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

(착호갑사에서 넘어옴)

1 한국의

甲寺
1889967118_lXrRACzs_IMG_4692.JPG
겨울의 갑사 설경. 출처는 갑사 홈페이지.주 출입구 바로 옆 작은 약수터 쪽으로 통하는 아치 쪽문 쪽에서 찍혔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동학사와 함께 계룡산국립공원 내의 양대 절이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가 계룡갑사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679년(신라 문무왕 19) 의상이 화엄종의 절로 삼았으며,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54년(효종 5)에 새로 지었다.

2 조선군인

조선 전기 취재로 뽑혀 오위[1]의 중위에 속했던 군인이다.

또 환도 항목에도 있는 "삼가 <육전>을 상고하건데 이르기를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 능히 삼백보를 달리는 자가 상등이고, 이백보를 달리는 자가 중등이다. 또 수박의 기능이 능히 네 사람을 이기는 자가 상등이고 세 사람을 이기는 자가 중등이 된다 하였다."라는 말도 세종실록 세종25년(1443) 11월 기록인 조선 최초의 법전이었던 '육전(六典:경제육전)'에 실렸던 임금의 호위 보갑사(步甲士)에 대한 말이다.

2.1 갑사의 역할

갑사는 양인의 의무 군역인 정병과 수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였으며 귀족층의 자제들을 뽑아 이룬 병종이다. 또한 경국대전이 반포될 무렵에는 1만 4,800명에 달하였다. 이 명칭은 중국 주나라의 상층 군인을 부르던 데에서 기원하였고, 신라 ·고려 시대에도 보이고 있으나 제도적인 특징을 지닌 군인으로 전환한 것은 조선 건국 무렵 이성계가 자신의 휘하 군사를 중심으로 의흥친군위를 설치할 때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국가제도적인 공병으로 확립된 것은 아니어서 각 통솔자의 사적인 목적에 이용될 소지가 컸고, 1~2차 왕자의 난 때 권력의 향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정종 때 사병의 혁파와 더불어 삼군부에 귀속되었다가 태종의 즉위와 더불어 복립되어 궁궐의 숙위와 도성 경비를 담당하였으며, 병농일치제에 따라 번상 형식의 군역제로 정비되었다. 그들은 사직(5품)·부사직(6품)·사정(7품)·부사정(8품) 등 5∼8품의 실직에 올라 자신의 품직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되는 과전과 녹봉을 받다가 세조 대에 직전법이 시행되면서 과전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소요되는 국가재정은 한때 경관의 녹봉 중 63%를 차지하기도 하였지만, 국가가 안정되어가면서 그 성격이 일부 변하여 대우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경갑사 ·양계갑사 이외에 맹수를 잡는 착호갑사(捉虎甲士)도 있었다. 근무임기를 마치고 거관하는 자에게는 종4품 실직이 제수되었고, 그 중 우수한 자들은 각 지방의 수령으로 진출하였다. 한편 근무중이라도 무예가 뛰어난 자는 수령이나 만호·군관 등으로 진출하였고, 군공을 세우면 당상관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종 때 영의정을 지낸 강순·유자광 등은 모두 갑사 출신이었다.

법제적으로 갑사직은 모든 양인에게 개방되어, 한량은 물론 양인 농민의 의무 군역인 시위패(정병) ·영진군 ·선군(船軍), 그리고 이전(吏典) 등도 갑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지어 업천이라 하여 일반인들이 결혼하기를 꺼리던 백정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갑사는 스스로 기마와 복마(짐말) ·군장은 물론 종자까지 거느리고 왕성의 시위와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며, 유사시 변방 방어 임무에도 동원되었으므로 웬만한 경제력이 아니고서는 그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노비 5~6구, 토지 5~6결 이상의 소유자로 입대를 제한하였다. 그러나 세종 후반 이후 증가된 병력 숫자를 채우기 위해 경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자의 입대도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의 부유한 사족 자제들은 사회적으로 보다 대접받는 유학공부로 돌아섰고, 갑사직은 차츰 의무 군역을 피하려는 일반 양인들의 입대처로 변하였다.

2.2 격하된 갑사

한편 국가에서는 차츰 재정부담을 줄이기 위해 갑사 중 고위품계를 줄이고 하위품계를 늘이기도 하고, 녹봉이 아닌 월봉(月俸)으로 그 대우를 격하시키고 실직에서 체아직(정해진 녹봉 없이 계절마다 근무성적을 평가하여 서로 높고 낮음을 바꾸어가며 녹봉을 주는 관직)으로 전환시켰다. 갑사의 체아직으로의 전환은 당시 증가하는 지배층을 포섭하기 위한 병력수 증가를 국가의 의도대로 가능하게 한 제도이기도 하였지만, 질을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근무평가 단위인 도(到)에 따라 승진하는 인사관리 규정의 정비에 따라 국경을 수비하는 양계갑사(兩界甲士)와 왕성을 시위하는 경갑사(京甲士)로 분리되었는데, 이는 군공의 기회가 많은 양계갑사와 그렇지 못한 경갑사의 승진상의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히 경갑사의 우대조치로 귀결되었다.

2.3 갑사의 요건

갑사는 무반 관료이자 중앙군의 중추적인 군사력이었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았는데, 새로이 갑사를 뽑는 충보갑사취재와, 일단 갑사가 된 후 그 실력을 재확인받는 과정인 하번갑사취재가 있었다. 충보갑사취재는 1423년(세종 5) 구체적인 정비가 이루어져, 서울은 5부→한성부→병조로, 지방은 수에서 감사, 절제사에서 병조로 이어지는 시험절차를 거쳤다. 그러나 시취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행위 등으로 1443년 다시 국가에서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다.

취재 과목은 편전(片箭), 기 ·보사(騎步射)와 수박(手搏) 등 무예만으로 시험되고 무과에서와 같은 병서에 대한 지식은 요구되지 않았다. 세종때를 기준으로 하자면 시험 과목은 활쏘기, 마상 사격, 완전 무장한 채 300 보 이상 달리기라고 한다. 300 보는 대략 540 미터 가량. 쉬워 보일수 있겠지만, 당시 보병의 무장은 규정상 갑옷 한벌에 환도 한자루, 활 한두자루에 화살 스무발. 갑옷만 해도 30kg 정도가 나오는데, 거기에 칼에 활에 화살을 주렁주렁 달고 달리는건 정말 토나오는 일이다. 완전군장갖추고 500 미터를 달린다고 생각해 보자.

조선왕조실록 세종 99권, 25년(1443 계해/명 정통(正統) 8년) 2월 3일(기축) 3번째 기사

병조에 보병과 갑사를 뽑을 것에 대해 전지하다

“보병과 갑사(甲士)를 시험하여 뽑는 법을 금년 봄에 시험해 보려 하니, 먼저 신장(身長)이 8척 이상 되는 건강한 사람을 골라 보사(步射)는 1백 80보(步)에서 화살 3개 중의 2개 이상 맞히는 것과, 기사(騎士)는 세 번 쏘아 한 번 이상 맞히는 것과, 갑주(甲胄)를 입고 궁전(弓箭)과 환도(環刀)를 차고 달음질로 3백 보(步)까지 가는 것 등, 3가지 재주에 다 입격된 자를 시험해 뽑으라. 시험할 때 남과 함께 달음질하지 못하게 하고 저 혼자서만 달음질하게 하되, 달음질의 더디고 빠름은 논하지 말고 다만 3백보를 달려간 자면 뽑으라.”
하였다.

2.4 갑사의 쇠퇴

일단 갑사가 된 자라도 번상근무를 마치고 하번할 때 실시하는 하번갑사취재에 불합격하면 파출되었다. 이러한 끊임없는 재시험에 대해 갑사들의 저항이 심하여 1458년(세조 4)에는 당번근무 중에 시취하여 성적 우수자는 도를 지급하고, 기준 미달자는 파출하여 정병 등에 속하게 하였다. 하번한 갑사는 지방에 있을 때 지방의 행정력이 부족하면 향촌사회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선 전기의 갑사는 16세기에 들어와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차츰 소멸되어갔다. 이에 갑사는 귀족층의 병역 기피로 인해 그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고, 양계갑사는 17세기 이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3 주로 대한민국 해군에서 갑판사관실 소속의 갑판병을 이르는 말

해군에서 갑판사관이란 함정의 기계 장치와 포(砲)를 제외한 함상 전체의 청소ㆍ정비ㆍ출입 통제에 대하여 책임을 맡은 장교를 이른다. 하지만 장교를 갑사라고 줄여부르는 일은 잘 없고, 보통 해군 육상에서 '갑판사관실'의 약자로 육상 잡일을 도맡은 수병을 이른다. 제초, 도색, 환경미화, 시설 보수 등의 일을 한다. 갑판병이 육상에 내려서 받을 수 있는 일 중에서는 최악에 속한다. 그래도 배를 타는 거나 일반적인 육군보단 훨씬 편한 편이라는게 중론.
  1. 중위인 의흥위, 좌위인 용양위, 우위인 호분위, 전위인 충좌위, 후위인 충무위 등 5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