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컵스로 귀환했을 때.
이름 | Kerry Lee Wood |
생년월일 | 1977년 6월 16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텍사스 주 어빙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5년 1라운드 전체 4순위 시카고 컵스 지명 |
소속팀 | 시카고 컵스 (1998~2008)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09~2010) 뉴욕 양키스 (2010) 시카고 컵스 (2011~2012) |
1998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신인왕 | |||||
스캇 롤렌 (필라델피아 필리스) | → | 케리 우드 (시카고 컵스) | → | 스캇 윌리엄슨 (신시내티 레즈) |
보유 기록 | |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 20개 |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경기에서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뽐낸 투수.
1 소개
시카고 컵스의 前 투수.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에이스였지만, 잦은 부상 때문에 이른 나이에 불펜 투수로 전업하게 된 비운의 스타였다.
2 선수 경력
2.1 충격과 공포의 리즈시절. 그러나…
움짤은 20K 경기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킬러B의 2번타자 데릭 벨을 잡아내는 장면.
유서깊은 텍사스산 파이어볼러 계보의 일원인 우드는 1995년 고졸 신분으로 시카고 컵스의 지명을 받고 마이너에서 담금질을 거쳐 1998년 데뷔했다. 아직 솜털도 보송보송했던 우드는 1998년 5월 6일 리글리 필드(사진의 그 경기 맞다)에서 생애 다섯번째 선발 등판을 했다. 그날 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사고를 치고 만다. 내셔널리그 처음으로 20탈삼진을 달성했던 것.[2] 이날 첫 이닝에서 킬러 B's 크레이그 비지오-데릭 벨-제프 배그웰을 모두 삼진으로 처리한 것을 시작으로 출루를 허용한 것은 비지오에게 몸에 맞는 공 하나와 리키 구티에레즈에게 맞은 유격수 방향의 내야 안타뿐이었다. 이 게임은 투수가 게임을 어느 정도 지배했는지 나타내는 게임 스코어에서 105점을 달성해 역대 9이닝 경기에서 1위[3]를 차지하고 있다.당시 게임 로그
우드는 98년 13승 6패 평균자책점 3.40에 233K/166⅔이닝으로 9이닝 탈삼진률 12.582를 찍으면서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랜디 존슨을 제치고 역대 1위를 마크하게 된다. 물론 바로 다음해에 페드로가, 페드로의 다다음해에 랜디 존슨이 깨긴 하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시즌을 보낸 우드는 토드 헬튼을 한표차로 제치고 신인왕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부상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4]
첫 해의 퍼포먼스를 뒤로하고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되어 99년을 날렸고, 이후로도 매년 20경기를 조금 넘는 등판 횟수에 그치는 등 강력한 패스트볼 - 폭포수 커브볼- 슬라이더 - 체인지업이라는 대단한 스터프를 견뎌낼만한 강력한 바디를 지니지 못했다. 결국 2004년을 기점으로 부상이 계속 악화되더니 어깨 부상까지 당하며 팔꿈치와 어깨에 모두 칼을 대는 신세가 되어 커브의 구사 비율을 줄이면서[5] 패스트볼의 구위를 상실한데다 고액 연봉의 값을 하지 못하는 먹튀가 되고 말았으며 해도해도 너무한 부상의 늪에 빠진 그에게 팬들도 점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무렵 구단에서는 전에 비해 굉장한 폭으로 하락한 헐값의 연봉을 오퍼하며 불펜투수로의 전향을 권유하여 우드도 동의했다.[6]
2.2 시카고를 떠나다
불펜으로 옮긴 것은 선수생명을 늘리는 데엔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우드에게는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심지어 불펜으로 웜업 지시를 내리는 전화가 올 때마다 깜짝 놀라면서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구위가 점점 올라오며 컵스의 필승계투조로 등극하였고 2007년 22경기 등판에 이어 2008년 비록 ERA는 높지만 34세이브를 거두며 올스타에 선정되어 부활의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몸상태를 확신하지 못했던 컵스 짐 헨드리 단장은 결국 그와 재계약을 포기했고, 우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2년 $20.5m의 계약을 맺으며 시카고를 떠난다.
2009년 인터리그에서 리글리 필드로 온 우드는 인디언스 유니폼을 입고 선 리글리 필드 마운드에서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는 명장면을 연출했지만 성적은 10m 연봉의 리그 최고 클로저의 면모와는 전혀 딴판으로 다시금 부상과 부진이 거듭되며 먹튀가 되고 말았다. 결국 부상과 불질을 거듭한 끝에 인디언스는 2010년 데드라인에 연봉보조를 하여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7]해버렸다.
이 당시 추신수와 그래디 사이즈모어 등 클리브랜드의 외야수들이 케리 우드가 마무리를 보러 올라오면 했던 뒷담화를 김형준 기자가 몇 년 후에야 공개를 했는데 서로 '야 또 케리 우드 올라온다' '우리의 경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 라는 자조섞인 잡담을 나눴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적은 양키스 입장에서 신의 한수가 되었고, 마리아노 리베라의 앞에서 던지는 셋업맨으로서 0점대 ERA를 찍으며 물론 피안타율이 적은 대신 볼질을 했다만 부활을 선언했다!
2.3 친정팀 복귀
하지만 그의 연봉에 대한 부담이 컸던 양키스는 11m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옵션을 포기했고, 우드는 FA가 되었다. 부활의 전조를 보인 그에게 많은 팀들이 관심을 보였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4m을 거절한 우드는 $1.5m이라는 헐값에 친정팀 시카고 컵스로 돌아왔다. 클리프 리, 제이슨 워스, 칼 크로포드라는 빅3가 무시무시한 계약들을 따내는 등 크고 아름다운 돈잔치가 벌어진 2010-11 오프시즌 FA시장에서 우드의 이 디스카운트 계약은 많은 올드비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감동을 자아냈다.
2011년에는 망했어요 모드가 된 시카고 컵스의 불펜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제 몫을 해준 우완 셋업맨으로서 컵스 팬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11년 종료 시점에서 연봉이 많이 상승할 것을 기대할 수 있지만 우드 본인은 컵스가 아니면 은퇴할 것이라면서 가족들도 시카고로 옮겨오는 등 컵스에서 커리어를 마칠 기세인데, 하필 헨드리 단장이 짤리고 오는 프런트가 테오 엡스타인 사단이라 약간 불안한 편. 아마 우드는 앞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테오가 팀 웨이크필드에게 그랬듯이 연봉 후려쳐지면서(...) 컵스의 노예가 될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즌 초 제구 난조로 부진에 빠지며 2패 ERA 8.64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다가 현지시간으로 5월 18일, 전격 은퇴 선언을 하였다. 마지막 경기에서 강판될 때 리글리 필드의 관중들은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줬다.
- ↑ 여담으로 미국에선 1월 SI지 커버 모델로 나온 스포츠 선수는 부상을 입는다는 저주가 있었고, 이 둘이 나왔을 때도 팬들은 설마설마 했는데..
- ↑ 아메리칸리그에서는 로저 클레멘스가 보스턴에서 달성한 적이 있고, 후에 랜디 존슨이 2001년 디백스 소속으로 기록했다.
- ↑ 연장 경기까지 포함하면 1920년 5월 1일 브루클린 다저스와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연장 26이닝 1:1 무승부 경기다. 당시 두 투수는 각각 26이닝 완투하였고 게임 스코어는 149, 141을 찍었다.
- ↑ 일부에서는 우드와 프라이어의 몰락을
빵집아저씨더스티 베이커 감독의 혹사 때문이라 하지만, 프라이어의 경우 inverted-W 같은 위험한 투구폼, 우드의 경우는 원래 유리몸 끼가 보였다는 등의 변명이 가능하다. 프라이어의 경우는 아직 논란이 많지만 우드의 경우는 유리몸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편. - ↑ 보통의 투수는 커브보다는 슬라이더 쪽이 팔꿈치의 무리를 준다고 알려져 있으나 우드의 경우에는 커브 쪽이 팔꿈치의 부담이 더 왔다고 한다.
- ↑ 대신 불펜으로 주로 뛰던 라이언 뎀스터가 컵스 스타팅 로테이션으로 옮겼고 지금까지 선발로 뛰고 있다.
- ↑ 우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박찬호가 지명할당되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