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역사

카자흐스탄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1 고대

실크로드 초원길이 지나는데다 사방이 넓게 펼쳐진 초원 지역이다 보니 예전부터 많은 민족문화교류하였다. 고대 도시의 대다수는 이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밀집해 있다. 아무래도 카자흐스탄의 다른 지방들이 사막지형이고 실크로드 주변에 큰 강이 많았고 또 경제활동이 잦았기 때문이다.

고고학유물을 대략 살펴보면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는 청동기 초기 문화가 발견된다고 한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스키타이의 일부인 사카(saka) 부족이 알타이산과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방대한 스텝 초원을 지배하였다고 한다. 1969~70년 알마티 인근에 위치한 고분에서 발굴된 이들의 유물 '금삐까 황금 인간'(The Golden Man)'은 카자흐스탄 최고의 고고학 유물이며, 현재 카자흐스탄의 국가 상징이기도 하다. 사카 부족의 인종은 유럽인에 가까워 이 시기의 카자흐스탄 영토에 살고있던 사람들은 유럽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기원전 200년경에는 흉노족이 몽골 초원에서 동부 카자흐스탄으로 건너왔으나, 그들이 서쪽으로 이동한 후에는 서기 550년부터 750년까지 튀르크계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유럽인의 모습을 많이 보였던 카자흐스탄 거주자들의 피에 동양인의 특징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양인의 색은 13세기 칭기즈칸의 침략으로 굳어지게 된다.

2 중세

이후 1218년부터 1221년까지 칭기즈 칸이 이 지역을 정복하였고 이후 킵차크 한국, 차가타이 한국 등의 지배에 들어갔다. 카자흐족은 본래 킵차크 한국의, 우즈벡 울루스에 속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아불 하이르 칸의 정책에 반대하여 뛰쳐나온 사람들[1]이다. 이들이 3개의 한국으로 나뉘게 되면서 300년간 다른 지방 호족들을 흡수하여 봉건화된 카자흐 국가를 이루었으며 이는 18세기까지 이어진다.

18세기 중엽에 봉건제후간의 전쟁으로 약화된 이들 한국은 준가르의 침입을 받고 1731년 러시아 제국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본격적인 러시아와의 합병이 시작되게 된다. 러시아는 카자흐 국경지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오렌부르크등의 소도시를 건설하는 등 서부 카자흐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19세기 초에는 카자흐스탄 북부와 중부지역에 8개의 러시아식 행정구역을 두어 지배하에 두었다. 결국 1860년대에 이르면 반러시아 폭동등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 전역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들 지역은 1917년 러시아 혁명적백내전 기간동안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키르기스 자치 공화국의 일부로서 편입되었다. 이후 1924~25년부터 추진된 민족구성을 바탕으로 한 자치 공화국 구성 개편으로 1925년 4월부터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으로 명명되고, 이후 1936년 12월에 카자흐스탄은 소련의 구성 공화국으로 승격된다.

3 현대사

소련의 계획경제 하에서 카자흐스탄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통한 상업의 발전과 집단농장화가 시작되었고, 1940년대 초가 되면 모든 농토의 97%가 집단농장화되었다. 이후 1950년대 후반에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처녀지 개간의 명분으로 러시아인들의 이주정책을 폈고, 1960년대 초가 되면 당시 930만 카자흐스탄 인구 중 43%가 러시아 인이고 29%가 카자흐인이라는 구성이 나올 정도가 된다.

소련 시절에는 역시 소련 밑이 아니랄까봐 소련의 핵실험이 이 나라의 세미팔라친스크 변두리에서 이루어진 슬픈 역사도 있다. 핵실험이 끝난지 수십년뒤 핵실험지 주변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참극을 KBS세계는 지금에서 취재한적이 있는데, 핵실험후 발생한 돌연변이들의 포르말린이 전시된 모습도 보여주어서 많은 이들의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후 동구권 개방의 여파를 타고 1989년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1990년 4월에 대통령직에 올랐고 고르바초프와 더불어 가장 오랜 시간 소련 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대세를 바꾸지 못하고 1991년 12월 16일 가장 늦게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12월 21일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게 된다. 지금도 카자흐스탄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들어가 보면 '아 소련이 좋았었지' 같은 글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도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잦아드는 추세이다.

1992년에는 국제연합에 가입하였고 1993년에는 헌법을 채택하고 1995년에 개정하였으며 1997년 12월 10일에 수도를 아크몰라(현 아스타나)로 이전했다. 이후 2007년 5월에 헌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규정을 둔다고 개정했으며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연 평균 10%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2005년에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91%의 지지율로 당선되었고 야당이 지리멸렬한 사태라 여당인 누르-오탄당의 정국주도가 이어지고 있다. 2010년 6월에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해 퇴임 후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가결되었고 카자흐스탄 상, 하원에서 2011년 4월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 2020년까지 임기연장하는 국민투표를 시행할 것을 가결했다가 서방의 강력한 항의로 무산되어 2011년 4월에 대선을 치루었는데 여기서 95.55% 득표율로 당선, 투표율 89.99%, 총 유권자는 920만 명이었다고. 이렇게 된 이유가 야당들이 충분한 선거기간을 주지 않았기에 불참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후보들은 2% 득표율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4월 8일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다시 취임하게 되었으며 2016년에 있을 대선에도 출마예정이라고 한다. 대통령 자신은 2030년까지 집권하겠다고 공언하는 상태. 이렇게 되면 40년 집권이 되며, 역사상 6명 밖에 없는 독재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때가 되면 나이도 아흔이 될 듯.

2016년 대선을 2015년 4월로 앞당겨 대선을 치렀다. 루블화 폭락으로 인해 2014년 2월 텡게 평가절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상황이 오자 '이제까지 대통령이 취임기간동안 평가절하를 2번씩이나 한 경력이 없다. 새 대통령이 해야한다.'며 조기대선을 시행한 것이다. 그리고 득표율 97.7%로 재당선.

2012년 1월부터 유라시아 연합 회원국이 되었다.

2014년 4월 트위터는 물론 휴대전화도 차단하려는 정부 방침이 논란이 되고 있다. 물론 시민들의 반대도 일부 있지만 정부의 거수기에 불과한 의회가 이미 개정 법안을 모두 승인하고 대통령 서명만 기다리는 중이라 그대로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1. 때문에 처음에는 우즈벡-카자흐인들이라 불리었다. 여기서 카자흐란 '도망자'라는 의미. 코사크 역시 카자흐에 어원을 둔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카자흐와 코사크를 구분하기 위해 카자흐를 뜬금없이 키르기즈라 불렀다. 진짜 키르기즈는 카라 키르기즈라고 부르고. 이는 1920년대까지 사용되었는데, 때문에 이슬람 백과와 같은 책에서는 키르기즈 항목에서 카자흐 국가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