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희

이름최홍희
생몰년1918년 11월 9일~2002년 6월 15일

1 개요

창헌(蒼軒)[1] 최홍희(崔泓熙, 1918.11.9 ~ 2002.6.15)는 태권도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 태권도라는 명칭도 그가 만들었다.

2 출생

1918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일본 주오 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가 검거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되었고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3 해방 후 태권도의 이름을 만들다

최홍희 본인은 해방 전 배운 가라데를 중심으로[2], 여순 사건시 경찰에게 맞고 오던 개판 오분전 상태의 한국군에게 자기 몸을 단련할 수 있도록 무술을 지도할 생각을 했으며, 그가 제1군단 참모장 때 무술 시범을 본 이승만 박사가 "저것이 우리 고유에 내려오던 탁견"이라며 기뻐하자[3] '태권도(跆拳道)'라는 용어를 고안하였다. 1953년 제주에서 창설된 제29보병사단(이후 1959년에 감군으로 제20기계화보병사단에 통합)의 초대 사단장으로 부임한 후 부대이름을 '태권도부대'라고 하고[4]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하기 시작했고, 최홍희 자신은 1955년 청도관에서 손덕성 관장 명의로 명예 4단증을 받았다. 1955년부터 3군관구 사령관으로 1960년부터 제2훈련소장, 1961년부터 제6군단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 예편하였다. 1959년에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였으며,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손수 "태권도"라 쓴 글씨를 하사하였다.

또한 이 '태권도' 보급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청도관에서는 발차기를 중심으로 꾸준히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특히 태권도에서 빠질 수 없는 뒤돌려차기[5]가 이 무렵(60년대 초반) 고안되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다른 주요 무관들과 교류전을 갖는 등 매우 의욕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6]

훗날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로 캐나다에 망명하였지만, 태권도 수련은 멈추지 않았으며, 특히 무게 중심을 이용하는 방법론에 중점을 두어 사인웨이브(Sine Wave)의 원리를 '체득(體得)'하기에 이른다.

4 국제태권도연맹의 창시

최홍희는 1959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국군태권도시범단과 태권도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베트남과 대만 ,아프리카, 중동,유럽등지에서 시범공연을 하면서 태권도 국제기구를 창설해보려는 구상을 가졌다. 기구의 명칭부터 임원 구성,규약 ,편제등의 기초작업이 어느정도 끝나자 1966년 3월 22일 조선호텔 로즈룸에서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했다. 창설임원은 김종필,김완용,김용태.이상희,조하리등 최홍희의 군인맥과 정치인등이 대부분이었다. 부총재는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인 노병직, 사무총장은 엄운규, 기술위원장은 이종우로 되어있었다.[7] 가입국은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말레이시아, 싱가포르,미국,서독,이탈리아 ,통일아랍공화국등 9개국이었다. 그러나 태한태권도협회는 국제태권도연맹이 유사단체를 만들어 파벌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 국제태권도연맹의 해체를 종용함과 동시에 협회 내에 태권도 해외 보급 및 지도자 해외파견 등 대외관계를 전담할 상설기구인 국제분과위원회를 신설했다. 그러자 최홍희는 강력하게 반발에 나섰고 결국 대한체육회는 1968년 9월 3일에 업무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나섰다. 국제 태권도연맹은 산하 도장을 갖지 못하도록 하면서 국제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업무와 건전한 국제경기를 관장하고 대한태권도협회는 국내도장설립과 국내대회 관장 및 선수양성등의 업무를 보도록 했다. 그리고 1966년 9월 20일에는 태권도분규수습위원회가 신설되고 두 단체간의 분규를 없애려고 했다. 최홍희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박정희의 지시로 이런 위원회가 생겼다며 반겨하지 않았다. 위원회에서의 합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 사범의 해외파견업무는 대한태권도협회 소관이니 당분간 태권도 국제적 보급을 위하여 대한 태권도 협회 회장과 국제태권도연맹의 총재가 협의하여 파견한다.단 1969년 9월 2일까지 만 1년간 해외 사범파견에 대한 권한을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완전 장악한다.

2.대한태권도협화는 국내의 기존 17개 중앙도장과 지관 과의 계열을 없애기 위해 지체없이 지역별 명칭으로 개칭한다.
3. 국제태권도연맹은 여하한 단증도 발급할 수 있으며 가맹국으로부터 4단 이상자에 대한 인준 신청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인준하고 인준서를 발급할 수 있다. 단 대한 태권도협회에 대해서는 인준권한을 위임하고 4급이상자에 대하여 국제태권도연맹에 등록만을 시키는 것으로 한다.

최홍희는 해외사범 파견과 단증발급은 국제태권도연맹의 고유 소관업무라고 여겼지만 대한태권도협회가 이 업무들도 자신이 하겠다고 하고 분규수습위원회의 지침대로 해외사범 파견에 대한 대한태권도협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 보낸 서류들을 무조건 회송하고, 이종우를 시켜 해외에 나간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만든 것을 하라고 지시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분을 삭였다. 이런 분규는 1970년대 초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최홍희는 1971년 8월 분규수습위원회 전제회의에서 불만을 가지고 탈퇴했고 수습위원회는 해체되었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제 7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운용은 대한체육회에 가입한 단체는 대한태권도협회가 유일하다며 국제태권도연맹과의 차별화를 선언하기 까지 했다.

5 박정희와의 불화와 캐나다로의 망명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박정희 정권과도 껄끄러운 관계였던 최홍희는 계속해서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최홍희는 1971년 암암리에 망명계획을 세우고 1972년 3월 캐나다로 망명을 떠난다. [8][9]1973년에 영주권을 취득한 후 1974년 7월에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3개국이 참여한 제 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1978년에는 사범단을 이끌고 동유럽에 태권도를 보급했고 1970년대 말에는 북한방문을 비밀리에 추진했다.그리고 이것은 ITF분열의 계기가 되었다.[10] 1980년에는 태권도 시범단을 결성해 북한으로 가서 태권도를 보급하고 아들 최중화를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보내 제 2기 사범요원교육을 도와주게 하여 본격적으로 북한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북한은 믿을 상대가 아니었다. 1981년 1기생 사범을 교육하고 1982년 2기생 교육을 한 뒤 3기부터는 이북자체에서 교육하겠다고 통보가 왔고 점차 사범양성 및 파견과 사범단 운영을 자체적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11]

6 친북 및 월북 활동과 사망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최홍희는 반한(反韓)적인 활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의 요청에 따라 태권도사범요원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북한과 캐나다를 자주 왕래했고
이런 활동은 국제태권도연맹의 다른 인사들에게 "친북활동"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최홍희를 따르는 사범은 1980년초중반에 들어서서는 10여명에 불과했으며 그의 최측근 또한 이런 그의 친북적인 경향에 등을 돌렸다.[12] 1994년에는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여부를 둘러싸고 WTFITF간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특히 최홍희는 세계 태권도 연맹을 가짜 태권도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1994년 9월 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 103회 IOC총회에서 WTF의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자 2000년대에는 두 단체와의 통합을 해보려고 했으나 WTF에서는 흡수하면 모를까 화해와 통합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면서 일축함에 따라 무산되었고 2001년부터는 아들인 최중화와 갈등이 생겨 결국 최중화를 제명하고 북한으로 갔으며 2002년 평양에서 숨졌다.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고, ITF의 후계자로 장웅 IOC위원을 지명한 뒤 사망했다. [13]

7 업적 정리와 언론 보도

나중에 북한에서 최홍희를 다룬 영화 <민족과 운명>이 제작되기도 했다. 윤이상, 최덕신과 함께 최홍희를 주인공으로 다루었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젊은 최홍희(차홍기)는 공산주의 청년단에 들어갈 정도로 좌파 이념에 동조했지만, 출신성분과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월남하여 군직에 종사한다. 박정희는 처음에 최홍희를 형님으로 대우해 주면서, 최홍희는 군대에 태권도를 무술로 보급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군대가 최홍희 이하 이북 장교들의 사병으로 변모하게 될 것을 걱정하는데, 때마침 먼저 같은 이북출신으로 최홍희에게 모임을 제안했던 김형욱이 선수를 쳐서 자신이 이북 출신 모임을 사사로이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박정희는 이북 출신 장교들을 처단하기 위해 전두환을 시켜 전방의 부대가 북괴로 위장한 몇몇 부대에게 당하게 해서 최홍희를 실추시킨다. 거짓된 음모에 절망한 최홍희는 캐나다로 망명한다.

박정희전두환은 최홍희를 감시하기 위해 군대에서 최홍희가 총애했던 태권도 제자인 홍영자(가상의 인물이다)를 내세워 남한 태권도 도장을 장악하고, 최홍희를 암살하려 든다. 그러나 중정의 요원인 홍영자는 최홍희를 내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망설인다. 마침 같이 망명한 김형욱에게 올바른 민족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최홍희는 김형욱과 몇 번 접촉을 하고, 김형욱에게 미국에서 박정희의 부정을 까발릴 것을 권한다. 김형욱은 말을 따르지만 자신의 애인이 파리에 있다는 홍영자의 꾀임으로 인해 파리에 가게 되고, 거기서 요원에게 납치되어서 박정희의 총을 맞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온갖 부정과 음모에 지친 홍영자도 전두환이 집권하자 한국 정부와의 연락을 끊고 최홍희와 국제태권도연맹에 들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당연하겠지만...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블로그 링크

이외에는 뜬금없이 HOI2 DHR에서 대한민국을 독립시키면 장성들중 한명으로 출연한다(....)
계급은 소장. 위에 적혀있었듯이 실제로도 한국군 장성이었고 소장으로 예편했다.

hoi2 본판에서도 출연하는지는 추가바람
  1. 초창기 ITF 태권도를 일컬어 창헌류라고 간혹 이야기하는데, 최홍희의 호에서 유래한 것.
  2. 쇼토칸 가라데
  3. 사실 일본 강점기 시절 유입된 가라데를 나름 소화했던 것이라고 한다. 다만 최홍희 본인은 태권도라는 단어를 만든 후 우리 고유의 색채를 입히고자 부단히 노력한 듯 하다.
  4. 그래서 경례구호도 '태권'이었다.
  5. 최홍희가 직접 창립한 ITF에서는 이 기술이 몸의 회전을 이용하여 돌려차기와는 반대 방향으로 돌려찬다면 반대돌려차기, 단순히 상대에게 등을 보이면서 뒤를 찬다면 뒷차찌르기라고 부른다.
  6. 다만 뒤돌려차기의 경우, 초창기에는 "일단 피한 후에 손기술로 제압"하는 파해법이 나와 고전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화로, 60년대 초반 뒤돌려차기가 고안된지 얼마 안되어, 전국 주요 무도관 중 강덕원(앞차기, 안다리걸어차기, 손기술을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던 곳)과 교류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강맹한 위력의 뒤돌려차기에 기가 죽은 학생들이 맥을 못췄지만(당시 강덕원은 지방의 명문 학교와 연계하여 나름 상당한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겨루기가 계속 진행되다보니 애들 눈에도 "정신차리고 피하면 이길 수 있다"는게 보였던 것. 물론 이건 말 그대로 "초창기" 때의 얘기다. 현재는 견제, 기습, 마무리 등 응용법이 많이 고안된 상태.
  7. 다만 엄운규는 자신이 사무총장으로 일한 적이 없다고 강변했다.
  8. 다만 채명신 장군은 다른 증언을 했는데. 최홍희가 말레이시아 대사를 하던 시절에 태권도 보급과 동시에 금전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대사에서 면직되고 핀란드에선가 북한으로부터 접촉이 와 (최홍희의 형은 노동당간부였다.) 북한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9. 또 다른 증언에는 최홍희가 최덕신까지 포섭해 최덕신이 채명신에게 전화를 했지만 채명신 장군은 이북으로 가자는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신빙성은 위키러들의 몫이다.
  10. 농담으로 볼 수 없는게 최홍희가 북한을 방문하고자 했던 건 북한도 남한과 같은 한민족이므로 태권도를 보급해야한다는 민족주의적 사고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ITF내 사범들간에 많은 갈등을 야기했고 이것이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
  11.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훗날 최중화는 2008년 9월 한국정부의 승인아래 34년만에 귀국한 후 북한 태권도의 실상을 폭로했으며 그는 기자회견에서 "장웅 계열의 ITF가 북한 노동당 통일선전부전위조직 "이라며 북한의 태권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12. 다만, 최홍희의 의도는 좋았다. 비록 자신이 가라데를 개량하여 태권도를 창시했지만 민족 고유의 무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최홍희는 같은 민족의 나라인 북한에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통일이 되고나서 하나된 태권도를 구사하는 남북한을 꿈꿔왔었다... 또한 무술은 배움에 있어 정치적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게, 최홍희가 북한을 드나들며 태권도를 전해준 후에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후에는 후계자 결정에 있어 많은 갈등을 초래했으며 이런 갈등이 나아가 국제태권도연맹이 분열로 연결된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13. 현재 국제태권도 연맹은 최중화 계열과 장웅계열로 갈라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