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수

1 대한민국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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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K리그 신인상
정광석(대우 로얄즈)최용수(LG 치타스)노상래(전남 드래곤즈)
1999년 FA컵 득점상
김종건(울산 현대 호랑이)최용수(안양 LG 치타스)세자르(전남 드래곤즈)
2000년 K리그 MVP
안정환(부산 대우 로얄즈)최용수(안양 LG 치타스)신태용(성남 일화 천마)
2012년 K리그 감독상
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최용수(FC 서울)황선홍(포항 스틸러스)
FC 서울 역대 감독
황보관
(2011)
최용수
(2012~2016)[1]
황선홍
(2016~)
2000 K리그 베스트 일레븐
FW
최용수
FW
김도훈
MF
안드레
MF
신태용
MF
전경준
MF
데니스
DF
강철
DF
이임생
DF
김현수
DF
마시엘
GK
신의손

1.1 개요

장쑤 쑤닝 감독
최용수(崔龍洙 / Choi Yong-Soo)
생년월일1973년 9월 10일[2]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부산광역시
포지션스트라이커
신체조건184cm
소속팀LG 치타스 (1994~1995)
안양 LG 치타스 (1996~2000)
상무 (군복무) (1997~1998)
제프 유나이티드 (2001~2003)
교토 상가 (2004)
주빌로 이와타 (2005)
FC 서울 (2006)
지도자FC 서울 플레잉 코치 (2006)
FC 서울 코치 (2006~2010)
FC 서울 수석코치 (2010~2011)
FC 서울 감독대행 (2011)
FC 서울 감독 (2012~2016)
장쑤 쑤닝 감독 (2016~)
국가대표69경기 27골
종교개신교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 1998, 2002 월드컵 대표. A매치 69경기 27골.
등번호 10번. 훗날 11번으로 교체.

지도자로서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

K리그 우승 1회(2012)
FA컵 우승 1회(2015)
AFC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1회(2013)
2012 K리그 감독상 수상
2013 AFC 올해의 감독상 수상

1.2 선수 경력

독수리

동래고등학교[3] -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1994년 LG 치타스 입단 후 신인상을 거머쥐고 1997년 상무에 입단, 1999년에 다시 안양 LG로 복귀하였다. 2000년 LG의 우승에 크게 공헌하며 그해 MVP를 차지하였다. 그야말로 FC 서울의 레전드.

그런데 현재와 같은 유명세와는 달리, 아마추어 시절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연세대 3학년 시절에 겨우 주전을 따낼 정도였다. 청대에는 연세대 4학년 때 입성. 1995년 좋은 피지컬을 가진 선수를 좋아하는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의 특성으로 올림픽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은 당시 역대 어느 때보다도 메달권 진입에 대한 기대를 높였고, 윤정환과 함께 올대의 중심선수로 활약했다.[4] 1차 지역 예선에서 홍콩과 인도네시아를 가볍게 쌈 싸먹고, 최종예선 조별리그의 사우디, 중국 전에서 어시스트 한개로 그쳤으나 준결승 이라크 전에서 혼자 두골을 뽑아내고 결승전에서 페널티킥까지 성공시켰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코너킥 아주 잘 찼어"그러나 본선 와일드 카드로 나온 황선홍에 밀렸는지 1차전 가나 전에는 결장했다. 멕시코, 이탈리아 전에서 출장했으나 공격포인트를 올리지는 못하고 한국도 8강 진출에 실패했다. 여담으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 훗날 아챔에서 광저우 에버그란데의 감독으로 만날 파비오 칸나바로와 이 때 선수로 만났다.

국가대표팀에 차범근 감독이 출범한 이후, 피지컬이 좋은 선수를 선호하는 차감독의 특성으로 최용수를 코리아컵에 시험삼아 기용하게 된다. 이 시도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결국 최용수는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대륙 예선에서 주전 원톱으로 낙점되게 된다. 1997년은 최용수 축구 인생의 리즈시절로 기억된다. 월드컵 지역 예선 홍콩 전 해트트릭을 시작으로, 최종예선 카자흐스탄 전 4골, 우즈베키스탄 전 3골, 일본 전 2어시스트로 7골 2어시스트를 몰아치며 바야흐로 최용수 시대를 여는가 했다. 그때 당시 활약상 실제로 월드컵 전까지도 상당했다. 체코와의 평가전 하이라이트 그러나 이 다음 시합에서 투톱 파트너인 황선홍이 중국전에서 소림축구의 희생을 당하는 부상을 입었고, 최용수 본인도 본선 첫 경기인 멕시코 전에서 결장했다. 이후 네덜란드 전과 벨기에 전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지는 못한다.[5] 이후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조별 예선부터 8강 쿠웨이트 전까지 팀 내 최다 골인 7골을 넣으며 공격진을 책임졌으나 8강에서 2명이나 퇴장 당한 태국에게 2-1로 덜미를 잡혀 빛이 바랬다.

1999년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고 김도근과 같이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낚시였다.(...) 분명히 입단 테스트랑 메디컬 테스트까지는 받았는데 왠지 모르게 컴백. 본인도 왜 그 때 입단을 못한건지 영문을 모르고 있다.(...)[6][7] 99년 중반에 군복무를 끝내고 안양LG로 돌아와 FA컵에서 우승을 이끌었다.

2000년 K리그에서 득점 2위 어시 1위를 하며 만장일치로 리그 MVP를 따낸다. 이때 당시 팀원이었던 이영표의 증언에 의하면 '무조건 용수한테 공을 보내!'가 전략이었다 한다.

파일:Attachment/Choi Yong-Soo JEF United Ichihara.jpg

2001년 당시 한국선수 최고 금액인 3억 원에 제프 유나이티드로 옮겨 이적 첫해에 득점 2위를 기록하였고, 올스타 선정. 이때 당시 본인의 인터뷰 등을 보면 초반에 전혀 패스가 안 오는 등 심리적으로 팀원들이 많이 서먹했던 듯했으나 비 오는 날 첫 골을 넣은 뒤 그런 거 없어졌다고 했다. 영상을 보나 실적으로 보나 최용수 중심으로 모든공격을 펼쳤다. 2002년에는 J리그 8천번째 골을 넣는 등 활약을 펼쳤다. 이때 월드컵이 끝나고한풀이4경기에서 6골을 넣는 등 득점력이 발군에 가까웠으나 문제는 이미 그리도 그리던 한일월드컵은 끝났다는 거... 골 감각이 절정에 달해있는데 왜 월드컵이 끝나니 ㅠㅠ망할 놈의 프랑스 놈들 그때 다치지만 않았으면 2003년에서도 팀내 6-7할에 가까운 골을 넣으며 제프 이치하라의 3년간 에이스로 군림했다. 이때 개막전에 골을 넣고 다음 시합과 그 다음 시합에 해트트릭을 기록해 이 달의 아시아 선수에도 뽑혔다. 니코니코동화에서도 제프의 시합 등에서 오래 전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최용수보다 존재감 넘치는 포워드는 거의 없다.", "한국은 최용수 이후로 이렇다 할 포워드가 없지."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어째 평가가 한국보다 일본이 훨씬 높게 치는것 같은데?

2004 교토 상가에 1년간 임대되었다. 도중에 부상이 있기는 했으나 주장도 겸임할 만큼 많은 신뢰를 받고 많은 골을 넣었으나 팀이 6위로 승격하지 못해 아쉬운 한 해였다. 2005년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했으나 부상과 부진으로 15경기 1골이라는 실망스런 성적을 남겼다. 2006년 FC 서울의 플레잉 코치로 활약하다 같은 해 8월 5일 FC 도쿄와의 친선 시합에서 은퇴하였다.

페널티 에이리어 안에서 발군의 파괴력을 보이는 선수였다. 1990년대 대한민국 정상급 스트라이커들이 그렇듯 아시아권에서는 압도적인 제공권을 보였으며, 강력한 슈팅력을 보유했다. 이 때문에 독수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독종 소리를 들을 정도로 승부 근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J리그 진출 당시 사무라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만년 중하위권을 맴돌던 제프 유나이티드는 최용수 버프를 톡톡히 받아 일약 3위까지 뛰어올랐다.

플레이 스타일은 과감한 몸싸움과 포스트플레이를 펼치는 전형적인 파워형 스트라이커로, 1998년 FIFA 월드컵에서는 아시아 예선 최다 득점을 기록하였다. 당시 세계 골게터 9위에 오를 정도로 월드컵 예선을 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최용수를 칭찬했고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그에 대한 기대도 남달랐다. 다만 같은 시기 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 경쟁자였던 황선홍이나 김도훈에 비해서 에이리어 밖에서 움직임이 단조롭다는 단점이 있었다. 또한 플레이 기복이 심한 편이라, 되는 날에는 언터처블이었지만 안 되는 날엔 완전히 버로우를 하는 문제도 있었다.[8]

결국 미드필더에서 양질의 패스[9]를 넣어줘야 비로서 최용수의 득점력이 산다는 제약과 더불어, 세계적 강호를 상대로는 공격수를 한 명을 내려 허리를 두텁게 세우는 수밖에 없다는 전술적 한계까지 겹쳐 최전방에서 혼자 무기력하게 겉도는 경우가 잦았다.[10] 자연스럽게 팬들에겐 국내용이란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게 되었다.[11] 결국 커리어의 정점에서 출전한 1998 월드컵 본선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첫경기인 멕시코 전 때 김도훈이 쥐가 나서 다리에 한방 침을 맞아가며 풀타임을 뛰는데도 이미 에이스 취급을 받던 최용수를 아예 투입하지 않아 차범근 감독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고, 두번째 경기인 네덜란드 전은 출전하긴했지만 누구 하나 못했다고 할 수 없을 수준으로 0:5로 탈탈 털린 경기(...). 그리고 대망의 예선 마지막 경기였던 벨기에전에서는 결정적인 찬스 2번(노마크 헤딩 찬스와 각이 제법 열린 1:1찬스)를 날려먹으며 지탄을 받았다. 당시 벨기에 전 끝나고 인터뷰도 거부하고 혼자 숙소에서 씩씩대고 있으니까 당시 끗발이 있던 신문선이 방송을 위해 숙소 문 앞에서 '최용수'라고 나지막히 부르니 문을 열어주던 모습이 생방송을 타기도 했다. 여하간 98월드컵으로 한국 축구의 에이스이자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을 적자로 평가 받던 최용수는 실망감만 안겨주고 그렇게 잊혀져 갔다. 특히 당시는 황선홍, 김도훈, 이동국 등 쟁쟁하고 비슷한 유형의 공격수가 넘쳐나던 시절이라 급속도로 자리를 잃어갔다.

2002년 월드컵에서도 뛰었으나, 이미 절정기가 지난 상태라 이렇다 할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조별리그 미국전에서 노마크 1m 거리에서 골대 위로 독수리슛을 날리는 바람에 폭풍같이 까였다. 절묘한 패스를 넣어줬던 이을용이 슛이 빗나가는 순간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장면이 백미. 해당 장면. 사실 이을용이 바로 찔러주지 않고 잠깐 끄는 바람에 수비 압박이 들어왔고 패스가 로빙으로 와서 차기 힘들었다고는 해도... 직업이 축구선수에 국대 스트라이커로서는 부끄러운 슈팅이었다. 다만 당시 골반 근육이 찢어져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이을용을 만나 그 얘기만 나오면 서로 탓을 하며 싸운다고 한다

안 그래도 2002년 국대에서는 안정환 - 황선홍에 이은 3번째 스트라이커인데다가 팀이 원톱을 쓰는 바람에 출전기회도 별로 없었는데 저런 실수까지 저질러서...미국전 이후 히딩크 감독이 선수단 전원 휴식을 취하게 해도 혼자서 연습했다지만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16강 이탈리아전에는 후반 역전을 노리고 공격수만 5명을 세웠는데 차두리에게까지 밀려서 나오지 못할 정도였으니 뭐.

월드컵 이후에도, 국대 경기에 간혹 주전으로 나왔었는데, 코엘류 시절 콜롬비아 일본전 우루과이 전부 선발로 나왔으나 당시 지나치게 비대해져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중이었던 붉은 악마 중 일부는 국내에서의 A매치시에 저 월드컵 때의 일을 빌미로 최용수가 공만 잡으면 야유를 보내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도중 2003년 1회 동아시아컵 때 엔트리에 뽑혔으나 중국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보는 날은 없게 되었다. 동아시아컵을 마지막으로 최용수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1998 월드컵 당시 역대 최약체로 평가받던 대표팀을 훌륭히 본선으로 이끌었던 공로에도 불구하고 2002 월드컵의 영광의 그림자였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선수이다. 하지만 선수시절 상대를 죽일 듯한 포스와 높은 제공권으로 기억되는 팬도 많다. 실제로 감독 시절 황선홍과 자주 부각되며 국대에서의 활약 또한 모두가 잊었다고 하기엔 기억하는 사람 또한 많다.

현역 때는 일본에서 가장 부러워하고[12] 무서워했던 공격수로 통했다. J리그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고[13] 95다이너스티컵에서 홍콩전 외에는 최용수는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음에도 직접 대결 시 공격진에 제일 경계해야할 선수라 하면서 패스만 보내면 일본측 중계석에서 최용수만 불러대는게 어떤 의미에서는 웃기다.그러나 이건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일본의 컴플렉스 덩어리같은 선수인지라[14][15] 일본이 부러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2000년 겨울 친선전에서도 "드디어 그 최용수가 돌아왔습니다" 라고 할 정도였다. 선호하는 배번은 10번으로 소속팀에서나 국대에서나 별 일없으면 항상 10번을 달고 뛰었다. 다만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11번을 달았다.(당시 10번은 이영표가 달았다.) 이후로도 2003년 콜롬비아 전을 제외하고 잠시 10번을 달았으나 은퇴할 때까지 11번으로 고정 되었다. 교토시절 21번, 이와타 시절 16번, FC서울에서 은퇴할 때는 11번을 달았다.

1.3 지도자 경력

2007년 FC 서울에서 현역 은퇴 이후 계속 코치로 일하고 있다가 2011년 황보관 감독의 자진 사임으로 인해 감독 대행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취임 초기부터 짤방 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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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YYYYYYYYYY-!!!!!!!!!!!!!!!!!!!!!!!!!!!!!

취임 이후 5경기에서 4승1무. 일명 형님 리더쉽으로 이전까지 무기력하던 FC 서울을 완전히 바꿔놨다. 과연 이 기세 그대로 살려 감독대행으로 부임 첫 해 대박을 낸 신태용 성남 일화 감독의 코스를 밟을 수 있을 지 기대가 된다.

결국 팀을 리그 3위까지 끌어올리며 시즌을 마감. 플레이오프에서 울산에게 패하며 탈락했지만 시즌 초반 리그 최하위까지 쳐지던 팀을 다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을만 하다.

하지만 최용수를 다음 시즌에 정식감독으로 선임하는것에 대해서는 팬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렸는데, 반대측은 팀이 전술적으로 부족하다라는 이유를 댔다. 최용수 감독대행 이후 연승을 거두며 순위를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경기 내용에서는 답답하거나 밀리는 경기들이 많았고, 그런 경기들을 간신히 골을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이겨왔다. 결과적으로 데얀 의존도가 지나치게 심해졌다는건 큰 문제다. 때문에 최용수 감독대행은 경험을 위해 연수를 보내고 해외의 유명 감독을 데려와야한다는 것. 찬성하는 팬들은 무너졌던 팀 분위기를 다시 살리고 순위를 끌어올린만큼 시즌 초반부터 팀을 만들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12월 9일, FC 서울의 10대 감독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감독이면서도 권위를 내새우기보단 선수들과 어울릴 줄 알고 스스럼없이 선수들을 대하고, 선수들과 함께 기뻐하며 그 누구보다도 안되는 점을 아쉬워하는걸 표현한다. 하지만 경상도 사나이답게 금방 정색하는것이 최용수의 매력.

1.3.1 2012년

2012년 K리그가 본격적인 승강제를 치루면서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 우승 경쟁이 한층 치열해졌다.

시즌 초반 수원이 무섭게 1위를 질주하는가 싶었으나 결국 서울에게 덜미를 잡혔고, 결국 30라운드를 마치고 리그 1위 성적으로 상위 그룹에 편성되었다. 31라운를 마친 결과 2위 전북과 승점 5점, 3위 울산과 승점 11점 차이로 한발 앞서나가고 있다. 신임 감독 치고는 정말 잘 나가고 있는 중. 그리고 11월 21일 제주 유나이티드를 1대 0으로 누르고 잔여 3경기 관계에 상관없이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로써 최용수는 K리그 최초로 단일 클럽에서 선수, 코치, 그리고 감독으로서 우승을 경험한 역사를 새로이 쓰게 된다. 이로써 그의 형님 리더쉽은 다시 한번 주목받는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FC서울 팬덤 내부에서조차 감독으로서 역량에 대한 의문이 불거져나왔다.
우선 최대 라이벌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대한 징크스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세제믿윤수원에 연거푸 졌다고 팬들이 버스를 가로막고 청문회감독과 면담을 요구하는 진풍경이 나오기도 했다. FC서울에 호의를 보이지 않는 디시 국축갤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북패에 이은 눕패라고 디스했다

또한 황보관 감독 사임 이후 흐트러진 팀 분위기를 다잡고 귀네슈-빙가다로 이어지는 FC서울의 팀 컬러에 섣불리 손대지 않은 점은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게 문제였다. 즉 전임 감독의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할 뿐 자신만의 비전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특히 리그 막판 우승을 확정하고 43라운드 포항 원정에서 아무리 주전 멤버를 뺐고 시합에 임했다고 하지만 0:5로 참패하는 수모를 당하면서 데몰리션 콤비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지적이 나왔다.

여기에 한가지 더 지적해야 할 점은 스플릿 시스템 때문에 44경기로 늘어난 살인적인 리그 일정과 더하여 아챔이라는 변수를 대하는 감독들의 선택이다. 먼저 강력한 우승 경쟁자였던 울산은 후반기 리그 우승 포기를 선언하고 아챔에 올인했으며, 전북은 노장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에 차출되며 이흥실 코치가 감독대행 체제로 이끌고 있었으나 리그와 아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치고 말았다. 결국 김호곤 감독은 아챔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전북은 리그와 아챔에 개근하다시피한 에이스 이동국이 9월에 퍼져버리며 팀도 동력을 잃는 것으로 희비가 엇갈렸다.
반면 FC서울은 아챔을 뛰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아챔에 참가하지 못한 수원이 봄철 오버 페이스를 한 나머지 여름부터 고꾸라지면서, 최용수 감독의 운영 능력보다 상대팀 감독들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갈린 점이 크다. 이번 우승으로 2013 시즌 아챔 참가권을 획득한만큼 본격적인 검증은 다음해라고 보는 편이 옳다.

1.3.2 2013년

2013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최용수 감독은 K리그 클래식 2연패와 2013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모두 차지해 더블 우승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디펜딩 챔피언답지 않게 겨울 이적시장에서 군입대, 다른 팀으로 이적한 선수들에 대해 제대로 보강하지 않아서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고 시즌을 시작했다.

서울이 2011년과 비슷한 추세로 아챔에서는 선전했지만, K리그 클래식에서는 포항과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인천, 부산, 경남, 울산, 수원, 성남을 상대로 초반 7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해, 서울까들에게 하위 스플릿으로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비웃음을 들어야 했다. 분노한 서울팬들은 그를 경질시키고 귀네슈 감독을 모셔오라는 등 시즌 전 보다 더 까였다.

참고로 2011년부터 계속해서 보인 선수 로테이션을 거의 하지 않는 단조로운 전술이 2013 시즌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나마 지난 2012년의 경우 전시즌 플레이오프 광탈로 인해 아챔 진출권도 없었고, FA컵도 지긋지긋한 그놈들에게 일찌감치 져서 리그 일정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에 베스트11 복붙의 문제점이 표면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리그+FA컵+아챔을 모두 소화하는 2013시즌 빡빡한 일정을 거치면서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문제가 폭발한 셈이다.

결국 금강불괴 같아 보였던 데얀이나 하대성 같은 선수들이 하나둘 부상에 시달리고 있다. 선수들의 체력고갈로 인한 폼 저하가 가장 큰 문제였기에 그 더운 여름에도 베스트 11을 주야장천 굴리던 최용수 감독의 책임이 크다.

이처럼 로테이션 없이 경기 운영을 한 결과 당장 주전들은 지쳐서 폼이 떨어지고, 가뜩이나 '슬슬 한물 간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던 몰리나는 FC서울 팬들조차 '몰레기'라고 까며 내년 계약 연장할 필요 없이 중국에 팔아버리라고 이를 갈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FC서울은 10년 넘게 재능 있는 새싹들을 일찌감치 유스에 끌어모으면서 젊은 선수층이 두터운 팀인데, 막상 경기는 뛰는 놈만 뛰니 이런 젊은 선수들이 성장을 못하고 줄곳 정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마디로 싹수를 봤을 때는 제2의 기성용, 박주영, 이청용을 노려볼만한 재목은 수두룩한데, 키워내지를 못하고 만년 그냥 유망주로 묻어버리고 있다.
당장 리그의 트랜드가 긴축재정과 고액영입 대신 유망주 키워서 쓰기로 흘러가고 있고, 특히 포항 스틸러스가 잇단 유스출신 대박을 내면서 좋은 본보기가 되는 마당에 정작 감독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팬들로서는 유망주를 모아왔는데 왜 써먹지를 못하니 하며 복장이 터질 노릇. 더구나 모기업 GS의 자금사정 악화로 인해 2014 시즌은 데몰리션 없이 시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주전과 백업 격차가 크단 점은 마이너스 요소이다. 또한 단순한 전술 역시 까이고 있다.

그나마 지긋지긋한 수원전 징크스를 깨뜨린 게 다행이지만, 부산으로 옮긴 세제믿윤에게 변함없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
[[파일:/image/260/2013/03/18/153308710_%25C0%25B1%25BC%25BA%25C8%25BF%25BA%25CE%25C0%25FB.jpg]]
덕분에 성효부적까지 나왔다(...)

결국 FA컵에서는 부산에게 패해 8강 탈락했다.
리그에서는 초반 부진을 딛고 차곡차곡 승점을 따내며 무사히 상위권에 안착했다. 결국 최종 성적은 4위.
그리고 대망의 아챔은 종합 스코어 3:3,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광저우 헝다에게 우승컵을 내주고만다. 자세한 내용은 AFC 챔피언스 리그/2013년 참조.

결국 이때를 기점으로 종신감독 드립이 흥하기 시작했다. 아챔 결승전은 객관적 전력을 봤을 때 서울이 조금 밀린다는 평을 받긴 했으나, 그래도 한번 해볼만하다는 쪽으로 팬들의 의견이 모였다. 그런데 스플릿과 맞물린 자비심 없는 일정이 문제였다. 9월 25일 아챔 4강전 서울 홈, 10월 2일 아챔 4강전 이란 원정, 10월 6일 리그, 10월 9일 리그 슈퍼 매치. 이처럼 해외 원정의 피로를 풀 시간도 제대로 없이 바로 리그 일정을 소화해야했고 설상가상 슈퍼 매치까지 끼어있었다. 더구나 서울이 아챔 결승에 오르면서 10월 26일 서울 홈 경기가 잡히는데, 앞선 10월 20일은 리그 우승을 노리는 울산과 경기를 치뤄야 했다.
두말 할 나위 없이 결승 1차전은 올인인만큼 사전 컨디션 조절은 필수였는데, 문제는 자존심이 걸린 슈퍼매치와 우승의 향방을 가늠할[16] 울산전 둘중 어느 쪽을 버리느냐였다. 그리고 최용수 감독의 선택은 슈퍼 매치. 덕분에 슈퍼 매치에서는 승리했지만 울산전에선 0:2로 패했다.
결승 1차전에서 아쉽게 비겼을 때 팬들은 '아예 2주동안 주전의 체력을 비축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토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승 2차전, 어렵사리 중계를 시청하던 팬들은 일제히 뒷목을 잡고 이뭐병을 외쳐야 했다. 홈에서 2:2 원정에서 1:1, 당연히 원정다득점을 생각해서 어느 순간 모험을 걸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후반 막판 수비 라인을 내리고 지킨다(...)

그리고 AFC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우승팀 광저우의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서양인이고, 최용수 감독은 아직 젊은데도 불구하고 결승까지 팀을 끌어올린 점을 인정한 결과. 서울팬들로선 울지도 웃지도 못할 지경

1.3.3 2014년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감독. 그러나 수업료가 참 비싸다.

2014 시즌은 33라운드 일정을 치른후 성적에 따라 A B 스플릿으로 나눈 뒤 5라운를 더 치뤄 팀별로 총 38라운드를 뛰게 된다.

시즌전부터 서울의 전력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가장 큰 문제는 데얀의 이적이었다. 7년간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활약하며 K리그 외국인 선수 통산 최다골, 역대 최다골 2위에 오른 레전드 데얀의 빈자리는 기존 선수진으론 메우는게 불가능했다.

데얀과 3시즌간 데몰리션 콤비를 이뤄 리그를 평정했던 리그와 아챔을 병행하며 지나치게 혹사당하고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노쇠화까지 겹쳐 13시즌 후반기부터 폼이 뚝 떨어졌다. 2014시즌 외국인 선수 가운데 연봉 1위라는 비싼 몸값때문에 처분하는 데 실패. 그리고 무릎 부상으로 전반기를 사실상 공치게 되었다. K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인 수비수라는 찬사를 받은 아디도 2013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여기에 미드필더진에서 빌드업을 책임졌던 주장 하대성마저 베이징 궈안으로 이적하면서, FW-MF-DF 세 라인에서 핵심 선수가 고스란히 팀을 이탈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남아있는 네임드는 차두리, 고명진, 김진규, 김용대 정도였고 나머지는 폼이 하락했거나 주전경쟁에서 밀렸거나 아니면 아직 경험이 부족한 유망주들이었다.

심각한 위기상황에서 최용수 감독은 2014 시즌을 3백 체제로 운용할 것임을 천명했다. 최용수 감독은 유로 2012에서 준우승을 기록한 이탈리아의 3백 시스템을 인상깊게 보고 이때부터 3백 활용을 결심하고 2년간 연구해 왔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대전에서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하며 쓰리백과 포백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이웅희를 영입하고 외국인 슬롯 하나를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가 모두 가능한 장신 수비수 오스마르로 채웠다. 그리고 13시즌 후반기부터 쓰리백을 시험적으로 가동해 보기도 했다.[17] 이미 차두리, 최효진, 김치우 같은 수준급 측면 자원들을 보유하고 있어 아주 불가능하진 않아 보였다. 그러나 선수들이 생소한 쓰리백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전반기 서울은 총체적인 난국에 부딪치게 된다.

시스템이 생소했던 윙백들이 요령껏 시스템에 녹아들지 못해 체력소모가 극심했고 이는 후반전만 가면 양쪽 측면이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여기에 중앙 수비수 김진규와 골키퍼 김용대까지 집중력을 잃은 모습을 보여주어 수비진이 말그대로 허물어졌다. 공격진이 나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데얀 대신 원톱으로 세운 에스쿠데로는 본래 윙이었고 퍼스트 터치나 슈팅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기에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몰리나가 빠지나 세트피스 활용도 여의치 않았고 미드필더진은 하대성의 빈자리를 못채워 허리에서 빌드업이 안됐기 때문에 극심한 빈공에 시달렸다. 한마디로 초반에는 공격도 안되고 수비도 안됐다.

상황이 너무 안좋다보니, 리그 2경기와 아챔 3경기도 총 5경기를 치른후 일시적으로 4백으로 회귀했지만 무너진 팀 스피릿은 회복되지 않았다.

순위승점득점실점
1포항227122210
2전북20622147
3제주19613109
4전남175231110
5울산15433127
6수원154331311
7부산12334810
8상주101721012
9경남10244816
10서울923568
11성남923535
12인천4046214

위 표는 4월 27일 10라운드까지 마친 시점에서 FC 서울이 받은 성적표다. 전통적으로 FC 서울이 슬로 스타터 기질이 있긴 했으나,[18] 이정도면 강등을 걱정해야 했다.

그리고 5월 3일 리그 11라운드, 리그 꼴지이자 무승 팀 인천을 맞이하여 0:1로 패했다. 이 믿어지지 않는 결과에 축구팬들은 '썩어도 준치인데 아무리 못해도 하위 스플릿 정도로 그칠 것이다'는 쪽과 '지금 전력으로는 곧장 강등이냐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루냐 문제일 뿐'이라는 쪽으로 나뉘어 한바탕 설전을 주고받기도 했다.

대대광강이 사라져 하위권 경쟁이 어느때보다 치열해 졌고, 월드컵 브레이크로 약체팀들이 혹서기에 체력을 보전할 수 있게되었기에 팬들의 걱정은 점점 커졌고 경질론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그에서 졸전하는 와중에도 아챔에서는 꾸준을 승점을 쌓아 16강전에 안착했고, 16강에서 만난 가와사키 프론탈레를 상대로 원정 다득점 승을 거두어 8강에 올랐다. 그리고 포항 스틸러스가 8강 상대로 결정되어 걸어가는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가 성사된채 월드컵 브레이크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반등이 시작되었다.

일단 강등권까지 처박힌 성적을 조금씩 끌어올으며 상위스플릿 다툼을 벌일 정도로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가장 큰 개선점은 감독 생활 4년만에 로테이션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게 꽤 성공적이라는 점이다. 서울은 최용수 감독 취임이래 12시즌 리그 우승, 13시즌 아챔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최용수 감독이 능력덕이라고 보는 이는 드물었는데, 여기에는 황선홍처럼 전술적으로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도 있지만 1년 내내 베스트11만 돌리고 로테이션을 모른다는 점이 가장컸다. 김현성, 박희성 등 유망한 젊은 선수들에게 경기력을 성장시킬 기회를 부여하지 않았고 이재권은 일부러 트레이드해서 데려와 놓고 벤치만 데웠다. 이때문에 서울은 데몰리션에 대한 의존도가 극히 높았으며, 아챔참가로 일정이 빡빡해진 13시즌 그 부작용이 터져 리그와 아챔을 모두 날렸다.

그리고 데몰리션이 떠난 14시즌. 시즌 초반을 완전히 말아먹으면서 팬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는듯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조금씩 자신의 단점을 개선해가기 시작했다. 로테이션을 제대로 운영하며 리그성적과 아챔을 위한 선택과 집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시즌 제대로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던 박희성, 고광민, 이상협, 김남춘, 최현태 같은 선수들이 기회를 부여받았고,[19] 대전에서 데려온 이웅희도 3백의 핵심으로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여름들어 로테이션을 활용하고 수비수들이 3백에 적응하자 조금씩 성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단 강등권은 확실하게 벗어났다.

8월 20일 스틸야드에서 열린 1차전에선 0-0 무승부를 기록하고 8월 27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아시아 챔피언스 2차전 홈경기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끝에 승부차기 스코어 3-0으로 승리. 4강에 안착했다. 몰리나, 에벨톤, 에스쿠데로, 김치우 등 작년같으면 무조건 나왔을 주전선수들을 과감히 제외시키고 고광민, 박희성, 윤일록 같은 젊은 선수들을 선발로 내보내 승리를 낙아챈 점도 고무적이다. 올시즌 리그와 아챔, FA컵까지 지겹도록 맞붙고 있는 서울과 포항인데 시즌 초반 서울이 헤맬때 패배한 것을 제외하면 서울이 우세를 보이며 FA컵과 아챔에서 포항을 물먹였다. 현 시점에서 최강희 감독과 함께 K리그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황선홍 감독을 상대로 감동님 소리까지 들었던 최용수 감독이 우세를 보이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추석 연휴 마지막날인 9월 10일 성남원정에서 2-1 역전승을 거둬 같은 날 수원에게 2-0으로 패한 울산을 제치고 6위에 등극, 드디어 상위 스플릿 진입에 성공했다.

9월 10일까지 진행된 판도로 봤을 때 상위 스플릿 잔류를 놓고 가장 유력한 경쟁 상대는 5위 전남과 7위 울산이다. 전남은 모기업 경엉사정이 악화일로를 걸으며 저비용고효율 스쿼드를 꾸린만큼 장기 레이스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약점이 있다. 한편 울산은 조민국 신임 감독이 부임한 여파로 팀이 정상궤도를 일탈해 삐걱대는 상태다. 더구나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축구 대표로 울산은 김신욱과 김승규를, 전남은 김영욱 안영우 이종호를 보내 전력 누수가 심한 것도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 3년차 햇병아리 감독에 불과하지만, 일부 축구팬들은 조심스럽게 40대 또래 감독들 가운데 차후 대표팀 감독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지 않겠냐며 장래를 점치고 있다.[20] 전술한 바와 같이 3년동안 여러차례 팀과 감독 모두 위기를 맞이했는데도, 군말이 새어나지 않게 '선수들을 잘 단속'하면서 어떻게든 '끝까지 버텨내서 성적을 내는' 뚝심은 감독으로서 커다란 장점이다.[21] 또 유려한 공격축구를 선호하는 신태용, 황선홍 감독과 달리 선수비 후역습의 간결하고 실용적인 축구를 추구하는 점도 세계 무대에서 대표팀의 위상과 전력을 고려해봤을 때 궁합이 맞는다.

9월 13일 인천과의 경기로 승점 40점을 돌파. 11승 8무 7패 승점 41점으로 5위에 올라있다. 현재 3위 수원과의 승점차이는 고작 3점.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가시권에 들어와있다. 현재 기세대로라면 충분히 티켓 획득이 가능한 상태. 덕분에 서서히 서울팬들이 최용수빠로 변하고 있다.

웨스턴 시드니와의 0-0 홈경기 무승부로 AFC 챔피언스리그 8강전부터 3경기 연속 0-0 무승부를 기록하고 있다. 연장전까지 도합 300분 무득점이다.[22] 웨스턴 시드니가 서울과 마찬가지로 선수비 후역습 스타일이라 지루한 경기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고 예상대로 되었다. 웨스턴 시드니가 원정골을 기록하고 홈에서 잠궈버리는걸 우려했는지 홈에서도 그다지 공세지향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현재 서울의 공격력으론 웨스턴 시드니 정도의 팀을 상대로 원정골 허용하면 만회하기 힘들다.

이후 리그에서도 무재배를 거듭해 전북전(0:0)과 경남전(1:1)에서 연달아 무승부를 기록했다. 웨스턴 시드니와의 1차전이나 이후 벌어진 2경기나 노출된 문제점은 같았다. 서울의 수비력은 변함없이 굳건했으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스코어러 부재에 계속 발목을 잡히고 있다. 전북전에선 홈에서 1군으로 나온 전북을 상대로 1.5군을 내보내 공격은 잘막았고 결정적인 찬스도 잡았으나 박희성이 그 찬스를 날리면서 무득점에 그쳤고 경남전에서도 에벨톤과 박희성이 결정적 찬스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데얀은 떠났고, 몰리나는 노쇠화로 폼이 죽었다.[23] 모기업 GS도 연고지 밀착, 유스 시스템 정비, 해외교류 등 구단 내실다지기에 집중하면서 10년 같은 대박영입은 안하는 상황. 11시즌 몰리나 영입 이후로 빅사이닝이 없다.[24] 12시즌 이재권, 13시즌 윤일록, 14시즌 이웅희, 강승조로 매년 유망주, 준척급으로 1~2명만 데려왔으며 이들중 윤일록은 13시즌 바로 중용되었고, 이웅희와 강승조도 14시즌 중반 최용수 감독이 베스트 일레븐에 대한 고집을 버리면서 기회를 부여받아 잘 뛰고있다. 2시즌 벤치에서 쌩으로 날리고 경찰청 입대한 이재권만 불쌍하게 되었다.

저렴한 자원이 필요하여 데려온 하파엘 코스타는 상반기에 워낙 부진했던지라 손해를 감수하며 에벨톤을 맞임대로 땡겨오는 딜을 했는데, 그렇게 데려온 에벨톤도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맥을 못추고 있다. 기존의 에스쿠데로는 원톱감이 아니라는 사실만 다시 한번 확인시켰고 유망주 박희성도 문전에서 미숙한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한마디로 중앙 공격은 기대할게 못된다. 두두와 이상협만 남기고 공격진이 전멸했던 07년 귀네슈 부임 첫해와 유사한 상황이다. 그래서 측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측면에서 활력을 불어넣던 윤일록이 아시안게임에 차출되어 갔다. 게다가 조별 예선에서 오른쪽 인대 부상을 입어 4~6주를 끊어서 복귀후에도 한동안 결장해야 하며 추후 폼저하가 우려된다. 왼쪽의 김치우는 왼다리에서 뼛조각이 발견되어 수술대에 올랐다.

14시즌 서울은 실점을 잘안하지만 득점도 많이 못하는 팀이다.[25] 선제골을 먹으면 뒤집는게 쉽지 않고 주어진 찬스를 바로바로 못살리면 약팀 상대로도 덜미잡힐 위험이 높다. 즉, 답답하다고 함부로 공격적으로 나가는것도 쉽지않다. 때문에 리그, FA컵, 아챔 모두 굉장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없던 골결정력이 하루 아침에 생기는건 아니라서 최용수 감독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다.[26]

10월 1일 웨스턴 시드니와의 호주 원정에서 0-2로 패배. 2년 연속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원인은 역시나 약한 공격력이었다.

30라운드 울산전에서 3-0 대승을 거두어 울산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이은 31라운드 상주전에서 연이은 원정경기로 인한 체력저하를 극복치 못하고 0-1로 패했으나 32라운드 전남전에서 모처럼 터진 몰리나를 앞세워 2-1로 승리. 상위스플릿 잔류를 확정짓고 재차 아챔 진출을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10월 22일 FA컵 준결승에서 상주를 1-0으로 꺾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FA컵 결승전에서 결국, 성남 FC에게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며 FA컵 우승을 놓치고,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힘겨워지는 듯 했다.

이런 와중에 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FA컵 우승을 놓치고 4위를 기록하던 서울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리그 3위로 진출하는 것뿐인데 3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승점이 3점차인 포항 스틸러스가 반드시 패배하고 서울이 반드시 이겨야 가능했기 때문. 포항은 비기기만 해도 아챔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나마 득실차는 이미 서울이 더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기기만 한다면 거의 99%의 확률로 3위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포항은 홈에서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경기[27]하고, 서울은 제주 유나이티드와 원정 경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부터 제주의 황일수에게 골을 먹히더니 포항-수원 경기도 김광석이 골을 넣으며 완전히 희망이 사라지는 가 했다. 그러나 6골로 팀 내 최다 득점자이던 윤일록이 동점골을 넣더니 옆 동네 경기에서도 이동국을 제치고 득점왕을 노리고 있던 산토스가 동점골을 넣었다. 게다가 얼마 안 가 시즌 내내 인민 먹튀 취급받던 정대세까지 골을 넣으며 아챔 진출 조건의 반이 이루어졌고, 결국 후반 45분에 오스마르가 역전골을 넣으면서 3위로 역전 성공. 아챔 진출에 성공했다.

이 마지막 라운드 상황을 간단히 요약해놓은 영상

아이러니하게도 서울과 수원의 관계는 슈퍼매치라고 할 정도로 타 팬들을 인정하지 않지만 꽤나 인지도 높은 라이벌 관계인데 그 라이벌인 수원이 서울의 아챔 진출을 도와준 격이었다.

다만 올 시즌 성적을 말하자면 그리 만족스럽다 볼 수는 없다. 2년 연속 리그 우승팀이 급작스런 전술 변화로 인해 초반에 크게 무너지고, 전술에 적응한 뒤에도 안정화된 수비에 비해 그리 늘어나지 않은 득점력을 생각하면 분명히 아쉬움이 많은 시즌. 그리고 엄격히 따지면 32라운드 전남전에서 스테보의 골을 무효로 만든 오프사이드 오심이 아니었으면 아챔은커녕 상위스플릿 진출도 불가능했다. 역대급 망시즌이 될 수 있었는데 심판의 오심이 살린 격.이래서 운장 소리를 듣는 거다.

아무튼 서울 프런트는 시즌 중반 이후의 모습을 괜찮게 평가했는지 3년 재계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14년 연말에 김주영이 중국 상하이로 이적하면서 내년 전력 약화를 고민하게 되었다. GS가 최근 건설사업 필두로 적자가 많이 발생한 탓에 올해도 눈에 띄는 영입없이 상당히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1.3.4 2015년

딱히 잘 하는건 없어보이는데 성적은 꾸역꾸역 나옴

아챔 플레이오프에서 하노이를 7:0으로 격파하면서 좋은 출발을 보이는 듯 싶었으나, 개막 직전 세르히오 에스쿠데로가 중국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리그 개막전부터 울산-전북-포항에 매 경기 2골씩 먹히며 3연패를 기록하였다. 아챔 리그 조예선에서도 1승 1무 1패로 3위로 밀려난 상황.
서울은 부족한 공격력을 보강하기 위해 박주영을 영입하긴 했지만 이적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합류 시점이 4월 초로 잡혀있어 과연 박주영 효과를 보며 반등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할 듯.

4월 18일 슈퍼매치에서 1:5로 완패했다. 모처럼 공중파로 중계된 경기에서 체면을 크게 구겼기 때문에 서울팬들의 여론이 나빠졌다. 막말이 여과없이 오가는 인터넷 공간에서 FC 5eou1 비웃음을 사면 어지간한 보살팬이라도 빡칠 수밖에

5월 들어서 리그 순위가 무려 10위까지 추락하면서 서포터들에게 퇴진 소리까지 듣고 있다. 그나마 아챔에서 막판 가시마 원정에서 3-2로 이기며 극적으로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하며 한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아챔 16강 1차전에서 감바 오사카에게 홈에서 1:3으로 대패를 당하면서 팬덤은 다시 들끓었고, 결국 원정에서도 2:3 패배를 당하며 16강 탈락했다.

이후 리그에 집중하면서 차곡차곡 순위를 끌어올려 일단 6월 들어서 상위 스플릿에 안착했다.
리그 순위는 전북이 승점차를 크게 벌리며 1위를 지키는 가운데 수원이 약간 떨어져서 추격하는 모양새며, 서울 전남 제주 포항이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3위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다. 이들 네 팀은 매주 승점이 아닌 골득실차로 순위가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시즌 성적을 예상하기는 어렵다. 특히 뒤에서 광주 성남은 승점 5점 정도 차이로, 울산과 인천은 8점 정도 차이로 따라오고 있기 때문에 중위권 순위가 언제 어떻게 요동칠지 모르는 레이스가 이어지고 있다.

6월 27일 슈퍼매치에서 0:0으로 비겼다. 모처럼 공중파로 중계된 경기에서 맥빠진 경기를 펼친 덕분에 팬은 물론이고 언론조차 서정원 최용수 두 감독을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6월 30일, 중국 장쑤 순톈이 가오홍보 감독을 경질하고 새 감독을 찾는 와중에 최용수 감독 역시 후보군에 들었다는 중국발 기사가 나왔다. 이 소식을 접한 축구팬들은 아브람 그랜트, 로베르토 디 마테오, 이장수 등의 네임드 감독 후보군 가운데 그냥 구색갖추기 정도로 들어갔지 않겠냐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7월 2일 최용수 감독이 시즌 도중 장쑤로 옮겨 지휘봉을 잡는다는 기사가 떴다. 여기에 몇몇 기자들이 달려들어서 최용수가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형욱이 올린 기사 잔류 확정 후, 듀어든이 올린 기사

그런데.....

다음날 거액의 제의를 거절하고 서울에 잔류한다는 기사가 떴다. 팬들의 반응은 거액의 제안을 거절하고 서울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의리에 대단하다는 호평과 서울의 경기력이 좋지않아 나가라는 반응이 대다수인데 왜 안 나가냐는 혹평이 엇갈리고 있다. 상위권 팀이 한창 시즌 중반에 감독을 바꾸는건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음으로 안가서 일단 다행이다라는 분위기다

8월 휴식기에 아드리아노를 영입하고 다카하기의 실전투입 부활의 몰리나 에이스 박주영 등으로 FC서울의 판타스틱4로 리그 승점 자판기지만 전적에서 열세였던 윤정환감독의 울산현대에 승리 부산에 승리 대전에 승리하며 외적 내적으로도 훌륭한 경기력과 연승으로 9월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고명진이 중동가고 외인 3인방 미들진 다카하기-오스마르-몰리나 의 신형 미들진이 중원을 장악하는데다 심상민을 발견하며 또다른 공격옵션도 만들어 냈다. 하지만 9월 포항-전북-수원-성남의 상위권팀들과의 맞대결이 남아있어 새로운 FC서울의 진가를 알아볼수 있다.(위 팀들과 전반기에 1승3무4패의 저조한 성적이다.그에 비해 부산 대전은 전반기에도 3승1무다) 라고 할려고 했는데 8월 마지막 제주전에서 패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거의 10년간 서울에게 이기지 못한 제주가 윤빛가람 송진형의 골로 승리했다. 한창 성남과 순위 싸움이었던 시점에서 아쉬운 패배다.

이와중 박주영의 무릎이 아작나며 포항전 무승부 전북전 대패를 해서 입지가 위태위태해졌다. 그리고 수원과의 원정 시합전에 박주영이 무릎이 괜찮다고 출전을 예상하게 했으나 정작 시합에서는 벤치에도 넣치않는 언플로 시합도 전에 대패를 되갚는 3-0대승을 거두었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스킬을 획득했나보다 시합전에 오늘은 사이드와 세트피스에서 승부가 갈릴거라고 했는데 정확하게 맞추며 오래간만에 명장설이 뜨는가 했으나 다음 성남전에서 홈에서 패배를 기록하며 다시 또 지도력 문제가 뜨기 시작했다.

또한 특정선수에 대한 기대나 수요치가 너무 크다. 여름부터는 꿀영입아드리아노박주영 이 둘이 잘 풀리면 시합과 내용 둘다 잡을수 있지만 둘다 안풀리면 한없이 고전한다는 점이다.하지만 상위스플릿은 일단 성공했고 후반기 리그성적과 FA컵을 따내면 올해는 평타 이상은 친 감독으로 기억될 듯하다.
34라운드에서 성남에 역전승을 거두며 4위로 뛰어올랐고, 35라운드에선 전북과 비겼다.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10월 31일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결승에서 3-1 승리를 거두고 커리어 첫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36라운드에서는 역대급 슈퍼 매치를 연출하며 4-3 신승을 거뒀다. 2위 포항과 승점 2점차로 남은 2경기 결과에 따라 준우승도 노려볼 수 있었으나 두 경기에서 1무 1패 하며 리그 4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1.3.5 2016년

1.3.5.1 FC 서울

갑작스런 이별

괌에서 전지훈련중에 아드리아노와워메 박주영이그만좀다쳐!!!!!부상을 당해 국내 복귀했다 한다시즌은 아직시작도 안했음 그나마 작년, 제작년과는 다른 적극적인 영입으로 다른 자원들이 늘어난게 다행. 전지훈련에선 주세종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하는 전술실험을 했다.[28] 아챔에서는 부리람,산둥,산프레체 히로시마 등을 상대로 대승하고 조1위로 치고 나갔다. 리그에서는 전북을 상대로 0-1패를 하였으나 2라운드 상주전 부터는 순항중. 그런데 상주전까지 5경기동안 복붙이라 할정도로 베스트 11 후보 7명 멤버가 똑같아 로테이션은 뒀다 쌈싸먹냐? 라는 평가를 들었다.

최용수 감독은 A매치 기간 이전의 이같은 라인업 복사+붙여넣기에 대해서 새 얼굴이 많이 수혈된 팀의 조직력을 다지고 지난 3시즌간 팀 발목을 잡은 슬로우 스타터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으며 조직력을 헤치지 않도록 2~3명씩 점진적인 변화를 줄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3라운드 인천전부터는 로테이션을 조금씩 돌리기 시작했다.

플레이 메이커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신진호가 입대한 후 적절한 대체자를 찾지못해 고심이 크다. 천하의 아데박 트리오도 미들진이 살아나지 못하면 공격력이 확줄어들기 때문에 이석현, 고요한, 주세종 등 많이 돌려 써보지만 전부 기대에 못미친 경기력을 보여줬다. 시즌 첫 슈퍼매치에서 무승부를 거둔 이후 기세가 한풀 꺾인 모양새. 포항전에서는 쓰리백 철퇴축구에 제대로 얻어 맞고 1-3으로 참패했다. 다행히 이후 주중에 치뤄진 대구와의 FA컵 16강에선 2골을 연이어 실점하고 끌려가다 아드리아노와 심우연을 투입한뒤 4-2로 뒤집어 엎어버리는 용병술을 보여줬다.

5월 14일 성남과의 경기에서 골키퍼 유현의 연이은 실수로 2-1로 끌려갔으나 박주영 교체로 경기를 반전시켜 3-2 역전승을 거뒀다. 이 경기 승리로 통산 100승을 올렸다. 42세 8개월 4일, 193 경기만의 성과로 K리그 역대 최연소, 최소 경기 100승 기록이다.[29]

6월 21일, FC 서울 지휘봉을 내려놓고 장쑤 쑤닝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공식발표가 떴다. 최용수 감독은 6월 22일 안산 무궁화와의 FA컵 16강 경기를 마지막으로 서울 지휘봉을 놓는다. 후임은 황선홍 전 포항 스틸러스 감독. 작년에 한번 거절당한 장쑤인데 지속적으로 구애를 보내며 무려 연봉 35억을 제안했다고 한다. 2년 반 계약이니 기본연봉만 다 받아도 87억이다. 이런저런 수당까지 포함하면 100억까지 받을 수 있다. 이는 EPL 감독 평균 연봉(35억)을 뛰어 넘는 금액이다. 거기다 장쑤가 외인으로 영입한 테세이라, 하미레스와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팬들은 장쑤가 제안한 금액이 워낙 커서 순순히 보내줄 수 밖에 없다는 쪽이 중론이다. 다만 아드리아노나 고요한 등 자신을 애제자들과 코치진을 중국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우려와 개성강한 선수들을 잘 통제했던 최 감독의 부재로 리더쉽 공백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 그나마 후임 감독이 황선홍이라 다행이지 인지도가 없거나 평판이 안좋은 인물이 후임이었다면 꽤나 민심이 흉흉했을 상황이었다.황보관 리턴즈가 아니니까

고별전이었던 6월 22일 안산 무궁화와의 FA컵 16강전은 윤주태의 멀티골을 앞세워 2-1 승리하여 유종의 미를 거뒀다.

1.3.5.2 장쑤 쑤닝

막상 떠날때만 해도 이해한다, 응원한다, 그동안 좋았다는 훈훈한 댓글과 반응이 많았지만 그 후로 황선홍 감독이 몇 경기 동안 승이 없고 홍정호가 최용수의 팀인 장쑤로 이적하자 느닷없이 욕을 배불리 먹고 있다(...) 서울에서는 지 갈거 생각하고 로테이션 안돌려서 체력 바닥나서 주전이 지금 황감독 아래서 제대로 못한다고 까고, 홍정호 건은 유럽에서 주전먹은 애를 왜 데려가서 망치냐고 하는 것이. 사실 홍정호는 유럽에서 주전은 아니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상적인 상식을 지니고 있으면 애먼 사람 욕하지 말자. 최용수는 이미 이전에도 중국의 제의를 거부하고 남았었고 이번에 제의도 급작스럽지만 엄청난 금액을 보장했기에 프로라면 당연히 이적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전까지 최용수가 서울을 이끌며 2위까지 올리고 우승경쟁도 만들고 있었는데 본인이 떠나고 새 감독이 오면 그 과정에서 혼란은 당연한 것이다. 정착기간까지 지켜봐야하는 것이지 이게 그 전임감독이 떠났다고 욕먹을 부분은 아니다. 또한 괜히 패배를 누군가에게 돌리기 위해 최용수 감독이 건수가 잡힌거지, 경기를 살펴보면 로테이션이 문제가 아니라 유독 경기마다 못하는 선수가 눈에 띄게 있었다. 그리고 홍정호 건도 홍정호 항목에 나와있지만 이적이 감독 혼자만의 의사로 되는 것도 아니다. 더더욱 홍정호는 이전부터 장쑤가 관심을 가져온 선수다. 무엇보다 아무리 구단측이 밀어붙여도 선수가 원한다면 이적은 거부할 수 있다. 본인이 고액의 연봉을 위해 프로다운 선택을 내렸고 아우구스부르크와 장쑤도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적한 것인데 이것을 최용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선수 본인이 정말로 성장을 위해 중국에 가고 싶지 않았다면 방법은 분명 있다. 다른 외국인 선수들이 중국 리그로 간다면 돈때문에 간다며 욕하면서 홍정호는 억지로 떠밀리듯 이적한 듯 분위기를 형성하고 감독을 비난하는 것은 진정한 축구팬의 모습이 아니다. 설령 최용수의 입김이 들어간 영입이라 할지언정, 프로의 세계에서 국적과 국가대표까지 모두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대승적 차원이라고 하는 것은 프로 세계에서는 그저 본인들의 떼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장쑤 쑤닝의 전임감독은 단 페트레스쿠였다. [30] 하미레스, 알렉스 테세이라, 조(축구선수) 세명의 용병빨로 리그에서는 2위를 하고 있었으나, 전술이 매우 단조로운데다가, 재미없는 수비축구로 일관하여 그 좋은 성적에도 팬들과 서포터즈에게 욕을 상당히 먹는 상태였다. [31]결정적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5월 4일 홈경기에서 전북에 비김으로서 3위로 탈락, 경기를 직관한 구단주가 크게 노해서 그대로 잘렸다고 한다.

중국 슈퍼 리그 2016년 14라운드부터 지휘를 시작했다.

6월 24일, 광저우 헝다와의 원정경기에서는 0-2로 패했다.
7월 2일, 랴오닝 훙윈과의 홈경기에서는 하미레스의 활약으로 4-3으로 가까스로 승리.
7월 9일, 산둥 루넝과의 원정경기에서 다시 1-2로 패.
7월 14일, 허난 젠예와의 중국축구협회 FA컵 원정경기에서는 1-2로 패배.
7월 16일, 박태하감독이 지휘하는 옌볜 푸더와의 원정경기에서는 0-3으로 참패했다. 이 경기에서 옌볜의 김승대가 대활약을 했다.

아직 팀 파악이 덜 된 듯, 팀을 맡은지 한달동안 1승 4패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광저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산둥, 옌볜은 모두 10위 밖의 약팀이라서 더욱 충격적. 장쑤 입장에서는 팀을 2위에 올려놓았던 전임감독 단 페트레스쿠를 시즌중 경질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

7월 20일 홈경기에서는 허베이 화샤를 4-0으로 대파했다. 이 경기에서 이적한지 얼마 안되는 홍정호가 출전했다.
7월 24일 다시 홈경기에서 허난 젠예를 4-1로 대파. 최용수가 치른 홈경기는 꼭 4점으로 이긴다는 징크스를 보여주었다.

7월 27일, 중국 FA컵 홈경기에서 다시 허난 젠예를 3-1로 격파하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취임 초반에는 굉장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나, 7월말 부터 안정감을 되찾았고, 8-9월에는 계속 승승장구를 하여 7월 중순이래 4연승 (월드컵 예선 한중전을 위해 에서 중국국대를 차출하기 위해 리그를 2주간 중단시키고 합숙훈련을 했다 근데 결과는 2-3패배 ) 을 구가, 9월 하순 25라운드를 마친 현재 선두 광저우 헝다를 승점 6 (56-50)점 차로 바짝 뒤쫓고 있다.
9월 25일 벌어진 26라운드에서 항저우 뤼청에게 3-0으로 패하면서 선두 광저우 헝다와 승점 7점 차이로 벌어졌다. 이번 시즌 단 4경기만을 남겨놓고 있다.

1.4 지도 스타일

비판받을 땐 보통 선수발로 축구한다고 욕 먹는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틀린말은 아니었다. 최용수 감독이 자신의 색깔을 정립한건 14시즌부터이고 초년병 시절인 11~13시즌의 서울은 분명 절정의 폼을 과시하던 데몰리션 콤비를 위시한 선수발로 축구한 팀이었다. 그러나 선수발로 가장 큰 고비인 초년병 시절을 무사히 넘기는데 성공했고 14시즌 부턴 본인의 색을 찾아가고 있다.[32]

13시즌까진 포백을 사용했지만 데얀과 하대성, 아디가 모두 떠난 14시즌 이후론 수비 지향의 3-5-2 혹은 3-4-3 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한다. 15시즌을 앞두고 공격적인 4백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하위권으로 추락한 뒤에 다시 쓰리백으로 돌아갔다.[33] 수비라인 구축은 리그 초반 바닥까지 떨어졌던 14시즌에 리그 최소실점 2위를 차지하고 전북의 최강희 감독이 자신의 닥공축구를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괜찮은 편이지만 공격전개에는 의문부호가 많다.

권위적이지 않고 소통을 중시하며 뒤끝이 없어 선수들이 부담스러워 할 지도자는 아니다. 유머러스한 인터뷰에서 잘 드러나듯 인터뷰나 언론플레이도 수준급. 본인이 FC 서울 한 구단에서 선수, 코치, 수석코치, 감독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왔기에 장악이 용이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러차례 힘든 상황이 닥쳐왔음에도 별 진통없이 팀을 추스리고 선수들의 지지를 끌어모은 점은 인정해 줄 만하다. 14시즌 종료 후 은퇴하려던 차두리는 최용수 감독의 요청으로 1년더 뛰기로 했고 FA컵 우승을 맛봤다. 박주영은 자칫 크게 충돌할 수 있었음에도[34] 잘 구슬렀고 15시즌 중반 최용수 감독의 중국행이 거론되었을때 가지 말라고 문자까지 보낼 정도로 최감독을 따랐다. 한 성격하는 아드리아노나 13시즌 중국 이적문제로 마찰이 있었던 데얀도 큰 충돌없이 포용해냈다.

이장수 재임기 서울의 플레이 스타일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세뇰 귀네슈 시기 빠른 템포의 패싱게임이 장착되어 전자는 극복했지만 젊은 유망주들이 중심이 되고 베테랑들이 케어를 못 해준 탓에 후자는 극복하지 못했다. 때문에 서울은 항상 팀 캐미스트리에 문제가 있다는 평을 들었고 08, 09시즌 잘나가다 시즌 후반 고꾸라졌다. 이 문제는 빙가다 감독 재임기 베테랑이 어느정도 극복되었으나 빙가다 감독은 1년만에 떠났고 주축 선수들이 유출되었다. 설상가상 후임 황보관 감독은 완전히 무능력했다. 이 모든 문제점은 11시즌 11경기 3승 4무 4패란 처참한 성적으로 이어졋다.

그 상황에서 등판한 최용수는 귀네슈가 정착시킨 공격축구와 빙가다때 잡히기 시작한 팀 스피릿을 모두 계승하는데 성공했다. 11, 13, 14시즌이 모두 스타트는 최악이었고, 유일하게 처음부터 치고나간 12시즌에도 중국 이적이 불발된 데얀과의 갈등이란 변수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처럼 제 성질 못이겨 자멸하는 모습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스타 플레이어가 없어도 조직력을 바탕으로 치고 올라가는 팀이 되었다.

귀네슈 시기 안티들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거친 플레이도 무공해 축구란 기치아래 많이 사라져 12시즌 클래식에서 가장 파울 적은 구단으로 변모시켰다. 분명 선수단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우수한 감독이다. 13시즌까진 백업 멤버들을 활용하지 않고 베스트11에 지나치게 의존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14시즌부턴 로테이션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단점이라면 전술 다변화가 있다. 일단 전술뇌가 없는 감독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한 지장이다. 데몰리션의 후광과 화려한 공격축구를 추구하는 감독이 아니란 점이 더해져 황선홍, 최강희에 비해 머리 나쁘고 선수빨로 먹고 산단 이미지가 붙었는데, 14시즌 수차례 대결한 황선홍 감독은 여우라며 경계했고 최강희 감독과의 지략대결 결과도 좋다. 문제는 플랜A가 안 먹힐 때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해서 극복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점이 가장 잘 드러난 점이 광저우 헝다와의 13년 AFC 결승전. 되든 안되든 과감한 공격이 필요한 순간에 되려 수비적으로 나가서 맥없이 트로피를 내줬다. 14년 34라운드 전북전에선 평소와 달리 전북이 수비적으로 나오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다 경기를 내주기도 했다.[35] 즉, 판짜기는 잘하는데, 융통성이 부족한 케이스. 축구 버전 안준호 감독이라고 하면 맞으려나..?

또 다른 단점은 공격진 운영과 육성. 1년에 1골 넣는다던 정성훈, 강수일을 각성시키고 전문 스트라이커 없는 포항을 14시즌 전반기 팀득점 1위에 올린 황선홍 감독에 비해 본인이 공격수 출신임에도 공격수 육성이 시원찮다. 일단 13시즌까지 로테이션을 모르던 사람이라 주야장천 데얀만 기용해서 김현성, 박희성 같은 공격수 유망주들이 육성이 전혀 안 됐다. 이로인해 데얀이 떠난 14시즌부터 심각한 빈공에 시달리고 있다. 공격시 빠르고 오밀조밀한 패싱게임과 과감한 롱볼전술을 혼합하는 최강희, 황선홍과 달리 정말 다급한 상황에 무작정 차올리는게 아니면 롱볼축구를 아예 안하는 지라 장신 타겟맨 김현성은 거의 쓰임을 못받았다. 그러나 박주영 영입이후 박주영의 폼이 어느정도 올라오자 박주영의 헤딩을 아드리아노가 받는 공격패턴이 생겼다. 16시즌에는 심우연을 후반 조커로 활용해 공중볼 따내는 전술을 쓰기 시작했다.

1.5 기타

  • FC 서울 갤러리에선 '욘스'[36]라고 불리며 항상 까인다. 이기건 지건 선수 기용을 잘하건 못하건 항상 까인다.
  •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인 서용빈과 친구사이이다. 94년에 나란히 LG 스포츠단에 입단했다고. [37] 지금 축구야구가 사이가 안 좋다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두가지 다른 종목이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니. 가끔 잠실 야구장LG 트윈스 경기를 직접 관람하러 오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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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년 K리그 올스타전 당시 골을 넣고 마리오 발로텔리를 패러디한 골 세리머니를 보여줬다. 몸은 발로텔리와 좀 거리가 있지만. 이 세리머니로 인해 살로텔리, 뱃살텔리 등의 별명이 탄생했다. 은퇴하면 숨길 수 없게 되는...
  • 2014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는 전반 주심으로 투입되어 그날의 감동(...)을 함께 했다. 팀 K리그의 염기훈이 속닥거리자 애꿎은 박지성에게 경고를 주고, 반칙을 범한 K리그 현영민에게는 옐로 카드와 레드 카드를 꺼내들고 현영민에게 고르게 했다눈 가리고 아웅...(건성으로 눈을 가린 뒤) 옐로를 집어들고 감사해 한 현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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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래중-동래고-연세대 선배로 사적으로 꽤 친한 사이인 윤성효 감독과는 애증의 관계이다. 최용수 감독은 윤성효 감독이 수원에 있을 때 수원에게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다. 상성 중에서도 극상성인 셈. 윤성효 감독이 수원을 떠나 부산으로 간 이후에 수원 상대 열세는 뒤집어 졌으나 이번엔 부산에게 쩔쩔매서 윤성효 감독의 호구 소리들었지만 14시즌 부산이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면서 윤성효 징크스도 극복했다. 14시즌 전반기에 성적이 바닥을 치며 스트레스가 극심할때 윤성효 감독에게 전화해서 농담삼아 부적 좀 빌려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 라디오스타에서 안정환의 증언에 따르면 국가대표 소집 때마다 안정환에게 족발과 순대국심부름을 시켰다고한다. 본인은 이에대해 안정환도 같이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특별히 족발을 좋아하는건 아니고 당시 대표팀 숙소였던 장충동 타워호텔 인근에 유명한 족발집이 있다보니 자주 시켜먹게되었다고 밝혔다. 거기다 술만먹으면 자기가 기술축구한다고 자랑하는 사람이었다고한다... 안정환:힘축구인데...
  • 마리텔에서 안정환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는 말을 빨리 잘하던사람이었는데 광고판에서 넘어져 다친이후로 조금느려지고 어눌해진것같다고... 말을 반복하거나 음....어..... 등 말을 끄는 경우가 있고, 문장에 "상당히"가 상당히 많이 들어간다.
그....음....마리....마리텔에서. 안정화이....안정화이의 정언에 따르면....거.....원래는 상당히....상당히 말을 빨리 잘하던 사람이이었는데.....어.... 광고판에서 그..... 넘어져.....넘어져 다친 이후로...... 즈....조금.... 조금 상당히 느려지고..... 그..... 상당히 어눌해진 것 같다고.....~그러나 이말은 그냥 방송용 으로 원래 최감독은 말투가 이랬다증거 영상
  • 90년대 선수 치고는 특이하게도 외국인 감독을 많이 만난 케이스다. 비쇼베츠(94-96애틀랜타) 히딩크(01-02 한일월드컵) 오심(03제프이치하라) 코치시절 귀네슈(07-09) 빙가다(10)
  • K리그 스토리 제조기하면 윤성효 감독이 많이 꼽혔지만 최용수 감독도 얽히고 섥힌 이야깃 거리가 화려한 편이다. 특히 다른 감독들과의 관계를 통해 스토리가 많이 뽑혀 나왔다. 14년에 극복하긴 했지만 윤성효 부산 前 감독에게 지독하게 약한걸로 유명했고 전북 최강희 감독과는 서울정도 구단이 수비축구 하냐며 구단차원에서 디스하자 최 감독이 다른구단에 왈가왈부 하지말라며 응수하고 그러면서 최강희 감독 상대 전적이 좋은 편이라 흥미로운 대결 구도를 형성했으며 황선홍 前 포항 감독과는 14시즌 지겹도록 부딪치면서 너만은 잡는다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었다. 황선홍 감독의 후임으로 온 절친 최진철 감독도 최용수 감독과의 대결에서 필승을 천명하며 이 구도를 이어갈 모습을 내비쳤고 울산 윤정환 감독과도 현역시절 최고의 파트너로 유명했던 선후배간 대결로 이슈를 만들었다. 가장 큰 라이벌인 수원의 서정원 감독과는 말할것도 없다.

2 대한민국권투 선수 겸 킥복싱 선수

최용수(권투선수) 항목으로...

3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 등장하는 만화 잡지

풀네임은 월간 최용수. 오로지 꿈마니소드마스터 야마토를 연재했던 곳. 어원은 아마도 1번[38]인 듯.

  1. 2016년 6월 22일 사임
  2. 실제로는 1971년 생으로 유상철, 최진철 등과 동기이다.
  3. 축구 명가로 유명한 명문고다. 전통적으로 야구보다는 축구 쪽에 투자를 하는 학교이며 박정태, 박지철 등을 배출해 낸 동래고등학교 야구부는 IMF를 맞이해 해체되었지만 김호, 김호곤, 최용수, 윤성효등을 배출한 동래고등학교 축구부는 아직까지 운영되고 있다.
  4. 1996년 올대는 1995년 초부터 발빠르게 움직였는데, 지원도 98년 국대나 02년 국대에 맞먹을 정도로 남미나 북유럽과도 평가전을 자주 치렀다.
  5. 그나마 벨기에 전에서는 후반전 때 얻은 헤딩슛이 정말 아깝게 크로스 바를 넘어갔다.
  6. 이후 이영표를 PSV에 내보낼 때 안양LG 관계자의 인터뷰에 의하면 협상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임했다는 발언이 있다. 실제로 협상을 잘 했어도 웨스트햄 입단이 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협상 자체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이야기. 덧붙여 김도근은 에이전트가 억지로 붙인 덤이었는데 워크퍼밋 발급 조건이 미달돼 갈수도 없었다.
  7. 젊어서는 이게 정말 한스러웠지만 나이들고 나서는 초탈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이 해외진출하려고 하면 웨스트햄으로 보내겠다고 자학개그를 자주 한다.
  8. 이건 이런 타입의 공격수들이 원래 그렇다. 팀 기복 + 본인 기복이라.
  9. 이 방면에서 천재 미드필더라 불리던 윤정환은 독보적이었다. 날카로운 스루 패스에 최용수의 폭발력은 당시 국대 축구를 보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절정에 달했던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윤정환-최용수 콤비는 역대 베스트 콤비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10. 네덜란드전 전술은 3-5-2이지만 투톱 파트너 김도훈을 처진 스트라이커처럼 썼기 때문에 3-6-1 형태와 흡사했다. 더구나 허리 싸움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사실상 5-3-2로 흘러갔다...
  11. 히딩크 이전 한국 축구계는 피지컬의 중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채 막연히 개인기 드립이나 조직력 드립을 쳐대던 시절이었다. 반면 98년 월드컵 상대는 네덜란드벨기에의 장신 떡대들이였으니, 심한 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랄까.
  12. 트루시에 시절 전성기를 달렸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유일하게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러워하는 점이 최용수를 벤치워머로 박아둘 정도로 공격수 자원이 넘쳐난다는 것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13. J리그에서의 활약만으로 따지면 비록 득점왕까지 차지했지만 잦은 부상에 시달린 황선홍보다도 더 높은 평가를 받는게 최용수이다.
  14. 넘쳐나는 투지에 좋은 피지컬, 그리고 최고의 제공권.
  15. 이런 타입의 대형공격수는 일본에서 예나 지금이나 전혀 없다.
  16. 스플릿에선 상위 그룹에 속한 팀들끼리만 일정이 잡히는만큼, 우승 경쟁상대와 싸워 이기면 승점 3점 이상의 데미지를 입히게 된다.
  17.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최용수, 서울까들에 의해 아디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궁여지책이라거나 배운적도 없는데 할 수나 있겠나 하는 등 말도 되지 않게 까였다.
  18. 2013 시즌 10라운드 서울은 2승 4무 4패를 기록, 14개팀 가운데 10위로 쳐져있었다. 다만 이때는 데몰리션이 건재했기에 17득점 16실점으로 득점만큼은 1위 포항과 공동선두를 기록하는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19. 그간 베스트11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심했는지 21라운드 인천전에서 로테이션을 돌리자 4년만에 로테이션 돌린다고 기사가 떴다.
  20. 물론 K리그 팬들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K리그 감독을 그런식으로 유출시켜선 안된다는 이유 등으로 다들 반대한다.
  21. 많은 사람들이 잘 까먹는데 황선홍 감독도 감독 초년병이던 부산 시절 3년간은(부산구단의 형편없는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소리 못들었다. 그리고 수원 시절 윤성효 감독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30년 역사의 K리그는 무능력자가 선수빨로 우승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한 무대가 아니다.
  22. 승부차기까지 포함해도 무실점이다. 흠좀무
  23. 다만 데몰리션이 건재했다면 최용수 감독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틀을 깨부수지 못해 FC 서울의 유망주들은 여전히 벤치만 데웠을 것이고 팬들의 재평가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 큰 감독이 되기위해 거쳐야 할 시련으로 볼수도 있다.
  24. 이때도 몰리나의 존재감이 커서 그렇지 유출이 더 심했다. No.2 공격수 정조국과 핵심 센터백 김진규가 해외로 떠나고 측면 수비수 최효진, 김치우, 이종민이 동반 입대했다. 2명이 한꺼번에 빠진 우측 풀백은 고요한을 풀백 전업 시키기 전까지 답이 안나왔다.
  25. 쉽게말해 전북이나 포항같은 강팀과 붙어도 질 것 같지 않은데, 경남이나 상주같은 약팀이랑 붙는다고 이길 것 같지도 않은 팀이다.
  26. 팀내 최다골 기록자가 윙어 윤일록(5골)이다. 결정력 문제는 한시즌 혹은 몇시즌 통째로 투자해서 기존 공격수를 키우던가 겨울에 새로 공격수를 수혈하는 방법밖에 없다.
  27. 이 경기 전까지 수원은 10년 동안 포항 원정에서 승리한 적이 없었다.
  28. 15시즌에는 박용우와 오스마르가 돌아가면서 쓰리백의 중앙 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 롤을 수행했는데 박용우의 경합능력과 볼키핑이 오스마르보다 떨어져서 오스마르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다. 주세종의 후방 배치는 오스마르가 수비로 내려왔을때 볼배급과 간수가 되는 자원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29. 종전 최단기간 100승 기록은 일화 차경복 감독과 전북 최강희 감독의 224경기. 최연소 100승 기록은 포항 박성화 감독의 44세 10개월 15일 이었다.
  30. 페트레스쿠는 1990년대 세리에 제노아와 EPL 첼시에서 뛴 세계적인 오른쪽 윙백이었다. 루마니아가 1994년 월드컵 8강 (승부차기에서 스웨덴에 패해 아쉽게 탈락) 돌풍을 일으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31. 잘 안알려져있지만, 중국 축구리그에서도 감독이 잘리는 이유중의 하나로 팬심이 크게 작용한다 .
  32. 16시즌 함께하는 감독 중에 선수발도 못 살리는 감독으론 윤정환, 초년병인데다 선수발도 못 받아서 죽쑤는 감독으론 최진철이 있다. 황선홍은 승강제가 없어 지금보다 부담이 덜하던 시절 열악한 팀(부산)을 맡아 초년병 시기를 그럭저럭 넘긴 케이스
  33. 포백에서 급히 쓰리백으로 전환하며 아직 밸런스가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감바 오사카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16강 전을 맞이했고 우려대로 참패했다.
  34. 15시즌 대전 원정 하프타임때 최용수 감독이 부진함 폼을 지적하며 경기력도 안좋은데 머리만 만지고 있다고 했다니 즉석으로 가위 가져다 머리 잘라버렸다. 최용수 감독 정도나 되니까 싸한 분위기 속에 성깔 있다며 웃어넘기는 정도로 끝났지 왠만한 감독이었으면 무슨 사단이 나도 났다.
  35. 15시즌 들어서는 이런 대응 방식이 전 구단으로 퍼져서 여력 좀 되는 팀들은 서울 상대로 말리지 않으려고 쓰리백 맞불 놓는 일이 많다.
  36. 최용수의 가타카나 표기인 チェ・ヨンス(체 욘스)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37. LG 트윈스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 '쌍둥이 마당'에 올라온 일화에 따르면, 과거 LG 트윈스가 셋방살이 햇던 구리 챔피언스 파크에서 임찬규 선수를 보러 온 어린이에게 최용수 감독이 챔피언스 파크 건물 2층에서 축구공을 던져 선물했다고 한다.
  38. 격투가 최용수가 K-1에 데뷔하여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보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연재 시작이 더 빨랐다는 점. 다른 에피소드에서 홍명보라는 마법봉이 등장한다는 점 등을 볼 때 1번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