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원삼국시대 때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라고 추정되는 국가.
자세한 연혁은 모르지만, 멸망 과정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일화로 유명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낙랑공주가 고구려의 왕자를 사랑한 나머지 전쟁 경보체계로 추정하는 자명고를 찢었다. 끝내 태만하던 낙랑국의 군사들은 고구려에게 참살을 겪고, 낙랑왕 최리는 공주를 제 손으로 죽이며 자신은 항복했다.
위치나 이름 때문에 한사군의 낙랑군과 다른지 논란이 있다.
사서에는 고구려 대무신왕 때 호동왕자를 보내 '낙랑국'을 멸망시켰다고 했으며 낙랑국왕을 '최리'라 했다.
고전적인 시각은 최씨 낙랑국 = 낙랑군으로, 이병도 등도 이 설을 따랐다.
2 학설
2.1 낙랑국 낙랑군 별개설
만화 바람의 나라가 채용한 설. 고대 중국에서 각지에 번군을 세운 적은 많아도 그 번군의 수장을 '왕'이라 칭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1] 낙랑군 태수들 가운데 최리라는 이름의 사람도 없었으니, 낙랑군이 아닌 다른 나라로 봐야 맞는다는 설이다.
이 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인 신채호는 낙랑군과 낙랑국을 같게 본 잘못이 다음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상고사에는 '평양 부근을 낙랑이라 불렀으며, 서한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진번, 임둔, 낙랑, 현토 등의 지역을 공격하고 병합하여 그 자리에 각각 진번군, 임둔군, 낙랑군, 현토군을 만들 계획이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하지만 각 지역을 병탄하기 위한 병사들은 모두 동명왕에게 패퇴해 결국 그 땅에 4군을 설치하진 못하고 번조선이 있던 자리에 지리멸렬하게 현토군,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을 세워 자기만족했다'라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신채호 개인의 주장을 마치 사실처럼 말하였다는 사료적 비판이 있으며, 실제로도 신채호의 주장은 고고학적이나 문헌상 근거가 사실상 없다. 더구나 이 설은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시각아래 세웠으나, 고고학적으로 평양에서 중국의 유물이 나오면서 폐기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낙랑을 공격 했을때는 고구려는 아직 약소 국가였고 또한 한의 지도자 였던 유수는 사실상 한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인데
이 시기에 고구려가 한나라의 군을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이 있다.
2.2 절충설
경북대학교의 주보돈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절충적 가설을 주장하였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엄연히 다른 정치집단이었다. 하지만 그 위치는 모두 평양 부근이었으며, 아마 둘이 공존했을 것이다." 아래에서 언급하듯이 삼국사기 대무신왕조에서는 낙랑국 점령의 기사가 낙랑 점령의 기사보다 5년 일찍 별개의 기사로 나온다. 낙랑군과 낙랑국이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러한 문제나 낙랑 태수중에 보이지 않는 '최리'라는 이름 등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낙랑군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 국가 체계도 정비한 나라가 중국 기록에 전혀 안 나온다는 점을 풀어야 하는 난점이 있다. 낙랑군의 바로 옆이라는 점 때문에 이 문제가 두드러지지만, 사실 낙랑군의 바로 옆이 아니라도 같은 문제가 있다. 중국측 기록에 마한에 속하는 작은 나라의 이름들까지 나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단순히 한반도에 관심이 적었다거나 거리가 멀어서 교류가 없어서라고 하기는 어려워서다. 그러므로 이 가설이 옳더라도 아마 그다지 오래 존속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추정한다.
신라사 전공이라는 점에서도 마이너스를 받고 있다.
2.3 독립설(기존설 옹호 근거)
기존설의 지지자들은 외방의 군에 살던 토착주민들이, 기존의 군 체제를 빼앗아 독립하여 최리를 "왕"으로 내세웠다라 가정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낙랑국을 기록한 대무신왕 시대에 중국은 왕망의 신나라가 실정을 거듭해서 혼란기였으니, 중앙 권력이 없을 때 낙랑군과 같은 외지의 군이 독립하고 왕국을 자칭하는 일은 개연성이 있다.
원래 한나라의 군국제 체계에서 중앙에서 파견한 태수가 다스리는 군(郡)과 왕의 영지인 국(國)은 "봉헌한 왕이 있는가?/행정관이 태수인가? 국상인가?"라는 차이를 빼면 거의 같은 행정체계이다. 실제로 한대의 금석문에서 군을 국으로 적은 예는 많다.# 특히 태수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함께 가지니 중앙권력이 무너진 혼란기에 가장 큰 이점을 얻는다. 어차피 전후한 교체기에는 "황제"를 자칭한 지방 군벌도 많았으니, 낙랑만큼 본토에서 먼 곳에 "낙랑국왕"을 자칭한 독립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여기에서 미천왕 때는 한사군 중의 낙랑군을 병합해, 만약 이 둘이 같다면 낙랑은 2번 멸망해 모순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27년)의 기사에
27년(서기 44) 가을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 |
라 적었으니 미천왕 시대에 멸망한 낙랑군=광무제가 재설치한 낙랑군이라고 보면 기록상의 오류는 없다.
즉, "이전의 낙랑군→독립해서 최씨낙랑국→고구려에 멸망→광무제의 재정벌과 재설치→미천왕 때 비로소 멸망"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논리면 백제 온조왕과 근초고왕 때 각각 멸망시킨 마한[2], 대무신왕 시기부터 광개토대왕 시기까지 도대체 몇 번을 발렸나 모르는 부여 등도 있다. '멸망한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네염' 또는 '멸망에 준하는 타격을 주었으니 이 쯤이면 멸망한 것으로 친다'라는 논리일 수 있다. 애초에 복속이라는 말이 멸망일 때도, 그냥 깨갱일 때도 있어서...
사실 광무제의 낙랑 정벌을 어떻게 볼지는 기존의 설인 '독립설'에서도 애매하다. 중국 기록에서 광무제의 낙랑 정벌은 낙랑 안의 '왕조'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낙랑태수를 죽이고 독립한 탓이며, 서기 30년의 일이니 시간적으로도 14년이나 차이가 난다. 만약 모든 기록을 그냥 긍정하는 상태로 취합한다면
낙랑군→왕조가 반란을 일으켜 낙랑태수를 자처→광무제의 정벌(AD 30)→(아마도) 최리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자처→대무신왕의 낙랑 점령(AD 37)[3]→광무제의 재정벌(AD 44)→미천왕 때 멸망
이라서 정신없는 시간표이다. 또한 최리의 반란, 대무신왕의 낙랑 함락, 44년의 광무제의 재정벌 등은 중국 기록에 없고, 미묘하게도 삼국사기는 낙랑국을 서기 32년[4]부터 처음 말한다. 관련 기록들의 의문[5]을 어떻게 다룰 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 ↑ 다만 삼국사기 백제 분서왕은 대방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 ↑ 보통 이럴 때는 온조왕의 마한은 경기도 지역의 목지국, 근초고왕의 마한은 영산강 지역의 잔당세력으로 추정한다. 애초에 온조 시기는 목지국과 붙기 시작한 정도이고, 고이왕 시기에 정말 목지국이 망했으며, 근초고왕 시기에 잔당 처리를 끝냈다는 학설도 유력하다.
- ↑ 이 부분도 사실은 더 복잡하다. '낙랑 점령'은 37년의 일이지만 32년에 또 '낙랑국 점령'의 기사가 있다.
- ↑ 중국에서 기록한 광무제의 정벌 직후
- ↑ 광무제의 2차례 정벌이 사실 같은 사건인데 기록 과정에서 시간적으로 오차가 났나, 또는 서로 다른 사건인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