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군대와 경찰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군인경찰(軍人警察)을 찾는다면 헌병을 참고할 것. 한국의 군경으로는 대한민국 국군과 대한민국 경찰청, 해양경비안전본부를 들 수 있다.
2 배경
군대와 경찰의 업무가 본격적으로 분할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고 그 전에는 군이 민간 치안 업무를 맡는 일이 빈번했다. 평소에는 치안을 맡다가 전시에는 군인으로 참전하는 식이었다. 이런 기질이 그대로 남은 곳이 유럽의 국가 헌병대이다.
둘의 공통점은 합법적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집단이란 것이다. 그런 탓에 계급을 도입하고 직원(사병)과 간부(장교)를 나눈다. 다만 방향이 다른데 군은 외부의 세력을 상대로 하며 경찰은 내부를 대상으로 한다. 경찰은 민간을 상대하기 때문에 민원 문제가 있으며 실무경험이 상당히 중요해 처음부터 지휘관이나 참모용으로 교육되는 장교와 달리 경찰 간부들은 순경 등 밑바닥부터 경력을 쌓아가는 식으로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영미권에나 해당되는 얘기고 한국에서는 경찰간부후보생과 경찰대학, 고시 특채로 간부를 뽑고 내부자 승진은 경위가 대부분 승진 상한선이다. 일본도 커리어조(キャリア組)가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임원가 직원 사이에 임직원 갈등이 일어나도 이를 완화할만한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
작은 섬나라나 군대 미보유국은 경찰이 군인처럼 중무장한 경우도 있다.
3 갈등
서로 같은 태생을 타고난 탓인지 군경은 갈등이 심한 사례가 많다.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군은 문민통제하고 경찰은 철저하게 경력에 입각한 시스템을 적용해 서로 충돌할 일이 없지만[1] 정치에서 무력이 중시되는 나라들에선 군경들의 갈등이 유혈사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해방공간 시절 건군기의 군과 경찰은 갈등이 심했다. 당시 경찰의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과에서 근무하던 하급 경찰들이 그대로 흡수된 상태였고 군은 장교단에는 만주군이나 일본군에서 적극 복무한 친일파가 있긴 했지만 사병의 상당수는 징병령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조선경비대나 조선해안경비대 같은 경우엔 미군정에서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군이 아니라 경찰의 예비병력이란 식으로 창설된 탓에 무장 상태가 경찰보다도 빈약했다. 이런 과정에서 우익이 절대다수였던 경찰과 숙군 전에 좌익이 꽤 있던 군은 이념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이념 문제 외에도 경찰이 군을 무시하는 일 등이 벌어져 사이가 안 좋았다. 대표적으로 영암사건이 있는데 당시 경찰은 기관총으로 군과 싸웠다. 이런 대립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잔재가 남아 있어서, 4.19 혁명 당시 계엄군이 중립을 지키며 시위대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일본 경찰과 일본군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본에선 한동안 헌병들이 치안의 일부를 담당했고 경찰은 군에게 눌린 채로 살았다. 오사카 고스톱 사건으로 군은 우세승을 확정지었고 육군성과 해군성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일본을 패망으로 몰아넣었다. GHQ가 들어서면서 미국은 경찰을 지원하는 방침을 취했고 육상자위대의 경우 수뇌부를 내무성 출신의 경찰들이 초기에 장악했다. 이들은 내무군벌(內務軍閥)이라 불렸다. 구육군 출신들로 장교단에 편입된 간부들은 내무군벌과 자위대 내에서 갈등을 벌였다. 이런 갈등은 자위대 내부 뿐만 아니라 새롭게 세워진 일본 경찰과 자위대 사이에도 나타났는데 1976년에 소련군 중위가 미그기를 타고 망명했을 때 일본 경찰은 공항을 봉쇄하고 자위대의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자위대는 텔레비전으로 상황을 지켜봐야했다.
위의 갈등과는 정도가 다르지만 한국의 군필자들 사이에선 의무경찰과 대한민국 육군 사이에 누가 빡셌냐로 병림픽이 벌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