進三國史記表

김부식고려 17대 임금 인종에게 삼국사기를 바치면서 올린 표문. 진삼국무쌍 사기 캐릭터 목록이 아니다!

현대에 출간되는 삼국사기 번역본에는 으레 이 글이 들어있기 마련이라서 원래부터 그랬던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임신본, 정덕본 등 옛 판본에는 들어있지 않다. 그러면 어디서 인용한 것이냐, 바로 동문선이다.

다음은 원문과 번역문.

臣某言。古之列國。亦各置史官以記事。故孟子曰。晉之乘,楚之擣扤,魯之春秋。一也。惟此海東三國。歷年長久。宜其事實。著在方策。乃命老臣。俾之編集。自顧缺爾。不知所爲。中謝。

伏惟聖上陛下。性唐堯之文思。體夏禹之勤儉。宵旰餘閒。博覽前古。以謂今之學士大夫。其於五經諸子之書。秦漢歷代之史。或有淹通而詳說之者。至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甚可歎也。况惟新羅氏高句麗氏百濟氏。開基鼎峙。能以禮通於中國。故范曄漢書,宋祁唐書。皆有列傳。而詳內略外。不以具載。又其古記文字蕪拙。事迹闕亡。是以君后之善惡。臣子之忠邪。邦業之安危。人民之理亂。皆不得發露。以垂勸戒。宜得三長之才。克成一家之史。貽之萬世。炳若日星。

如臣者本匪長才。又無奧識。洎至遟暮。日益昏蒙。讀書雖勤。掩卷卽忘。操筆無力。臨紙難下。臣之學術蹇淺如此。而前言往事幽昧如彼。是故疲精竭力。僅得成編。訖無可觀。祗自媿耳。

伏望聖上陛下。諒狂簡之裁。赦妄作之罪。雖不足藏之名山。庶無使墁之醬瓿。區區妄意。天日照臨。
신 김부식은 사뢰오니, 고대의 열국(列國)에서도 각기 사관을 두어 그 때의 일을 기록한 일이 있으므로, 맹자는 가로되 "(晉)의 『승(乘)』, 의 『도올(檮杌)』, 의 『춘추[1]가 다 한 가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의 세 나라도 역사의 연혁이 오래되어 마땅히 그 사실을 서책에 기록하여야 할 것이므로, 늙은 신을 명하여 이것을 편수하게 하심인데, 스스로 돌아보건대 부족함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생각건대 성상 폐하[2]께옵서는 당우(唐虞)[3]의 문사(文思)를 갖추시고 의 근검을 본받으셔서 바쁘신 중 틈이 날 때 이전 시대의 역사책을 두루 보시고 말씀하기를, "지금의 학사대부(學士大夫)가 5경과 제자백가의 책이라든지, 진과 한의 역사시대의 『사기』에 대하여는 혹 널리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 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선 도리어 막막하여 그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된 일이다, 더구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세 나라가 세 발 솥처럼 나란히 서서 능히 예(禮)로써 중국과 교통한 때문에 범엽의 『후한서(後漢書)』라든지 송기의 『당서(唐書)』에다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역사서는 자기 국내에 관한 것을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실리지 않았고, 또 그 옛 기록으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졸렬하고 역사적 족적을 놓친 것이 많아, 이런 까닭에 임금의 선· 악이라든지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나라의 안위, 인민의 잘 다스려짐(治)과 어지러움(亂)에 관한 것을 다 드러내어 써 후세에 권하고 경계함을 보이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삼장(三長)의 재능[4](있는 인사)을 얻어 일가의 역사를 완성하여 이를 만세에 끼치어 해와 별과 같이 환하게 하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본래 삼장의 재능도 없고 또 깊은 지식도 없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날로 정신이 혼몽하여, 비록 독서를 부지런히 하여도 책만 덮으면 곧 잊어버리며, 붓을 잡아도 힘이 없고 종이를 대하면 죽죽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신의 학술이 이와 같이 천박하고 이전 시대의 사적(事蹟)이 저와 같이 아득합니다. 이러므로 한껏 정신과 힘을 다하여 겨우 권책을 이루었으나 결국 보잘것이 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라오니 성상 폐하께옵서 이 거칠고 남루한 편찬을 양해하여 주시고 망령된 저작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것이 비록 이름난 산에 비밀스러이 소장될 거리는 되지 못하나 간장항아리 덮개와 같은 쓸모 없는 것으로는 돌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의 구구하고 망령된 뜻을 굽어살펴주십시오.
2005년 수능 언어영역에도 번역본이 출제된 바가 있다.
  1. 춘추시대에 각국이 쓴 역사서로, 이들은 모두 전해지지 않고 다만 공자가 임의로 편집한 춘추만이 지금까지 전한다. 여담이지만 저 도올은 도올 김용옥 선생할 때 그 도올이 맞다. 도올은 남방의 짐승으로 성질이 악해 악한 사람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에 빗대어 역사를 통한 반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썼으리라 추정된다.
  2. 고려는 외부로는 왕을, 내부로는 황제를 자칭하는 국가(외왕내제)였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면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긴 한데, 어쨌거나 '성상 폐하'라는 표현은 격식상 황제에게 사용하는 것이므로 고려의 자주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 중의 하나. 삼국사기가 금에 대한 사대를 결정한(1126) 후 쓰여진(1145) 책임을 생각하면 당시 국제 관계의 미묘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3. 도당씨(陶唐氏)와 유우씨(有虞氏), 곧 을 말한다.
  4. 중국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가 말한 재능(才), 학술(學), 지식(識)으로, 역사서를 편찬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재능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