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역사 | |||||
고대 | 중세 | 근현대 |
중세 몽골의 역사 | |||||
요나라 | |||||
카마그 몽골 | 케레이트 | 메르키트 | 타타르 | 나이만 | |
몽골 제국 | |||||
킵차크 칸국 | 오고타이 칸국 | 차가타이 칸국 | 일 칸국 | 원나라 | |
이흐 칸국 | 티무르 제국 | 북원 | |||
오이라트 | |||||
준가르 | 청나라 | ||||
청나라 시대 |
푸른 선으로 둘러싸인 영역이 준가르.
(1634~1758)
몽골어: Jegün-ghar, Зүүнгар/Züüngar(현대 몽골어)
영어: Dzungar
중국어 정체: 準噶爾(준가얼, 준갈이)
1 개요
오이라트계 유목민족의 최후의 불꽃. 청나라 서북부 신장-위구르 지역과 카스피해, 그리고 외몽골과 티베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최후의 유목제국[1]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유목제국이지만 기병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화약과 무기를 생산하며 농업을 시작할 정도로 시대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준가르 기병 | 준가르 전사들 |
2 역사
2.1 기원
기원은 예니세이 강 유역에 거주했으며 튀르크의 혈통을 많이 타고난 몽골인들이다. 주로 수렵과 목축을 하며 살았다. 12세기 경에 칭기즈 칸에게 정복당하여 4만 호로 편성되었다. 하나의 부족으로 통일된게 아니며 초로스, 토르구트, 호이트, 호쇼트와 같은 수많은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몽골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원나라 때는 우대받았다. 하지만 원나라가 멸망하고 몽골 초원으로 쫓겨남에 따라 부족들끼리의 내분으로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웠다. 특히 알탄 칸을 반대하여 그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하여 이르티시 강으로 쫓겨나 50년동안 그곳에서 숨어살아야 했다.
2.2 청나라의 등장
만주족인 청의 등장은 북방 유목민족의 흥망을 바꾸게 된다. 계속되는 내분과 청의 정벌로[2] 몽골은 사실상 분열되고 정복되거나 힘을 못 쓰는 상황이였다. 그 반면 중국 서쪽의 오이라트는 준가르를 중심으로 뭉쳐서 단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도자로 갈단이 등장하면서 이후 청조에게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다.
청군과 준가르군의 전투.
결국 서역의 교역로를 안정화하고 몽골과 티베트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희제는 오랜 준비 끝에 준가르 원정에 나서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는 하나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해 결국 얻은 성과는 미미했다. 갈단이 죽은 후에는 체왕 랍탄이 뒤를 이어 전성기를 구가하여 카자흐스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준가르 제국에 로망을 느끼는 이들도 있으나 애석하게도 준가르 제국의 국력은 인구수나 농업 생산력으로 러시아나 청조에 비하면 여전히 약한 수준이였다. 게다가 기술력에서도 뒤쳐져 있었다.
2.3 준가르의 반격
하지만 그렇다고 청에게 일방적으로 당한것은 결코 아니었다. 옹정제 때 청나라 변방의 목마장들을 공격해 말을 대량으로 털어가고 청의 몽골 영토인 투르판을 계속해서 공격하여 청나라를 놀라게 했다. 이때문에 청의 대신 악종기는 준가르 쪽의 변방에 30만의 대군을 투입하야 한다고 16차례나 옹정제한테 건의했으나 옹정제는 그건 너무 많다며 망설였었다. 그러다 하도 심해지자 악종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20만의 병력을 파견했으나 초반에 준가르의 유인전술에 넘어가는 탓에 큰 패배를 당하고 만다. 얼마나 심했냐면 장수들이 절망하여 자살하고 준가르군의 공격에 5만이나 사망할 정도였다. 이 패배는 옹정제도 빨리 안족친것을 후회할정도였다. 이때의 패배로 투르판의 청군은 준가르군한테 크게 당하고 살아 청에게 골칫거리였다. 그나마 청의 몽골출신 장수인 책통이 침공한 준가르군 1만을 격퇴하는 전공으로 저지한 탓에 영토를 유지할수 있었다.
여하튼 세력이 팽창한 준가르는 과거 비슷한 유목제국을 세운 몽골처럼 후계자 문제로 내분크리가 작렬해 약화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건륭제가 즉위하고 청나라는 준가르가 자꾸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일삼자 빡쳐서 이전과는 다른 철저한 준비 끝에 본격적인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압도적인 청의 국력과 내분이 겹친 준가르는 결국 후계자 싸움에서 역전을 노린 아무르사나의 투항으로 청에 복속된다. 그러나 청이 한고조의 토사구팽을 거울삼아 준가르 땅을 4명의 대등한 칸을 세워 분할통치하려하자[3] 자기가 혼자 대빵이 될 거라 생각했던 아무르사나가 반발해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한번 배신했는데 두번을 못하겠어? 물론 이미 대세가 기운 판에 상대가 될 리 없었고 아무르사나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갔으나 결국 이역만리인 러시아에서 죽게 된다.
2.4 인종 청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가르가 계속 반란과 저항을 하여 청에게 피해를 입히자 단단히 빡친 건륭제는 복속시킨다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멸종시키기로 결정해 항복도 받아주지 않고 주도면밀한 준가르 족 학살을 시작했다. 비록 중국 사서에서는 준가르 족에 대한 멸종 시도를 발뺌하고 있긴 하나 학살하는 장수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죽이진 않고 밖으로 내쫓는 장수들에게는 벌을 줬다는 것에서 이미... 결국 준가르 족은 도망치거나 학살당해 사라진 민족이 되었다. 몽골 제국이 서하한테 대학살 벌였던 것처럼 오히려 자기한테 되돌아오네 몽골 제국의 업보[4]
2.5 러시아의 학살
여하튼 이후 같은 오이라트 민족이였지만 카스피해 인근 지역으로 떠나서 살던 준가르 부족인 칼믹들이 준가르 족이 소멸되어 사라진 땅에 다시 돌아오길 청원하자 건륭제는 이 지역에 자신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기회라 여기고 허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배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군대와 휘하 다른 유목민족을 동원해 이들을 잡아죽이려 했다. 특히 준가르를 싫어하던 카자흐인들과 키르기스인들은 준가르인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도 준가르인 학살을 시작했다. 이동하던 준가르인들은 카자흐인, 키르기스인이 포함된 러시아군의 기습으로 9천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했다. 물론 준가르인들도 러시아군에게 저항하며 격퇴하기도 했지만 전원이 전투병이고 보급까지 받아 여유가 있는 러시아군과 달리 준가르인들은 식량과 무기사정이 좋지못한데다 여성과 아이들이 같이 있었기에 맞서 싸울때마다 피해가 막심했다.
러시아군 역시 청나라처럼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무조건 죽여버렸다. 특히 러시아의 준가르 학살도 청나라만큼 주도면밀했는데 숲과 초원에 불을 지르고 산짐승을 죄다 잡아서 준가르인들이 가져갈만한 식량과 땔감, 가축 사료를 철저하게 없애버렸다.[5] 게다가 계절까지 겨울이라서 식량차단의 효과는 더욱 좋았다. 무엇보다 준가르인들을 추격해서 족치기 쉽도록 전원 기병으로 편성했기에 추적해서 족치는게 더욱 쉬웠다. 그러다보니 준가르인들은 러시아군을 피해서 사막이나 늪지로 가야만했는데 이곳을 지나간다는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 늪지에서만 3천여 명이 죽고, 바람이 끝도 없이 불고 눈이 내려 하루에 십리를 가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휘하의 카자흐 기병대와 키르기스 기병대를 시켜 여기까지 추격해와서 공격했기에 이들과의 전투때마다 많은 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러시아군은 공격하면서 사막과 늪지에서도 숲과 초원에서 했던 식량차단 전술을 잊지않고 하니 준가르인들의 사망자를 더욱 늘렸다. 더구나 그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도 러시아군의 사주를 받았던 탓에 준가르인들을 공격해왔다. 아니 위에는 준가르족이 소멸되었다면서 왜 또 등장하는지?
2.6 멸족
결국 이들 오이라트의 마지막 후예는 다시 8만명만이 준가르 분지에 돌아오긴 했으나 당연히 이곳의 주인이 된 청나라가 가만두지 않아 그들과의 계속된 전투와 학살, 질병, 기아 등으로 남성 대부분이 사망하여 떠나올때 17만이었던 인구가 고작 6만 9천 정도만이 살아서 청의 용서를 받아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때 투항한 준가르 생존자들이 얼마나 비참했냐면 이들을 받아주던 청나라 관리 서현덕이 건륭제에게 보고할때 이렇게 묘사할 정도였다.
투항한 자들을 살펴보니 노약자나 부상자,아녀자들이 많았는데 ,너나 없이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들이 우리주둔지로 들어온 후 모두들 통곡하고 애원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의 참혹하고 궁핍한 모습을 보면서 실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이 제대로 없었으며, 그나마 입고있던 옷도 다 찢어지고 아이들은 아예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이도 부지기수입니다. 도중에 극도의 기아에 허덕였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고기를 포식한 후 온몸에 열이 나자 물로 뛰어 들어 배가 불어 죽거나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생존자들 역시 대부분이 여성이라[6] 청에 충성하는 몽골인, 위구르인과 동화가 되어 준가르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터라 준가르는 완벽하게 멸종되었다. 이렇게 준가르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후 투르키스탄의 부르하 앗딘과 호자 지한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긴 했으나 결국 완전히 평정되고 티베트에서 신장-위구르, 외몽골에 이르는 모든 영토가 완전히 복속되어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건륭제는 십전노인이라는 명성을 위해 준가르 지방 원정의 공로를 쪼개 여러 개의 원정으로 둔갑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게다가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평화롭게 정벌했다는 '평정'으로 미화까지 했다. 물론 준가르한테 얼마나 질렸던지 건륭제는 중국 내에서 준가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이후 이 지역에 원래 살던 준가르 족이 사라지자 위구르 인들이 번영하게 된다. 참고로 청의 침략하기전 이 지역에 살던 준가르인이 60만, 위구르인들이 37만 정도였다. 이러니 청한테 도전한게 애초부터 무모한 짓이었던 셈. 그래서 준가르인은 건륭제의 정복과 제노사이드로 최소 80%, 추산으로 90% 이상이 사망(...)- ↑ 청나라도 같은 유목민 계열 왕조인데다가 준가르와 달리 20세기 초인 1912년까지 지속되었으니 청나라야말로 가장 최근까지 살아남았었던 청나라야말로 최후의 유목제국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던 만주족은 후금이 막 건국될 당시 이미 유목생활은 반쯤 접고 농업과 수렵 그리고 타민족과의 무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을 뿐더러 중원을 완전히 점령한 후 강희제 치세를 기점으로 점차 중국화되면서 전형적인 유목제국으로서의 모습은 많이 없어진 상태였다. 특히 만주족들이 언어, 문화적으로 한족에 거의 동화된 채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만 간신히 유지하던 청나라 말기엔 변발과 호복을 제외하면 이게 어딜 봐서 유목제국인가 싶을 정도로 심하게 한화되어버렸다.
- ↑ 청으로선 반드시 족쳐야하는 것이 변방을 자꾸 약탈하는 몽골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두고두고 골칫거리라서 그렇다.
- ↑ 이는 몽골과 위구르, 티베트도 이렇게 했다.
- ↑ 준가르가 몽골족이긴 하나 몽골제국의 주류부족은 아니었다. 몽골제국의 주류부족은 칭기츠칸의 혈통을 이어받은 할하와 차하르인데 이들은 이 시기에 이미 청나라에 복속되었으며 준가르가 포함된 오이라트계는 칭기츠칸 혈통이 아닐 뿐더러 원나라 멸망 이후 할하와 차하르에 대항하여 성장하였다.
- ↑ 심지어 숲과 초원에 식량을 구하러가던 준가르인들이 그들이 놓은 불에 많은수가 타죽기도 했다.
- ↑ 왜냐면 원래 전쟁을 많이 하면 군인들이 많이 죽어서 나라가 자연스럽게 여초국가가 되어 버린다. 당장
나무위키의 서버를 소지하고 있는파라과이가 3국 동맹 전쟁이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아직도 여초국가다. 거기에다가 청나라군과 러시아군은 종족의 보존을 끊으려고 남성과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학살했기 때문이다. 이러니 남자는 아예 씨가 마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