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원

1 개요

昌慶苑

일제 강점기창경궁을 훼손하여 만든 공원. 1983년~1986년에 거쳐 철거되어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다.

2 상세

1909년(융희 3)에 일본인들이 을사조약정미7조약 등으로 우울함과 걱정근심에 빠진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궁궐에 동물을 들여왔는데,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궁궐 안에 있는 전각을 훼손하여 일본식 정원과 건물을 세우고 급기야는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 으로 격하시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창경궁은 궁궐이 아닌 유원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순종이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상 일반 평민과 천민들도 궁궐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창경원으로 바꿨다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순종이 즉위하기 20여년전에 갑오개혁(갑오경장)을 통해서 법적인 신분제가 사라졌으며 양반일지라도 관직에 있거나 어명이 있지 않은 이상 누구도 궁에 들어올 수 없었으므로 그 반론은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순종이 재위하던 시절에는 사실상 일제에게 권력이 거의 다 넘어간 상태이므로 순종이 그렇게 명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온전히 순종의 뜻이라고 볼 수도 없다.

1922년에는 창경원에 벚꽃을 심어서 일본인들이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하였으며 1924년에는 불꽃놀이도 열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사람을 해친다는 맹수들에 대한 소탕방침에 따라 창경원에 서식했던 호랑이, 사자, 코끼리 등이 일제 군경에 의해 몰살되기도 했으며, 해방 후인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에 의해 동물들이 북으로 끌려갔거나 잡아먹히기도 했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케이블카도 설치했던 모양이다.

구경거리가 된다는 관용구로 "창경원 원숭이 꼴"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도 4~50대 이상의 연령대는 자주 쓰는 말이다.

3 이모저모

3.1 사건사고

3.1.1 반달곰 사건

1956년 11월 13일 사육사 윤봉우씨가 곰 사육사에서 아침청소를 하던중 반달곰에게 엉덩이를 물어 뜯겼다. 반달곰이 관광객들이 가져온 음식 냄새를 맡고 청소를 하기 위해 열어놓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걸 보고 윤씨가 다급히 문을 닫자 화가 난 반달곰이 깔아뭉개고 엉덩이를 물어뜯은 것. 당시 경비를 위해 나와있던 육군헌병이 권총 3발을 발사, 반달곰은 사살되었고 윤씨는 목숨을 구했다.

3.1.2 녹두 사건

1961년 9월 30일 동양철학을 연구한다는 백영주씨가 창경원에 들어와 사슴 한마리의 목을 잘라갔다. 외팔잡이인 백씨는 동양 철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사슴을 활로 죽인다음 녹두를 잘라서 백일 동안 먹으면 천하장사가 된다는 얘기를 보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 사건은 4년 동안 해결되지 않다가 백씨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수사진은 엉터리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옆자리에 있던 형사가 듣고 조사한 결과 범인이라고 밝혀졌다.

3.1.3 비단 구렁이 탈출 사건

1965년 7월 29일 창경원 수조에 들어있던 비단 구렁이 한마리가 탈출했다. 길이 2.7m 직경 15cm의 이 비단 구렁이는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들이 붙잡아 창경원에 기증한 것으로 수조를 받치고 있던 돌을 밀어내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돈 3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3.1.4 호랑이 사건

1976년 11월 10일 창경원에서 친척들과 소주 4병을 마신 뒤 호랑이 우리 앞에 와 "이 호랑이는 사람 말을 잘 듣게 생겼다"며 철책 사이에 손을 밀어 넣어 과자를 주다가 호랑이에게 팔을 물렸다. 사육사가 급히 기름 솜 방망이에 불을 붙여 위협하면서 10분만에 구해 냈다. 서씨는 병원으로 옮겨질 때 술에 너무 취해 자신의 팔이 잘린 줄도 모르고 "그 호랑이 힘이 참 센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3.1.5 코끼리 사건

1981년 9월 27일 서울 상공을 지나던 제트기의 폭음에 놀란 코끼리 '자이언트'가 쓰러졌다. 몸무게 6.5톤 키 3m50인 이 코끼리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급성위식체현상을 보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창경원측은 긴급 상황에 묘방을 찾다 체인으로 들어올려 6시간만에 코끼리를 살려냈다. "구출작전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육중한 체구에 폐가 압박돼 폐기능 마비로 숨졌을 것"이라고 당시 창경원 관계자는 밝혔다.

해당 코끼리는 1955년부터 태국에서 들여와 삼성측이 창경원에 기증했으며, 1983년에 과천으로 이사간 뒤에도 건강하게 살다가 2009년에 5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3.2 벚나무와 벚꽃놀이

1986년의 복원사업 당시 일각에서는 창경원 시절 일제가 심었다는 벚나무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과 그냥 나무이니만큼 그대로 두자는 주장이 맞서기도 했지만 결국 벚나무 일부는 베여지거나 일부는 서울특별시 여의도 윤중로 등으로 자리를 옮겨서 심기도 하였다. 창경원 시절부터 사육해온 동물들과 식물들은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다.

창경궁은 창경원 시절에만 해도 당시 어린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에게는 궁궐이라기 보다는 어린이들의 놀이동산, 코끼리 먹이 주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당시 휴일만 되면 창경원 입구가 많은 인파로 붐벼서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암표상까지 기승을 부려 속앓이를 썩히기도 했다. 여기에 미아들까지 발생하여 어른들의 부주의까지 겹쳤고 화장실도 많은 인파 때문에 초만원이 되는 등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 이떼의 기억이 꽤 남아있는 지 궁을 안내를 하시는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아직까지도(2016년 6월 기준)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 벚꽃놀이가 언제인지 문의"하는 전화가 오기도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73년 어린이대공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1950년대~1960년대 수도권의 유일한 동물원 및 놀이동산이었고 어린이대공원 이후에도 유이한 테마파크(?)였다. 물론 그 시절 지방에는[1] 수도권 수준의 테마파크는 전무했고. [2] 심지어 1970년대 일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나체팅'[3]의 장소로도 알려져 당시 유신정권으로 분개하던 운동 대학생들로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정도였다.

3.3 창경원 코끼리

창경원 시절 명물이자 마스코트격으로 떠올려지는 것이 바로 창경원 코끼리였는데 이 당시 창경원에 놀러왔던 중노년 세대들에게는 어린시절 창경원에 서식하는 코끼리에게 먹이를 던져주거나 코끼리가 길다란 코로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 하거나 환호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던 동물이었다.

3.4 제실박물관



제실박물관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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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시절의 모습.

우리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박물관. 창경원박물관, 어원박물관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으며 현재는 제실박물관으로 통일된 상태다. 정확한 명칭은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다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박물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1차사료에 해당하는 여러 서류나 자료가 관리가 귀찮다는 이유로 폐기처분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건립 이유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려진 이유가 없다. 순종이 백성들에게 소장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창경궁에 세웠다는 설이 전해지긴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 궁내부 소속 일본 관리들이 대한제국의 보물을 소장하기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든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되고 놀이시설, 동물원과 함께 창경원의 일부로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며 명칭도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 되었다고. 아마 창경궁이 창경원일 때의 역사를 기억하는 노령의 위키러라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대한민국에 세워진 최초의 박물관이고 순종황제의 의지로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현 국립중앙박물관의 직계 조상으로 대우받고 있다. 물론 정말 순종황제의 의지로 세워졌는지 아니면 창경궁 온실이 그렇듯이 순종황제를 위해 짓는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을 훼손하기 위한 일제의 수단 중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해방 이후인 1955년에 조선 왕실의 문서들을 보존하는 장서각으로 바뀌어 1961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나, 1981년에 장서각에 보존된 문서 전량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옮겨진 이후 빈 건물로 방치되었다가 1992년 11월 2일에 철거되었다. 현재 창경궁의 궁궐 권역이 그러하듯 나무가 심어져 공원처럼 꾸며진 공터다.

4 철거와 원형 복원

이후에도 창경원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계속 남게 되었지만 일제가 만든 잔재이니만큼 궁궐로 복원해야한다는 움직임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와 서울특별시에서 창경궁 복원계획 및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창경원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궁궐을 복원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과천시에 짓는 새 공원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제가 뿌려놓은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없애고 역사적 고증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아쉽게도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계획에 따라 창경원에 있던 유원지는 놀이기구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 각각 1984년과 1985년에 재개장했다. 그리고 유원지와 동물원, 식물원 터는 거의 대부분 산책로로 다시 바뀌었다.

이후의 내용은 창경궁 항목 참조.

  1. 취소선 드립과 달리 지방에도 경주월드가 있다. 놀이기구도 꽤 ㅎㄷㄷ 하다.
  2. 즉 당시 기준 사실상 대한민국 유일의 테마파크라는 이야기다.
  3. "나"이트 "체"리 블로썸 미"팅" 이다. 알몸으로 하는 게 아니라 밤 벚꽃 미팅.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창경궁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