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민(축구)

이름최정민 (崔貞敏 / Choi Chung-Min)
국적대한민국
출생1930년 8월 30일
사망1983년 12월 8일
출신지평안남도 대동군
포지션공격수
선수시절 소속팀특무부대 축구단
감독양지 축구단 (1966~1969)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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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나 경평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4 후퇴로 남하한 뒤 CIC 축구단에 합류한 뒤, 김용식의 발탁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10여년간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별명은 아시아의 황금발.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예선에서 최초의 한일전이 성사되었다. 이승만은 이 경기를 불허할 작정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전 이후라 신예를 양성하지 못해 노장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일본에게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광복이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선수들을 입국시키는 것도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홈경기에서 패배를 한다면 설상가상이었다. 이 때, 재일교포 유력자들이 민족 그리고 재일교포들의 사기를 상기시켰고 이유형 감독은 두 경기 모두 원정으로 치러도 상관없고 패배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면서 간청했다. 이에 이승만의 허락이 떨어졌고,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 장택상마저 선수들을 모두 자택에 불러모아 "패배한다면 현해탄을 건너지 않고, 고기밥이 되어도 상관없느냐?"라고 당부했다. 이에 선수들은 모두 동의하고 독한 마음을 먹고 일본 원정길을 떠난다. 일본은 서류의 누락을 이유로 입국을 미루며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최정민은 한국 축구 최초의 한일전 원정 두 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1] 을 1승 1무로 이끌어 일본으로부터 스위스행 비행기표를 빼앗아왔다.

허나, 본선에서는 스코어가 엄청나게 벌어지는 참패만 맛보고 돌아오고 마는데 이 당시의 한국은 세계 최빈국급 국가로 제대로 된 세계대회 경험이 전혀 없었다. 양복조차도 외상으로 맞춰입은[2] 대표팀은 미군의 수송기를 타고 일본 하네다로 향했으나 경험이 없고 행정력이 미숙한 나머지 우왕좌왕하며 며칠을 허비하다가 겨우 스위스행 비행기가 있다는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 다시 스위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비행기표를 제대로 못 구해서 한날 한시에 같이 이동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코치진의 좌석은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는 영국 여행객 부부의 호의에 기대서 양보받았다.) 방콕에서도 스위스 직항이 아니라 캘커타 경유였다. 경기 이틀 전 그것도 밤 10시에 도착한 대표팀은 숙소를 예약했을 리도 없고, 스위스 축구협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숙소를 잡게 되었다. 그나마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 주무가 있을 리 없는 선수단은 축구화와 유니폼 준비 등으로 분주했다. 당연히 시차고 여독이고 피로가 풀렸을 리도 없는 대표팀은 당시 세계 최강의 팀 중 하나였던 헝가리와의 1차전에서 후반전 시작 후, 얼마 못 가서 탈진해서 쓰러지는 선수가 속출했고, 결국 2차전은 2군을 내보내고 만다. 이 때 선수단은 6.25 전쟁의 영향으로 너무나 당연하게도 후배들을 양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하던 노장급의 30대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으며 40대 선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참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으나, 위엄차게 아시아 무대를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 56년 1회 홍콩 아시안컵, 60년 2회 아시안컵을 2연패하고, 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 58년 동경 아시안 게임 두 대회에서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고[3] 아시아의 호랑이로서 명성을 드날렸으며, 최정민도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서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1960년 이후, 아직까지도 AFC 아시안컵을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주무기는 178cm의, 당시로서는 큰 키와[4]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한일전에 강해서 한일전에만 무려 6골을 넣었던 기록을 갖고 있으며, 이는 한일전 역사상 최고의 골기록이기도 하다.

이후 대한민국의 스트라이커 계보는 최정민부터 시작으로 이회택-차범근-최순호-황선홍(김주성)-김도훈-최용수-안정환(이동국)-박주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은퇴 이후, 66년에서 69년 사이에는 전설적인 축구팀(경기 내적이든 외적이든)인 양지의 감독을 맡았으며, 77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특히 83년에는 전국체육대회 이북5도 대표팀 감독을 맡은 가운데 지병으로 입원 중이었음에도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서 선수들을 독려한 일화도 있다. 결국, 1983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 6골로 차범근과 함께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서 이 부문 최다 권위자이다.
  2. 그런데 당시 국내 양복점이라 품질이 똥같은 나머지 장시간 비행에 단복이 망가져서 유럽 기자단의 조롱을 받았다.
  3. 우승은 2차례 다 대만이 차지했다.
  4. 당시로서는 최장신급이었다. 10년이 넘는 후배인 국가대표 중앙 수비수들인 김호와 김정남도 비슷한 신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