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생긴 메달.
기념 우표.
Медаль "За освоение целинных земель"
Medal "For the Development of Virgin Lands"
처녀개간지지개간메달
1 개요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우랄, 볼가 강, 북코카서스의 처녀지를 개발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훌륭한 성적으로 크게 이바지한 노동자, 농민, 조직, 당 활동가, 콤소몰 단원 및 지회 등등...[1]에게 수여되는 메달. 1956년 10월 20일에 제정되어 1,345,520명이 받았다.
개인에게만 수여되지는 않았고 조직에게도 수여되었다. 참고로 전설은 아닌데 레전드급 우주비행사도 이 메달을 수여 받았다. 본격 우주 개간 사업
이 메달은 흐루쇼프가 주도하여 소련의 국가적 사업으로 자리매김한 처녀지 개간 사업을 독려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처녀지 개간 사업은 소련 역사상 최고의 삽질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사업이다.
2 삽질 : 처녀지 개간 사업
이오시프 스탈린의 뒤를 이어 새로이 소련의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하루 빨리 미국을 따라잡고 싶어 했다.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라는 드립까지 쳤는데 당연하지 않겠는가. 흐루쇼프는 우선 농업 생산에서 천조국의 위엄을 따라잡고 싶어했다. 물론 불가능 당시 흐루쇼프의 공약이 얼마나 허황됐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참 위엄찬 공약이었다.
공약이 레알 말도 안됨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는 정말로 공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부 카자흐스탄, 서시베리아, 북캅카스, 우랄 지역의 거대한 처녀지를 개간하면 농업 생산이 치트키를 친 듯이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는 통이 크고 화끈한 사람이었기에 그래서 축출됐지 1,200만 헥타르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처녀지 개간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계획의 골자는 이랬다.
어린이도 알기 쉬운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계획우선 소고기 생산을 늘려야 쓰겄다.
그런데 소를 키우려면 사료가 어마어마하게 필요하겠지?
그 사료는 옥수수로 때우면 된다.
근데 옥수수는 소련에서 키우기 기후가 안 맞잖아?????PROFIT!
어쨌든 흐루쇼프는 이 계획이 농업 좆망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파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국가적으로 이 사업을 팍팍 밀어줬기에 젊은 공산당원 수천명이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농사 경험도 없었고 농기구를 다룰 수도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다. 게다가 정부의 지시도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상식적인 농학자들은 이곳은 원래부터 강수량이 부족하던 지역이라 휴경을 많이 하고 파종을 늦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사이비 과학자인 트로핌 리센코는 조기 파종과 휴한기 없는 집약적 경작이라는 개소리을 계속 노래해댔다. 당연히 1년차에 그냥 좆망했으나 2년차에 공산당원들이 경험이 쌓인 모양인지 의외로 치트키(!!!)를 쳐서 풍년이 드는 사태가 일어났다. 여기서 멈추었으면 이 항목이 생겨날리도 없겠지만...
흐루쇼프는 2년차에 의외의 성공을 거두고나자 이대로라면 미국과의 체제경쟁에서 이길수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차녀지에서 생산된 곡물들을 바탕으로 겨우 3~4년 안에 소련의 버터, 우유, 육류 1인당 생산량에서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당시 소련으로써는 도저히 지킬수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당연하겠지만 축산 관련 전문가나 농민들, 관료들은 육류생산량을 급속히 늘리기 어렵다는걸 알고있었기에 진작에 이 약속을 지킬수없을것이라고 봤으며 인민들도 반신반의했지만 흐루쇼프는 정말로 지킬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다(...) 여하튼 육류생산증산작업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흐루쇼프는 국가에 판매한 육류의 량을 세 배인 15만톤으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지킨 라쟌 지역의 당 제1서기 알렉세이 라리오노프를 사회주의노력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물론 이건 개구라였다. 그는 장부상 수치를 부풀리기 위하여 종자용 가축과 젖소를 도축장으로 보내고 농민들에게 소를 사서 되팔고 또다시 매입해서 목표를 달성했다. 라리오노프는 죄책감에 못 이겨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이런 비극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흐루쇼프는 방미중에 옥수수 농장을 방문해서 감명을 받았고 옥수수가 따듯한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작물인걸 간과한채 소련에 옥수수를 심겠다고 나서면서 삽질이 추가되었다. 거기에다가 때 마침 가뭄까지 겹쳤고, 더군다나 트로핌 리센코의 조기 파종과 휴한 없는 정책은 엄청난 잡초 번식을 초래했다. 그런데 그 많은 잡초들을 박멸하기에는 소련의 제초제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소련에서는 잡초가 제초제를 죽입니다! 게다가 전문가들이 경고했듯이 가뭄으로 카자흐 처녀지의 표토가 죄다 말라 붙었고, 이 지역의 특징인 강한 바람이 그 말라 붙은 표토를 멀리 멀리 날려버려 600만 헥타르의 토지가 황폐화되었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흐루쇼프의 비장의 카드인 옥수수는 3400만 헥타르에 파종했으나 1/5에도 못 미치는 640만 헥타르에서 밖에 수확할 수 없었다. 패왕의 작물 옥수수를 재배하려고 하다니 건방진 흐루쇼프그야말로 총체적 난관. 아무리 근성의 공산주의도 기후와 자연에 깝치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옥수수 경작 등의 삽질로 원래 소 사료로 애용되던 건초용 목초 수확량은 처참했다. 거기에다가 종자용 가축까지 먹어치웠으니 육류생산량과 우유와 치즈등 낙농품 생산량도 다시 급감하여 결국 미국 생산량을 뛰어 넘겠다던 낙농과 육류의 가격은 3분의 1이나 폭등하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북캅카스[2]의 노보체르카스크의 노동자들은 "흐루쇼프를 갈기갈기 찢어 소세지로 만들자!"라고 외치면서 지역 당 본부로 행진을 벌였다. 이 행진을 잘 보기 위하여 아이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상황이었는데 중요한 건 군대가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아 버린 것. 그 때문에 아이들은 의도찮게 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여하튼 이때의 흉작으로 소련은 모양 구겨지게 미국이나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지로부터 곡물을 대량으로 수입해야했고, 거기에다가 쿠바 미사일사건에서 모양구겨지게 대응하는 바람에 인민들의 지지도 크게 약해지고 자연히 당내에서 흐루쇼프에 대한 입지도 약해져 흐루쇼프는 결국 1964년에 실각하게 된다.
다만 영향이 없던건 아니라서 처녀지개간으로 다수의 러시아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기때문에 카자흐스탄에 한 동안 러시아인이 카자흐족을 제치고 제1의 민족집단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우랄과 시베리아 등지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래도 시베리아 지역의 인구밀도는 평방킬로미터당 3명도 채 안되는 수치지만
브라이언 모이나한은 이 사건을 평하면서 "소련 체제는 확실히 땅에서보다 우주에서 더 잘 나갔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