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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쑹메이링(宋美齡, Sòng Měilíng,[1] 송미령)(1897년~2003년)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이자 중화민국의 정치인. 장제스의 영부인으로만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정치에 개입했다.[2]
국부천대 이후에는 타이완에서 활동하다가 장징궈 집권 이후에는 권력에서 밀려나서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간간이 타이완에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1960년대 말에는 미국의 가장 존경하는 10인의 여성에 포함되기도 했다. 실제로 동양에서 가장 정치력 있는 여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특히 대미(對美) 로비 능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쑹메이링의 일가는 국부천대 이전 중국의 정치와 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네 가문인 4대가족의 일원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본토 시절
포크 모양 앞머리의 시초
감리교 목사이자 무역업자인 아버지 쑹자수(영어이름 찰리 쑹)의 3남 3녀 중 3녀로 상하이에서 태어난다. 신식 교육을 받았던 부친은 "여자도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며 세 딸을 모두 미국에 유학 보냈는데, 이때 쑹메이링 또한 언니들과 함께 도미하여 웰즐리 여자대학 (Wellesley College)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전공은 영문학사이며, 부전공은 철학이었다. 당시 교사의 평을 빌리자면 생각이 깊고 별로 활동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언니들이 쑨원의 비서로 일하게 된 것처럼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비서가 된다. 쑹칭링처럼 유부남인 장제스와 결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전처와 이혼하였다. 그 유명한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는데 이후 그녀는 장제스의 통역인이자 친구로서 그에게 힘을 주게 된다.
중화 민족 뿐만이 아닌 인류의 번영을 위해, 설령 실패할 위험이 있더라도 우리는 소중한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때에 왔습니다.(not for ourselves alone, but for all mankind......In order to preserve, uphold, and maintain them, there are times when we should throw all we cherish into our effort to fulfill these ideals even at the risk of failure.) 1943년 미 의회, 출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36년 시안 사건으로, 그녀는 남편인 장제스가 억류당하자 직접 현장으로 가서 장쉐량 등 주동자들과 담판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 이후 1943년 2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유창한 영어로 의회 연설을 하였다. 그녀는 중일전쟁에서 중국의 항일의지를 나타내었고, 더불어 미국의 지원 확대를 호소하였다. 이는 큰 호응을 이끌어 냈는데 중국인으로서는 첫번째 미 의회 연설이었다. "선교사가 중국에서 예수를 알렸다면, 쑹메이링은 미국에서 중국을 알렸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
2.2 국부천대 이후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와 함께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장제스의 영부인으로서 계속 활동했는데 주로 외교 쪽으로 활동했다. 장제스가 죽고 전처 마오푸메이 소생의 아들인 장징궈가 집권하자 권력에서 밀려났다. 쑹메이링과 장제스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밀려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중정기념당 개관, 2차 세계대전 50주년 기념식 같은 행사를 제외하면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정말 오랜동안 장수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1995년에는 2차대전 종전 50주년 기념으로 53년만에 다시 미 의회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 19세기, 20세기, 21세기 3개의 세기를 모두 경험하고 2003년에 107세로 사망했다.
2.3 에피소드
쑹메이링의 내면을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시안 사건같은 예외적 사건이 아니면 그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제스의 전처인 천제루가 자신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은 회고록을 출판했을 때에도 침묵을 일관했을 정도였다.
대단히 매력적이었던 여성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그녀의 매력에 대해 군말없이 인정했다. 쑹메이링을 본 장제스의 전처 천제루는 상하이 잡지화보에서 그대로 걸어나온 것 같다고 평했고 소련고문 보로딘은 한때 그녀에게 반해서 헤롱대기도 했다. 쑹메이링을 '황후 폐하'라고 부르며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여편네 정도로 봤던 미국의 장군 조지프 W. 스틸웰도 쑹메이링이 대단히 매력적이고 영리한 여성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며 미국 대사관 무관인 데이비드 배럿은 그녀를 숨구멍마다 매력을 발산하는 여인이라고 평했다. 그녀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172명의 기자와 부통령 헨리 월리스, 루스벨트 부부를 완전히 휘어잡았고 중국 전선을 개무시하던 미군 수뇌부는 쑹메이링 때문에 미국의 군사전략이 완전히 뒤바뀔지 모른다고 불안에 떨었을 정도였다. 1943년 카이로에서 쑹메이링과 만났던 처칠도 범상치 않고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쑹메이링을 표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녀를 요부라고 부르며 그녀의 곁에 앉는 것도 꺼려했다. 이렇듯 쑹메이링은 개인적인 매력이 대단했으며 자신을 민주주의의 수호자, 중국의 기독교 정신의 전파자. 반파시스트 투사로 포장하여 대단한 인기와 영향력을 얻어내곤 했다.
미국 대통령 부인인 엘러너 루스벨트와 절친했는데 이는 쑹메이링이 루스벨트의 아들 제임스가 중국 방문 중 위궤양 수술을 받고 입원했을 때 특별히 지시를 내려 몸조리를 잘 하도록 도왔기 때문이었다. 쑹메이링이 미국을 방문하던 중 늑골 부상과 위병으로 잠시 입원하자 엘러너 루스벨트는 3번이나 병문안을 오기도 했고 쑹메이링을 딸로 삼고 싶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장제스가 유독 독설과 욕을 많이 하는 바람에 통역을 담당하던 쑹메이링은 이 부분을 필터링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또한 장제스가 영미의 장성들에게 매우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요구와 의견을 서슴지 않아서 이를 무마하느라도 고생했다. 예컨대 장제스는 루이스 마운트배튼 장군을 만나서 연합국의 지원이 미비함을 질타했는데 마운트배튼 장군이 몬순 기간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물자를 공수하는 일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답변하자 장제스는 지금 중국에선 수천만이 아등바등 죽어가는데 내가 그까짓 몬순이라는 변명이 알게 뭐냐는 요지로 화를 냈고 장제스의 너무도 공격적인 발언에 당황한 쑹메이링은 마운트배튼에게 장제스가 몬순이 뭔지 몰라서 저러는 것이라고 변명했다. 물론 장제스가 몬순이 뭔지 모를 리가 없었지만 이후 장제스는 한동안 몬순도 모르는 무식쟁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장쉐량과 연인 관계라는 설이 있다.훗날 쑹메이링이 죽은 후 남은 편지에서 쑹메이링이 장쉐량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는데. 연금지의 장쉐량에게 보낸 편지가 남편 장제스나 장징궈, 자손들에게 보낸 것을 합한 것보다 많았다고...[3]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로 1966년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절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기도 했다(참고로 남편 장제스는 1953년에 받았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것과 별개로, 그녀의 개인적 지원이 20여년 만에 인정된 것이다.
사상 초유의 용병공군부대인 플라잉 타이거즈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 초반에 공군력을 상실했기에 군사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아직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미국인들을 설득해서 전투기, 파일럿들을 중국에서 돈 받고 모인 용병부대라는 형식으로 공군 부대를 창설했고, 바로 이들이 종전시까지 맹활약을 했다. 그 밖에도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방면에서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스틸웰은 쑹메이링이 중화민국의 국방장관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하기도 했다. 농담이 아닌 게 한때 중국 공군의 어머니라고 불린 적도 있었을 정도로 공군에 관심이 많았고 국민당의 웬만한 장군들 보다 국방분야에 끼친 영향력이 컸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 중국 국민당 내부에서 내가 국민당의 실권을 잡는 것이 쑹메이링 여사의 뜻이라는 소리가 두어번 나오기도 했다. 다만 위에서 언급했듯 본인은 정치에 관계를 끊어서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
3 매체에서
1997년작 중국 영화 <송가황조>에서 우쥔메이(邬君梅: 영어 이름 비비안 우)가 역을 맡았다.[4] 역사상으로는 정치 권력 기준으로 자매들 중 최강이었지만, 극중에는 부잣집 막내 아가씨 스타일의 모습이 대부분. 장만옥(쑹칭링 역)과 양자경(쑹아이링 역) 두 언니들의 존재감에 눌렸다 그래도 시안 사건에서 직접 담판에 나서 장제스를 구하는 장면이 나와서 어느 정도 체면 치레는 했다.
영화 현재 시점인 1981년에 이미 미국으로 이민 생활을 하던 중 쑹칭링의 위독 소식을 전달받고 중국행을 준비했지만, 출발하기 전에 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나지만 이는 영화상의 설정이다. 쑹메이링은 장제스 사후로 칩거하여 바깥 활동을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았고 고의적으로 무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쑹메이링은 자신과 관련된 기록을 일절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미상이다. 심지어 장제스 사후로 둘째 부인 천제루가 장제스와 쑹씨 일가을 비판하는 회고록을 저술했을 때에도 반응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2009년 중국 공산당 현창 영화 <건국대업>에서도 짧게나마 출연을 하는데 역시 우쥔메이가 연기하였으나- 비중은(...)
- ↑ 영어권에서는 '장제스 부인'이란 의미의 '마담 창카이셱'(Madame Chiang Kai Shek)이라는 호칭으로도 불린다.
- ↑ 전당포 사업으로 재력이 좋았던 쿵상시와 결혼한 큰 언니 쑹아이링은 돈을 사랑한 여인, 쑨원의 두번째 부인이 된 둘째 언니 쑹칭링은 인민(혹은 중국)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중국에서 불리운다.
- ↑ 실제로 장쉐량도 오랜 연금에서 풀려나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건 쑹메이링 덕이라 하였다. 쑹메이링이 남편 장제스에게 장쉐량을 살려둘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게 정설이다. 둘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 내용도 그렇고.)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장제스 입장에서 대미 창구 역할을 하던 부인 쑹메이링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었다는 것
- ↑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의 후궁 운슈(자금성에 쫓겨난 후 이혼하여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떠나는 모습의 그 여인) 역으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