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사 관련 정보
- 신데렐라 일레븐의 등장인물은 정나라(신데렐라 일레븐)으로.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
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 | 상(商)은(殷) | |||
기원전 1046 ~ 기원전 256 | 주(周) | 서주(西周) | ||
동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 | 춘추(春秋) | |||
전국(戰國) | ||||
기원전 221 ~ 기원전 206 | 진(秦) 후초(後楚) |
1 개요
중국 서주시대부터 존재하던 나라로 시조는 환공(桓公), 수도는 신정(新鄭)이었다. 작위는 백작이었으며 주나라의 제후국 중에서 봉건 시기가 매우 늦은 나라이다. 그 이유는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나 주성왕이 분봉을 한게 아니라 서주 말기였던 선왕(宣王) 때 자신의 동생 우(友)를 봉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동성 희(姬)성 제후국이다. 그가 환공으로 환공은 왕실 사도로 조카였던 유왕(幽王)을 보필했으나, 견융의 침입으로 유왕을 보호할려다가 전사했다. 원래 환공이 처음 받은 땅은 섬서성 지역의 정(鄭)이라는 곳[1]이었으나, 하남성 지역으로 봉지를 옮겼다. 수도 이름이 신정인 것도 새로운 정이란 의미다. 한나라(韓)에 의해 기원전 375년에 멸망했다.
2 전성기
지리적으로 중원의 이점을 살려 교통과 상업이 발달하여 BC 8세기경 환공의 아들 무공(武公)과 손자 장공(莊公) 때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그들은 경사(卿士)를 지냈다. 장공의 어머니 무강(武姜)이 낳을 때 거꾸로 나와서 난산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공의 이름을 역산(逆産)을 의미하는 오생(寤生)으로 지었다. 무강은 장공을 매우 싫어했으며 대신 그 반대급부로 아우 단을 사랑했다. 무강은 단에게 요충지였던 제읍을 줄 것을 청했다가 장공이 이를 거부하자 큰 고을인 경성을 주기를 요청하니 이를 승낙했다. 이에 채중(祭仲)은 너무 큰 읍을 주었다고 간언하기도 했다.
훗날 태숙 단이 무강과 호응하여 본국을 치려 하자장공은 군사를 일으켜 단의 봉읍 경성을 치니 경성 사람들이 단을 배반했다. 단은 언으로 도망했고 장공은 추격하자 단은 다시 공나라로 도망갔다. 장공은 무강을 성영으로 옮기고 “황천(黃泉, 저승)에 가기 전까지는 절대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습니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이를 후회했고 이듬해 영고숙이 황천(지하수)에서 만나면 된다고 진언하자 이를 따라 굴을 파서 어머니를 만나고 화해했다.
장공은 경사라는 지위를 남용활용해 각 나라를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천자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장공의 만행을 견디지 못한 환왕(桓王)[2]이 장공을 토벌하러 오자 대부 축담(祝聃)이 화살을 쏴서 환왕의 어깨를 맞춰 버렸다. 그나마 처음에 축담이 왕을 사로잡자고 한 걸 거부한 거다. 거기다가 장공이 잘못한 것을 천자가 토벌하러 온 건데 장공은 천자에 맞선 것으로 화살맞은 환왕에게 사과와 재물을 보내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이에 대해 환왕은 별 말을 하지 못했고 왕실의 권위는 추락했다.
3 내분
정나라는 사실상 춘추시대를 일으킨 국가였지만 패자의 위치까지는 오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왕실의 권위를 바닥으로 만든데다가, 애초에 영토가 크지 않은 나라였고 장공 사후 권력다툼으로 인한 내분으로 인해 급격히 쇠퇴해 약소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장공은 등만과 혼인하여 태자 홀을 낳았으나, 궁중에는 총애하는 여자가 많았고 11명의 아들을 더 두었다. 이들 중 공자 돌, 공자 미, 공자 의가 특히 군위를 겨룰 만했다. 장공이 죽자 채중이 세자 홀을 세우니 그가 소공(昭公)이다. 하지만 채중이 송나라의 협박을 받고 소공을 내치고 그의 아우 여공을 세웠다. 하지만 여공은 채중을 제거하고 국정의 실권을 쥐려고 했다. 여공은 채중의 사위인 옹규(雍糾)를 시켜 채중을 암살하게 했지만 옹규의 아내인 채중의 딸이 이를 채중에게 발설하여[3] 옹규는 살해당했다. 그리고 채중은 여공을 쫓아내고 다시 소공을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소공은 대부 고거미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장공이 고거미를 경으로 삼으려 했을 때 소공이 반대했었다. 결국 고거미는 이에 앙심을 품고 중신들이 다 함께 참여하는 수렵에서 소공을 살해하고 말았다.
채중은 이에 당황하였으나, 자신이 쫓아낸 여공을 다시 불러들이면 X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공자 미(亹)를 군주로 세웠다. 하지만 제나라 양공이 위나라 수지 땅에 주둔하자 고거미를 보좌로 데리고 양공과 회합했다. 제양공과 미가 둘 다 공자일 때 서로 싸웠으므로 채중은 미에게 수지에 가지 말기를 청했으나, 미는 강한 제나라가 제후를 거느리고 국외로 추방당한 여공과 함께 자신을 칠 것을 두려워해 끝내 갔다. 양공은 미에게 과거의 일을 사과하도록 요구했으나, 이를 따르지 않자 분노하여 숨겨둔 병사로 자미를 죽이고 말았다. 더불어 고거미는 군주를 시해했다는 이유로 거열형에 처했다.[4] 이에 채중은 공자 영(嬰)을 다시 군주로 세웠다. 하지만 여공이 본국으로 쳐들어와 수장 부하가 대릉에서 사로잡혔고 부하가 자신을 살려주면 여공을 임금으로 들이겠다고 했다. 그 조건으로 풀려나 영과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을 복위시켰다. 여공은 복위했지만 채중에게 복수는 하지 못했는데 이미 채중은 죽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공 이 후 그의 아들들간에 내분으로 엉망이 되었다.
4 쇠퇴기
여공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문공(文公)이 즉위했다. 정나라의 위치는 당시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패권을 잡고자 하는 제후들은 제환공을 필두로 우선 정나라를 굴복시켜 자기 휘하로 넣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패권을 두고 다투는 제(齊), 진(晋), 초(楚)는 심심하면 정나라를 공격했고 정나라는 살기 위해서 제나라가 쳐들어오면 제나라에 붙고 진나라가 쳐들어오면 진나라에 붙고 초나라가 쳐들어오면 초나라에 붙는 외교전술로 명맥을 보전했다. 제, 진, 초의 패권경쟁은 누가 정을 자기 편으로 끌어넣는지를 보면 누가 우세한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정나라는 각 제후국들의 완충 지대라는 점을 이용해서 간신히 나라를 보전하고 있었다.
중간에 진나라 공자 중이가 방문했을 때 무례하게 대했는데 그는 훗날 진문공이다. 그 결과 나중에 진문공에게 뼈저리게 털렸다. 문공의 뒤를 이어 목공(穆公)이 즉위했는데 그의 재위 시기 효산 전투가 일어나 진(晉)나라가 진(秦)나라를 발라버렸다. 목공의 뒤를 이어 영공(靈公)이 즉위했는데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경 자공과 자가에게 시해당했다. 봄, 초나라에서 영공에게 큰 자라를 보냈는데 자가와 자공이 영공에게 조현하려는데 자공의 식지(食指)[5]가 저절로 움직였다. 자공이 자가에게 '예전에도 손가락이 움직인 일이 있었소. 반드시 기이한 것을 먹을 것이오.' 들어가려는데 자라국을 영공에게 바치는 것을 보고 자공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영공이 그 웃은 까닭을 물으니 영공에게 그대로 말했다. 영공은 약올리기 위해 자공에게는 자라국을 주지 않았다. 자공은 노하여 손가락을 솥에 넣고 맛보고 나왔다. 영공은 자공의 버릇없는 행태에 노해 자공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자공은 자가와 함께 모의하였고 선수를 쳐 여름에 흙자루로 눌러 영공을 시해했다.
영공 사후, 영공의 아우 공자 거질을 옹립하려 했으나, 거질이 사양하고 나이순대로 형 공자 견을 즉위시키니 그가 양공(襄公)이다. 참고로 영공은 죽은 후에는 시호를 유공(幽公)이라 했으나, 자가가 사망한 후 양공이 자가의 일족을 축출하고 영공으로 시호를 고쳤다. 다만 시법에 따르면 유(幽)나 영(靈)이나 둘 다 좋은 시호는 아니다.
5 자산(子産)의 개혁
이처럼 정나라는 군주의 힘이 약했다. 거기다 목공의 아들들의 후손들이자 방계 공족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특히 목공의 아들 중 예닐곱의 자손의 세력이 강해 그들을 육목(六穆)이나 칠목(七穆)이라고 불렀다. 공자 거질의 자손 양씨, 공자 희의 자손 한씨, 공자 비의 자손 사씨, 공자 발의 자손 국씨, 공자 언의 자손 유씨, 공자 평의 자손 풍씨가 그들이다. 그나마 간공(簡公) 때 재상으로 임명된 자산[6]의 개혁정치를 통해 잠시 부흥하기도 했다. 자산은 25년 동안 재상을 지냈는데 일련의 교묘한 외교활동을 통해 약한 정나라를 열강 사이에서 쓰러지지 않고 우뚝 설 수 있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지위도 존중받게 되었다. 공자가 자산을 그토록 높게 평가한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자산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통치집단 내부의 암흑, 정치문란, 민중들의 무법, 불법비리 등 범국가적인 혼란에 맞서 먼저 국가질서를 정돈하는 일부터 손을 댔다. 법규와 제도를 건전하게 다듬고 통치기구의 등급을 제대로 갖추었으며 각종 법률조항을 형정(刑鼎)에다 새겨 전국에 반포했다. 각종 엄격한 제도를 실행하기 시작했는데 줄곧 혼란 속에 빠져 허우적대던 정나라에서 이런 조치는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백성들은 원망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냈고 심지어는 노래까지 만들어 자산을 저주했다. 그러나 자산은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시정개혁을 굳세게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3∼5년 사이에 정나라의 정치는 큰 효과를 보게 되었고 백성들은 다시 노래를 지어 자산을 칭송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자산이 병이 든 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자 자태숙(子太叔)이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그는 차마 엄한 정치를 펼치지 못하고 관대한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정나라에 도적이 갈수록 늘고 사회 치안이 혼란에 빠졌다. 자태숙은 "그 분(자산)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골치는 없었을 것을"이라며 후회했다. 그리하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강도들을 무력으로 잡아들이고 죽였더니 사회 치안이 비로소 나아졌다.
정나라는 오랫동안 대국 세력에 의해 통제당해왔기 때문에 통치계층 내부의 귀족세력도 이해관계에 따라 상호간 모순된 입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권력쟁탈을 위해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도 그칠 날이 없었다. 자산은 재상이 된 뒤 국내의 이런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압적인 수단으로 나간다면 각종 세력이 연합하여 반발할 것이 뻔했다. 더구나 자산의 집안 즉 국씨는 칠목 중에서 위계가 낮은 축에 속했다. 그는 잠시 모순을 이용하여 양측 모두 상처를 입힌 다음 다시 하나하나 징벌하는 책략을 구사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군주의 권한을 강화할 수 있었다. 정나라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외교의 성패가 매우 중요했다. 자산은 집정 기간 동안 제후들과 여섯 차례 이상 동맹을 가졌는데, 민첩한 외교수단으로 정나라의 굴욕적인 모습을 바꾸어 명예와 지위를 유지했다.
6 다시 쇠퇴기
하지만 자산 사후에는 권력다툼으로 또다시 쇠퇴했다. 간공의 아들 정공(定公) 때는 초나라 평왕(平王)의 태자 건(建)이 망명왔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진(晉)나라와 짜고 내응할려다가[7] 걸려서 분노한 정공에 의해 주살되기도 했다. 이 후 애공(哀公)은 정나라 사람들에 의해 시해되기도 했으며 전국시대 들어서는 더욱 입지가 약해졌다. 유공(幽公)은 한(韓)나라의 무자(武子)의 침입을 받아 피살되고 그의 아들 또는 아우[8]인 수공(繻公)은 재상 자양을 죽였다가 2년 후 자양의 무리에게 시해당했다. 결국 유공의 아우 강공(康公) 때는 한나라에 눌려 부서와 양성을 빼앗기고 결국 한나라 애후(哀侯)에 의해 멸망당했다. 이 후 한나라는 정나라의 옛 수도였던 신정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7 역대 군주
- 환공(桓公) 우(友): 기원전 806년 ~ 기원전 771년 , 주유왕을 살리기 위해 견융족과 싸우다 전사.
- 무공(武公) 굴돌(掘突): 기원전 770년 ~ 기원전 744년, 환공의 아들
- 장공(莊公) 오생(寤生): 기원전 743년 ~ 기원전 701년, 무공의 아들
- 소공(昭公) 홀(忽): 기원전 701년, 장공의 맏아들, 폐위
- 여공(厲公) 돌(突): 기원전 700년 ~ 기원전 697년, 장공의 아들, 폐위. 정장공의 아들 중 가장 유능해서 정장공이 세자를 이 사람으로 바꾸려다 포기하였다.
하지만 망명 1년만에 왕위 찬탈 - 소공(昭公) 홀(忽):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95년, 복위, 고거미에 의해 시해
- 미(亹): 기원전 694년, 장공의 아들, 제나라 양공에 의해 시해
- 영(嬰) 기원전 693년 ~ 기원전 680년, 장공의 아들, 부하에 의해 시해
- 여공(厲公) 돌(突): 기원전 679년 ~ 기원전 673년, 복위
- 문공(文公) 첩(踕): 기원전 672년 ~ 기원전 628년, 여공의 아들, 아들 다섯 중 공자 란(蘭)을 제외한 4명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이유는 세자가 비행으로 인하여 사형당하자 무서워서 망명을 시도했다고(...) 공자 란(蘭)은 혼자 진나라로 망명에 성공하여 살아남은 후 진문공의 중재로 무사히 귀환, 왕자가 그뿐이라 어부지리로 왕위를 잇게 된다.
- 목공(穆公) 란(蘭): 기원전 627년 ~ 기원전 606년, 문공의 아들
- 영공(靈公) 이(夷): 기원전 605년, 목공의 아들, 이복동생 공자 자송에게 자라탕을 가지고 장난치다가 공자 자송에게 암살(...)[9]
- 양공(襄公) 견(堅): 기원전 605년 ~ 기원전 587년, 목공의 아들
- 도공(悼公) 비(費): 기원전 586년 ~ 기원전 585년, 양공의 아들
- 성공(成公) 곤(睔):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82년, 양공의 아들
- 수(繻): 양공의 아들, 기원전 581년, 성공이 진나라에 구금된 후 추대, 신하들에 의해 시해
- 곤완(髡頑): 기원전 581년, 성공의 아들, 임시로 추대
- 성공(成公) 곤(睔): 기원전 581년 ~ 기원전 571년, 복위
- 희공(僖公) 곤완(髡頑), 운(惲): 기원전 570년 ~ 기원전 566년, 복위(정식 즉위), 재상 자사에 의해 시해
- 간공(簡公) 가(嘉): 기원전 565년 ~ 기원전 530년, 희공의 아들
- 정공(定公) 영(寧): 기원전 529년 ~ 기원전 514년, 간공의 아들
- 헌공(獻公) 채(蠆): 기원전 513년 ~ 기원전 502년, 정공의 아들
- 성공(聲公) 승(勝): 기원전 501년 ~ 기원전 464년, 헌공의 아들
- 애공(哀公) 역(易): 기원전 463년 ~ 기원전 455년, 성공의 아들, 정나라 사람에 의해 시해[10], 여담으로 공자를 내친 적이 있다.
- 공공(共公) 추(丑): 기원전 454년 ~ 기원전 429년, 헌공의 아들
- 유공(幽公) 이(已): 기원전 428년, 공공의 아들, 한무자의 침입을 받아 전사
- 수공(繻公) 태(駘): 기원전 427년 ~ 기원전 396년, 유공의 아들[11] 또는 아우[12], 재상 자양의 무리의 의해 시해
- 강공(康公)[13] 을(乙):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75년, 수공의 아우, 한나라 애후의 공격을 받아 멸망
8 여담
시경 중에서 '정나라의 노래'[鄭風]에는 음란한 노래가 많다고 해, 역사에서 음란의 대명사로 쓰였으며 한림별곡의 '혀고시라 밀오시라 뎡소년(鄭少年)하'의 '뎡소년'이 이 정나라에서 따온, '음란한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란 설도 있다. 연암 박지원의 단편소설 호질의 배경이 정나라로 나오는데 위선자인 북곽(北郭) 선생과 열녀 표창까지 받았지만 성이 각각 다른 아들들이 다섯이나 있는 이웃의 동리자(東里子)라는 과부가 나온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정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한편, 견융 침입 때 정나라에서 망명한 사람 일부가 나중에 지금의 한중 시 지역이 되는 한중 분지로 흘러들어가, 그들의 거주지를 남쪽의 정이라는 뜻으로 남정(南鄭)이라고 했다.
- ↑ 평왕(平王)의 손자
- ↑ 채중의 딸이 어머니에게 물었는데 남편은 다시 맞아들일 수 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채중의 딸은 기탄없이 아버지에게 이를 말했다.
- ↑ 사기 정세가에서는 고거미도 함께 영을 옹립했다고 하나,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양공이 고거미를 거열형에 처했다고 나온다.
- ↑ 둘째 손가락
- ↑ 목공의 손자, 공자 발의 아들로 이름은 교(僑)이다. 자산은 그의 자다.
- ↑ 태자 건이 자신을 정나라 군주로 만들어주면 정나라 내부에서 호응하겠다는 조건으로 진나라를 끌여들였다. 정공은 태자 건을 엄청나게 대접한 것에 비하면 명백한 반역 행위다.
- ↑ 사기 육국연표에서는 아들, 정세가에서는 아우
- ↑ 정확히 말하자면 공자 자송은 정영공이 자라탕을 공족들과 대신들에게 대접하는 날에 연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손가락 하나가 저절로 움직이면 그날 별미를 먹게 된다면서 오늘도 그 손가락이 움직이길래 뭔가 별미를 먹을줄 미리 알았다고 정영공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정영공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자라가 모자라서 공자 자송에게 못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 자송은 정영공의 탕그릇에서 자라고기 한 점을 멋대로 집어 먹었고, 정영공은 공자 자송을 죽이겠다고 날뛰었다. 겁먹은 공자 자송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정영공이 자는 사이 그를 질식사시켰다. 물론 나중에 들켜서 사형.
- ↑ 사유는 불명
- ↑ 사기 육국연표
- ↑ 사기 정세가
- ↑ 사기 육국연표와 달리 사기 정세가에서는 시호 없이 '정군(鄭君) 을(乙)'로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