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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코스 FC No.19 | |
에스테반 마티아스 캄비아소 델레아우 (Esteban Matías Cambiasso Deleau) | |
생년월일 | 1980년 8월 18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부에노스아이레스 |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
프로입단 | 1998년 CA 인데펜디엔테 |
소속팀 | CA 인데펜디엔테 (1998~2001) 리버 플레이트 (2001~2002) 레알 마드리드 CF (2002~200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4~2014) 레스터 시티 FC (2014~2015) 올림피아코스 FC (2015~ ) |
국가대표 | 52경기 5골 |
1 소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인테르가 세리에A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도록 한 엔진. 엘 꾸추(El Cuchu)[1]
파일:Attachment/handsome cambiasso.jpg
한때는 이런 훈남 시절도 있었다. 대머리여도 잘 생기기는 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선수로써, 2000년대 중후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최고이자 교본으로써 언급되는 선수 중 하나.[2]
이 경기의 두번째 골을 보면 오직 패스만으로 골을 넣었는데 그 골을 넣은 선수이다.
공수겸장의 만능 미드필더로 왕성한 활동량과 기민한 위치선정으로 상대팀의 패스 줄기를 끊어내고 순식간에 상대방 진영으로 치고 올라가 공격에 가담하는 플레이가 일품이었다. 태클이나 대인마크 등 수비적인 능력은 또 다른 월드클래스 수비형 미드필더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에게 뒤졌지만, 슈팅과 패스, 공격가담 측면에선 캄비아소가 더 나아서 포지션에 비해 공격포인트를 꽤 많이 쌓았다.
아르헨티나가 6-0 대승을 거뒀던 2006년 월드컵 조별리그 아르헨티나 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전에서의 두번째 골은 전성기 캄비아소가 어떤 선수였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위의 링크가 바로 그 경기.)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탈락했지만 캄비아소와 크레스포, 리켈메를 주축으로 한 아름다운 축구는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2007년 말에는 FIFA랭킹 1위에 오르기까지 했다.8강 독일과의 승부차기에서 실축했던 건 넘어가자
어릴 적엔 축구를 싫어하고 농구를 매우 좋아했고, 가족들도 농구선수가 되길 바랬다. 보카 주니어스에도 농구선수로 입단했지만 팀에서 축구를 하길 원하였고 페르난도 레돈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축구선수가 되었다.
2 활약
2.1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유스 출신으로써 1군에서도 콜업되어 간간히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 당시의 기량은 그다지 특기할만한게 못되었다. 워낙 쟁쟁한 선수들에게 밀려 출전 기회 자체를 잘 못잡은 것도 있지만 이때는 아직 기량 자체가 미숙했고 포텐이 만개하기 전이라 쓰기 참 애매했던 자원으로 분류되었기에 인터 밀란으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2.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입단한 뒤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은 캄비아소는 데얀 스탄코비치, 알바로 레코바 그리고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등과 팀의 미드진의 축으로 자리잡았다.
인테르가 세리에를 제패하던 시절. 즐라탄, 캄비아소, 마이콘.[3] 이 셋이 인테르의 공격진, 미들진, 수비진을 책임지는 세 축이었다. 08/09시즌 좀 더 후방배치 되면서 수비가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후에도 캄비아소는 종종(대표적으로 챔피언스리그 vs 맨유 어웨이에서) 활발합 오버랩과 공격가담을 보이며 전개를 이끌었다. 칼치오폴리이후 무리뉴 1년차까지 인테르가 공격전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어오면서도 세리에A를 정복할 수 있었던건 중원에서 버텨준 캄비아소와 우측면을 혼자 먹었던 마이콘의 공헌이 매우 컸다. 적절한 포지셔닝으로 세컨볼을 따내어 자연스레 점유를 가져가고(전성기 에메르손이 보여주던 플레이다.), 테크니컬한 수비로 상대의 공격을 컷팅하고, 동료에게 정확하게 가서 꽂히는 패스와 그것을 가능케하는 시야, 킥력, 전방에서 공격이 풀리지 않을땐 직접 2선까지 올라가서 공격을 풀어주는 전개능력까지. 가히 당대 최고의 수미라고해도 부족하지 않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트레블 시즌엔 스네이더의 영입으로 포백 앞 홀딩이란 비교적 제한된 롤을 받아서 되려 활약이 줄었을 정도.[4]
하지만 챔스 4강전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1차전에는 메시를 묶어내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고 2차전에는 챠비를 견제하며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를 무력화시키고 티아고 모타의 퇴장 후에는 챠비 이외에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리오넬 메시 사이의 패스를 끊어내며 팀을 결승에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기복없이 활약을 이어가던 캄비아소지만 구단주가 모라티에서 토히르로 바뀌면서 트러블이 발생했다. 4.5m 유로였던 연봉을 1.2m으로 깎으라는것이 재계약 조건이었고, 이를 받아들일수 없었던 캄비아소는 재계약을 거부 의사를 밝혔다.
2.3 레스터 시티 FC
자유계약이 된 캄비아소는 2014년 8월 28일 EPL 레스터 시티 FC와 1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9월 22일 맨유전에서 2-3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63분. 멋진 중거리슛으로 동점골 겸 EPL 데뷔골을 기록했다. 팀은 5-3 대역전승을 거뒀다. 이후 리그 31경기 출장 5골을 넣으며 팀의 프리미어 리그 잔류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전 문서에는 주목도가 높은 맨유전만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그 경기 전후로도 캄비아소는 쭉 좋은 활약을 보였다. 특히 리그 후반에 들어서 레스터시티는 3백으로 전환하고 이후 무서운 상승세를 타면서 강등권에서 리그 중워권으로 올라서면서 시즌을 마무리지었는데, 캄비아소는 그 레스터시티의 상승세를 주도한 선수 중 하나로 꼽혔다. 중원에서 보여준 변함없는 활약으로 캄비아소는 팬들이 뽑은 14-15 시즌 레스터시티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5]
당초 재계약이 유력시되었고 선수 본인도 재계약을 원했다고 알려졌지만, 심경의 변화가 발생해 레스터와 재계약을 거부하고 새 팀을 찾아나섰다. 나이젤 피어슨 감독의 갑작스런 경질이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예상된다. 한시즌만 더 있지...
그리고 캄비아소가 떠난 다음 시즌 레스터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했다.
2.4 올림피아코스 FC
2015년 8월 7일 올림피아코스 FC 이적이 확정되었다.
3 국가대표
명성에 비해 국제대회 커리어는 빈약한 편이다. 월드컵은 06년 독일대회 8강 진출이 마지막 무대였고 코파 아메리카 우승 경력도 없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때는 선발되지 못했다. 당시 마라도나는 이과인, 테베즈를 전방에 세우고 메시를 프리롤로 삼았으며, 측면에 막시 로드리게스와 앙헬 디 마리아를 주전으로 기용하고 중원은 마스체라노에게 맞겼다. 공수를 완전히 분리해서 원볼란치 마스체라노를 핵으로 삼는 전술이었는데 어차피 한명만 기용할거니 필요없다고 생각했는지 캄비아소를 제외했다.[6] 이때 또 다른 아르헨티나의 레전드이자 인테르 동료였던 하비에르 사네티도 니콜라스 오타멘디에게 밀려서 제외되었는데 아르헨티나는 8강에서 독일의 슈바인슈타이거에게 중원이 유린당하고 필립 람에게 우측면이 뚫려서 완패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구성을 살펴보면 마라도나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면 문제 없지만, 부상, 카드트러블 같은 불의의 상황이 닥치거나 경기가 예상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폭탄이 될 위험성이 굉장히 높았다.
왼쪽 풀백은 노련 하지만 기동력이 떨어져가던 에인세였고 안살디나 인수아같은 젊은 풀백을 뽑지 않았다. 오른쪽은 센터백인 오타멘디와 미드필더인 호나스 구티에레스를 뽑아서 전문 풀백이 없다. 실력은 최고지만 내구성에 의문이 있는 월터 사무엘, 파이팅 넘치지만 수비진을 리드할수 있는 선수는 아닌 마르틴 데미첼리스, 그냥 괜찮은 센터백이었던 니콜라스 부르디소, 2003년 이후 대표팀을 떠나있었고 마약 복용 전력이 있으며 유럽무대 실적도 미미했던 아리엘 가르체로 이루어진 센터백도 사무엘이 다칠 경우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았다.[7] 미드필더 진에선 전문 공격형 미드필더가 35살 노장으로 신체적 능력의 하향세가 완연했던 베론과 A매치 경력 일천한 파스토레 밖에 없었고, 마스체라노가 다치거나 카드가 쌓이면 대체할 수비형 미드필더도 없었다.
그리고 조별리그 1차전 나이지리아 전에서 베론이, 2차전 한국전에서 사무엘이 부상당하면서 마라도나의 플랜이 꼬이기 시작하다 독일전에서 터졌다.
캄비아소는 상술했듯이 공수겸장의 만능 미드필더로 마스체라노와 충분히 함께 쓸수 있는 선수고, 사네티도 좌우 풀백은 물론 윙백과 측면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어 감독의 전술 폭을 확 넓혀줄 수 있는 선수였는데, 아무리 마스체라노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다 하더라도 단기전에서 어떤 팀을 상대하고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니 옵션을 다양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큰 결정이었다. 더군다나 이해는 인테르가 이탈리아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한 해였다.
경쟁자라도 출중했으면 모르겠는데 페르난도 가고나 에베르 바네가도 아니고 마리오 볼라티, 하비에르 파스토레가 뽑혔다는 점을[8] 생각하면 일단 벤치에 두더라도 캄비아소를 뽑지도 않을 이유는 없었던지라 논란이 심했다.
마라도나가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고 세르히오 바티스타가 후임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왔고 캄비아소-바네가-마스체라노로 중원을 꾸린 아르헨티나는 스페인-브라질-포르투갈과 연달아 평가전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하지만 2011년 코파 본선에선 이도 저도 아닌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8강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 추장이라는 뜻이다.
- ↑ 다만 캄비아소의 기본적인 롤은 포백을 보호하고, 수비진에서 빼앗은 공을 안전하게 전진시키는(물론 요즘 각광 받은 후방 빌드업과는 다소 다른 개념이지만)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웠다. 타고난 축구 지능을 활용해서 슬금슬금 공격에 가담하는 능력이 일품이라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처럼 느껴졌을 뿐.
- ↑ 가장 공신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평점으로 봐도 2000년대 후반기 세리에 A 최고의 미드필더는 캄비아소라고 봐도 무방하다. 2000년대 이탈리아 최고의 미드필더인 안드레아 피를로조차도 리그 내 활약만으로 보면 캄비아소에 비교하기 힘들 정도. 물론 피를로는 유럽 대항전이나 국가 대항전에서 그 특유의 마왕스러운 경기 지배력을 보였지만.
- ↑ 다만 이 시즌은 인테르 미드필드의 밸런스가 워낙 좋았던 시즌이었다.
- ↑ 참고로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로는 제프 쉬럽이 뽑혔다.
- ↑ 쓰리백쓸때는 베론이 마스체라노 파트너로 들어갔으나 베론이 다치고나선 아예 마스체라노가 중원을 통째로 책임졌다.
- ↑ 에제키엘 가라이나 파블리치오 콜로치니같은 좋은 자원들이 있었지만 제외시켰다.
- ↑ 그나마 파스토레는 이후 팔레르모에서 활약해 거액을 받고 PSG로 이적하며 어느정도 잘나갔지만(그러나 국대에선 밀려났다.) 볼라티는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