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어: Нұрсұлтан Әбішұлы Назарбаев (Nursultan Äbişulı Nazarbaev, 누르술탄 애비슈울르 나자르바예프)
러시아어: Нурсултан Абишевич Назарбаев (Nursultán Abíshevich Nazarbáyev, 누르술탄 아비셰비치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국민이 나를 지지하고, 나에게 자리를 허락하여 주었기 때문에 지난 26년 6개월 동안 대통령으로 일할 수 있었다."
1 개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그를 독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2 생애
1940년 7월 6일 생 (77세)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근처의 샤말간(Шамалған)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엔 철강 노동자로 일했으며, 1962년 공산당에 들어갔으며, 1984년 카자흐스탄 각료회의 의장에 올랐다.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30년 가까이 앉아 있던 딘무함메트 코나예프(Дінмұхаммед Қонаев)를 자르고 러시아인 겐나디 콜빈(Геннадий Колбин)을 서기장에 앉혔으나, 이 때문에 카자흐인들의 데모가 일어날 뻔 했다. 이후 콜빈이 물러나고 나자르바예프는 1989년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고, 1990년 4월 24일에 카자흐스탄 독립 후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했으며 그대로 당선되었다.
그는 국민투표로 1991년 임기를 연장했고, 부정부패로 얼룩진 선거로 81%라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받아 1999년 재선되었다. 2005년 선거에서 그는 91.1% 지지율로 재선되었으며 역시 부정선거라고 국제사회와 야당의 비판을 받았다. 2007년 총선에선 여당인 누르 오탄당(Нұр Отан)이 88.0%의 득표로 국회의석 98석 중 98석을 차지하는 위엄을 보여줬다. 그는 2011년 대선에서 95.5% 지지율로 재선되었고, 2012년 총선에서 누르-오탄 당은 여전히 80%가 넘는 수상쩍은 고득표를 보였으나 이번엔 야당이 15석을 얻었다. 2015년 선거엔 당연히 출마해서 97.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20년 4월 24일에 대통령에 물러날 예정이다.
2015, 2016년 러시아 전승 기념일 열병식에도 참석하였다. 또한, 2015년 퍼레이드에서는 카자흐스탄군도 행진했다.
3 독재 정치
그럼에도 카자흐스탄은 2000년대 들어 연평균 10%에 가까운 고도 성장을 통해 1인당 GDP는 1992년 169$에서 2012년 11,983$까지 성장하는 등 천연자원빨로 발전을 이루었다. 전형적인 개발독재다. 그는 오히려 서방국가들이 다른 나라에 서방의 가치를 주입하려 한다면서 혁명이 일어나면 경제 발전이 후퇴한다거나 이슬람 국가에서 혁명을 통해 정부들이 샤리아에 기우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부를 비판했다고 알마티 시장에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살해하는 게 카자흐스탄의 아름다운 가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그가 집권하는 카자흐스탄의 부정부패는 엄청나고 그의 독재는 심각한 수준이다. 카자흐스탄의 일부 유권자들은 자신의 직장의 고용주 등이 나자르바예프를 투표하라는 강요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2010년에는 여권이 차기대선을 없애고 2020년까지 그의 임기를 보장하자는 국민투표안을 제안해서 서방의 강한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 2015년 대선에서는 모든 후보의 방송 및 지면을 통한 공약설명이 보장된다고 말했으나... 정작 현지에서는 나자르바예프의 목소리만 들렸으며 심지어 대다수 유권자는 다른 후보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야당 탄압과 언론 통제를 계속하고 있는데. 그는 초대 대통령에 오른 직후 정적 감시를 위해 자신을 향한 야당 및 언론의 비판을 불법화했고, 모든 사회단체에 대한 의무등록제를 시행했다. 그리고 반정부 성향의 인사들에 대한 체포와 투옥을 계속했고, 카자흐스탄 정보기관과 체코 수사당국이 시민들의 개인 스마트폰 대화 내용을 감시하는 데 해킹 프로그램을 사용했다는 폭로도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독재 권력으로 대통령과 친인척들이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한때 카자흐 대통령의 가까운 신뢰를 얻었던 일리예프가 훗날 카자흐스탄의 비리에 대해 폭로한 적이 있었다. 일리예프는 카자흐스탄 정보국의 부국장이었으며, 카자흐스탄 세무당국의 고위 공직자이자, 주 오스트리아 대사였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나자르바예프의 사위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2007년 그와 그의 가족은 누르슬탄의 총애를 잃고 납치와 정부전복 혐의로 궐석재판을 받아 징역 40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살인과 고문, 돈세탁혐의로도 기소되어 빈과 독일북부도시인 크레펠트의 검사들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알리에프는 혐의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혐의 중 일부 혐의들이 대통령의 짓이라며 대통령을 고발했다, 알리에프에 따르면 나자르바예프는 야당세력에 대한 고문과 살인 등을 저지르고 있으며, 수조 달러의 거액을 훔쳐 해외의 비밀 계좌에 숨겼다고 하며, 실제로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나자르바예프 가족의 자산은 7억 달러(약 7천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특히 그의 통치 중에서 비판 받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자나오젠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대에 대한 탄압이다. 2011년 12월 17일 누르슬란 나자르바예프는 카스피해와 가까운 서부 석유산업 도시 자나오젠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나자르바예프는 "평화와 평온을 저해하고, 우리가 독립을 통해 성취한 것들을 망치려는 시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시위를 강경진압했다. 자나오젠의 석유 노동자들은 지난 5월 위험수당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벌였는데, 이에 국영 석유회사는 그 중 989명을 해고했고 노동자들이 반발하자 경찰이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하고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체포한 사건이다. 자나오젠의 한 현지 주민은 "시위대 3명이 사살당하는 것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이게 퍼져나갈 것을 감추기 위해서 카자흐스탄 정부는 자나오젠 지역에 대한 인터넷 연결을 차단했다. 기사
근데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2011년 카자흐스탄에서 일어난 자나오젠 사태와 관련하여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게 대응 방안을 조언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 자나오젠 사태는 2011년 12월 카자흐스탄 서부 자나오젠에서 경찰이 비무장 파업 노동자들을 강경 진압해 최소 14명이 숨진 사건을 말한다. 이에 토니 블레어가 카자흐스탄의 엄청난 인권 문제들은 외면한 채 독재자를 위한 원고를 써주고 수백만 파운드를 받았다니 수치스럽다고 비판했다.
또한 지난 2010년에는 카자흐스탄 의회가 국가지도자법을 제정하기도 했는데, 이 법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국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했으며 재임기간에 벌어진 어떤 형사상, 민사상의 책임을 묻지 못하도록 정해진 법이였다. 또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가족의 재산권을 영구적으로 보장해 국제사회로부터 사실상 종신 대통령의 권한을 부여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샀다. 기사
2014년 4월에 트위터는 물론 휴대전화도 차단하려는 정부 방침이 논란이 되고 있다. 독재체제의 기본 옵션인 언론통제를 충실히 시행하는 중. 물론 시민들의 반대도 일부 있지만 정부의 거수기에 불과한 의회가 이미 개정 법안을 모두 승인하고 대통령 서명만 기다리는 중이라 그대로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 법에 의하면 앞으로 카자흐스탄 검찰은 국가나 사회에 유해하다고 판단될 때 인터넷 및 통신 사업자에게 접속차단을 요청할 수 있으며, 해당 사업자는 통보를 받고 1시간 이내에 사용자의 접속을 차단해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관계기관과 사업자는 법적 책임을 지게 되며, 허위사실 유포자에 대한 처벌을 징역 12년으로 강화하고 정부 또한 국가비상사태 시 언론보도를 사전 검열키로 하는 법이다. #
또한 카자흐스탄은 대표적인 기독교 탄압국으로 오래 전부터 가정에서 진행되는 예배와 국가의 허가 없이 운영되는 교회에 대해 꾸준히 단속을 해오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침례교 목사인 안드레이 파나피딘 같은 경우는 2011년 3월 4일, 타라즈시에서 불법 비등록 교회를 운영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평균 임금 100개월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벌금을 선고 받기도 했다. 심지어 이 사람은 이렇게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 받은 것이 처음이 아니라 과거에도 이미 7차례나 벌금을 부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정부는 정부에 등록을 하지 않은 채 운영되는 교회는 당연히 법률 위반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파나피딘 목사 말고도 이런 식의 단속의 사례는 다수 확인된다, 카자흐스탄의 잠빌지역에서도 지하교회의 단속이 있었고, 쉼켄트에서도 새생명오순절교회가 가정에서 예배를 진행하다가 단속을 당했다. 교회의 대부분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등록을 하고 싶어도, 당국에서 좀처럼 등록을 받아주지 않다보니 등록이 어렵다고 하소연하지만, 일부 강경한 교파에서는 등록제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등록서류 제출조차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KGB의 후신 격인 보안당국의 압력 때문에 알마티에 있는 한 대학이 대학 구내에서 기독교를 비롯한 몇몇 종교의 집회를 무조건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물론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스타일이 독재적이라는 지적을 강력하게 부인한다고 물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본인도 안 밎는 마당에
4 막장 독재자인가?
다만 나름대로 나라를 발전시키고 통치를 잘한 것도 사실이라 우즈베키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 북한처럼 완전한 막장은 아니고 그냥 러시아나 중국과 비슷한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결국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의 충돌이 내전으로 발전해버린 우크라이나, 많은 지하자원과 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국민 생활수준은 게걸음을 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과 비교해보면 무능한 독재자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먼 옛날부터 유목민의 터전인 카자흐스탄은 정주민족의 땅 우즈베키스탄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족했고,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나라였던 소련 시절까지만 해도 타슈켄트가 중앙아시아의 중심이었고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은 척박한 변방에 불과했는데 소련 붕괴 이후 불과 몇십년 동안에 극적으로 역전된 것이 컸다.[1] 이웃나라의 법칙은 여기서도 적용되기에 우즈벡인들의 박탈감은 더욱 컸고, 나자르바예프는 엄청난 인기와 지지를 얻게 되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경제는 아무리 자원빨이라 해도 빠르게 잘 성장했고, 이로 인해 러시아인 및 다른 민족들도 큰 불만 없이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전국민 가운데에서 카자흐인이 차지하는 비율을 성공적으로 늘렸다. 그리고 이러한 업적들에 힘입어 카자흐어 보급률도 꽤 많이 끌어올렸다.
간단히 정리하면, 전형적인 개발독재자이며, 독재자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업적도 있는 인물이다. 발트3국을 제외한 구소련 국가들의 국가 지도자들 가운데에서 '그나마 개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외교적으로는 기본적으로 친러, 친중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에만 기울어 있는 건 아니고, 서방과의 관계도 신경을 쓰는 편. 러시아는 두말할 필요 없는 가장 확고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동맹이지만 러시아 특유의 대러시아주의에 카자흐스탄의 주권이 침해받을 것을 우려하고 있고, 중국 또한 그 엄청난 경제적 영향력으로 카자흐스탄이라는 국가 자체를 잠식하다시피 해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2] 서방과의 관계는 상술한 막장 독재 때문에 욕을 자주 먹지만 사실 천연자원이 워낙 쩔어주는 나라라서 꼭 그렇지만도 않다. 서방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과 웃으며 사진 찍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에 적극 협조하고 군대를 파병하는 등 친중, 친러 정책을 취하면서도 한편으로 서구를 끌어들여 인근의 두 강대국을 견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특히 주권에 관련해서는 아무리 러시아 라고 해도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3]
5 트리비아
한국 날짜로 2013년 9월 1일 토요일, 자신의 손자의 결혼식 축하 파티에 비욘세랑 칸예수(..)카녜 웨스트를 30억을 주고 초대했다. 국민의 혈세? 그거 먹는 건가요? 우걱우걱 축하 알바 한 번 뛰고 30억 받는 비욘세랑 카녜도 여러모로 대단한 건 안 자랑 문제는 이날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져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면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1년 영국 가수 스팅은 카자흐스탄 국영 석유기업의 노동자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생일 축하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2015년 9월에 자신의 장녀 다리가를 부총리에 임명했는데 다리가가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이란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대통령 자리를 세습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다리가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지난 2007년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국회에서 축출된 뒤 모스크바 볼쇼이 극단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다 2012년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와 국회에 재진출, 국회 부의장으로 활동해 왔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장녀 다리가 나자르바예바의 전 남편인 카커 알리예프는 망명길에 올랐다가 카자흐 당국으로부터 2007년 자신의 영향권 하에 있던 카자흐 은행 '누르방크'의 행장과 부하직원을 납치·살해한 혐의로 오스트리아에서 징역형을 살았는데, 카자흐스탄 정부가 송환을 요구했지만[4] 오스트리아 정부가 거부했다. # 결국 2015년 2월 빈의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옛 소련의 영광을 계승하자는 유라시아 연합 구상은 이 사람의 머리에서 처음 나왔다.
2006년에 교체된 카자흐스탄 국가의 가사 일부를 직접 작사했다. 물론 노래 자체는 1956년에 나온 노래이기 때문에 전체를 작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부분을 직접 개사했기 때문에 작사자에는 이름을 나란히 올리고 있다. 참고로 이전에 쓰던 국가는 카자흐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에 쓰던 국가의 곡조에 새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 비슷한 사례가 같은 이슬람권인 서아시아에도 있는데, 오늘날 석유 부국으로 이름높은 걸프 만 연안의 국가들은 원래 레반트 지역에 비하면 뭐 빌어먹을 것도 없는, 사막투성이의 헐벗은 동네였을 뿐이었다. 오스만 제국도 성지를 제외하면 신경도 안 쓰고 직접 반란만 안 일으키면 현지 부족들이 투닥거리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정도. 그런데 검은 황금이 빡 터지면서 전세 역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 ↑ 특히 정권은 친중이라고 부를 만하지만 일반 카자흐인 사이에서는 반중 감정이 엄청나다고 한다.
- ↑ 대러시아주의는 러시아 정치판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공통의 지지를 받는 견해이다.
- ↑ 물론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입을 막으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