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iro Declaration
회담 당시의 사진.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쑹메이링(장제스의 부인)이다.
1 개요
1943년 11월 27일에 연합국 측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중화민국의 장제스 군사위원회 위원장[1]의 카이로 회담의 결과로 만들어진 선언으로 1943년 12월 1일에 발표되었다. 5일동안 이루어진 회담 이후 발표된 선언문에서 연합국 정상들은 승전하더라도 더 이상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을 명시했고처칠: 영토 확장을 안한다고 했지 식민지를 독립시켜준다고는 안했다 일본이 1차 세계 대전 후 중국,독일,러시아등에게서 불법적으로 침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연합국이 최초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영토 방침을 공식화한 선언.
여기까지만 보면 이후에 이루어진 얄타 회담같이 우리와는 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선언은 현대 한국사에서 크나큰 이유를 가지는데, 바로 한국에 대해서 종전 이후 앞으로 자유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를 하여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을 받았다는 것. 덧붙여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1945년 독일의 패전 이후 이루어진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됐다.
2 전문
2.1 영어[2]
President Roosevelt,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Prime Minister Churchill, together with their respective military and diplomatic advisers, have completed a conference in North Africa.The following general statement was issued:
"The several military missions have agreed upon future military operations against Japan. The Three Great Allies expressed their resolve to bring unrelenting pressure against their brutal enemies by sea, land, and air. This pressure is already rising.
"The Three Great Allies are fighting this war to restrain and punish the aggression of Japan. They covet no gain for themselves and have no thought of territorial expansion. It is their purpose that Japan shall be stripped of all the islands in the Pacific which she has seized or occupi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first World War in 1914, and that all the territories Japan has stolen from the Chinese, such as Manchuria, Formosa, and The Pescadores, shall be restored to the Republic of China. Japan will also be expelled from all other territories which she has taken by violence and greed.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With these objects in view the three Allies, in harmony with those of the United Nations at war with Japan, will continue to persevere in the serious and prolonged operations necessary to procure the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
2.2 중국어[3]
罗斯福总统、蒋委员长、丘吉尔首相偕同各该国军事与外交顾问人员,在北非举行会议,业已完毕,兹发表概括之声明如下:三国军事方面人员关于今后对日作战计划,已获得一致意见,我三大盟国决心以不松弛之压力从海陆空各方面加诸残暴之敌人,此项压力已经在增长之中。
我三大盟国此次进行战争之目的,在于制止及惩罚日本之侵略,三国决不为自己图利,亦无拓展领土之意思。
三国之宗旨,在剥夺日本自从一九一四年第一次世界大战开始后在太平洋上所夺得或占领之一切岛屿;在使日本所窃取于中国之领土,例如东北四省、台湾、澎湖群岛等,归还中华民国;其他日本以武力或贪欲所攫取之土地,亦务将日本驱逐出境;我三大盟国稔知朝鲜人民所受之奴隶待遇,决定在相当时期,使朝鲜自由与独立。
根据以上所认定之各项目标,并与其他对日作战之联合国目标相一致,我三大盟国将坚忍进行其重大而长期之战争,以获得日本之无条件投降。
2.3 한국어[4]
루즈벨트 대통령, 장개석(䉃介石) 대원수, 처칠 수상은 각자의 군사, 외교전문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의 회의를 마치고 이와 같이 발한다.수차에 걸친 군사 관계 회의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 앞으로의 군사작전들에 관해 상호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세 연합국(聯合國)은 잔인 무도한 그들의 공동의 적국들에게 해상과 육지와 그리고 영공을 통한 지속적인 압박을 가한다는 그들의 결의를(命)했다. 그와 같은 압박은 이미 가중되고 있다.
세 연합국은 일본(日本)의 침략을 제지하고 응징하기 위해 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한 영토 팽창을 위한 야심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목적은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래 일본이 강탈했거나 점령해 온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몰수하는 데 있으면, 또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모든 영토를, 예를 들면 만주, 대한 팽호 열도(대만 서쪽에 있는 군도-역주)등을 중국에 반환하는데 있다.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에 의해 탈취한 모든 다른 영토들로부터로 추방당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 세 강대국은 한국민(韓國民)이 노예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을 상기하면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5][6]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한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 연합국은 일본과 싸우고 있는 다른 국가들과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데 필요한 진지하고도 장기적인 군사 행동을 지속적으로 감행해 나갈 것이다.
3 여담
- 댜오위다오의 영유권을 놓고 한창 논란인 지금, 중국이 이 곳에 관한 자신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이 카이로 선언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으로 넘어간 영토 중 댜오위다오도 포함된다는 것. 일본은 전쟁과 상관없이 무주지를 편입한 것이라면서 무시하고 있다.
- 천수이볜 전 중화민국 총통은 총통 퇴임 직후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카이로 선언에 이를 발표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 장제스 당시 중화민국 주석의 서명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법적 효력을 갖지 않는 성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는 카이로 선언으로 대만이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고, 따라서 그 후신인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을 영유해야 한다는 당시 원자바오 중국 국무원 총리의 주장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발언한 것이다. 천수이볜뿐만 아니라 범록연맹 측 인사들 중 일부도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카이로 선언에는 법적 효력이 없고, 이후 포츠담 선언에서는 일본의 영토가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 및 그 근해 도서로 제한된다고만 규정했고, 대만의 귀속에 대한 규정을 따로 두지 않고 '카이로 선언은 이행되어야 한다'라고만 해두었기 때문에 대만을 일본이 포기한 것은 맞지만 대만이 어느 국가로 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항은 이 당시에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들의 근거이다.
- 장제스가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감명을 받아 이 카이로 선언에서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소문이 있다. 이게 백범일지에 있는데 백범일지가 의외로 신뢰성이 높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
- ↑ 국가원수 주식석직이긴 했지만 실권이 없는 직책이기에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최고기관인 군사위원회 수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 ↑ [1]
- ↑ [2]
- ↑ [3]
- ↑ 일본이 항복해도 곧바로 독립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승전국의 개입이 있게 될 것임을 뜻하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직후 미국, 소련에 의한 북위 38도선 경계의 한반도 분할점령 및 3년 동안의 군정으로 현실화되었다.
- ↑ 참고로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는데(테헤란 회담). 1943년 11월 28일 미·영·소 3개국 정상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이에 구두로 동의를 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