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토드 헬튼 (Todd Lynn Helton) |
생년월일 | 1973년 8월 20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테네시주 녹스빌 시 |
포지션 | 1루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95년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 |
소속팀 | 콜로라도 로키스(1997~2013) |
팀에서 17년을 지내다보니 산신령이 되었다(...) |
콜로라도 로키스 영구결번 |
17 |
토드 헬튼 |
2000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타격왕 | |||||
래리 워커 (콜로라도 로키스) | → | 토드 헬튼 (콜로라도 로키스) | → | 래리 워커 (콜로라도 로키스) |
2000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안타왕 | |||||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 | 토드 헬튼 (콜로라도 로키스) | → | 리치 오릴리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1 개요
미국 메이저리그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활약한 前 야구선수. 또한 로키스 역사에 남을 프랜차이즈 스타. 별명은 "The Toddfather"[1]
2 커리어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와 야구 둘 다 재능이 있었는데 미식축구 경기를 뛸 때는 쿼터백 포지션을 맡아 2772야드를 전진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야구 역시 고교 통산타율 6할 5푼의 고타율을 자랑했다. 하지만 미식축구는 테네시 대학교 입학 후 주전에서 밀려났는데, 이 때 헬튼을 밀어내고 주전 쿼터백이 된건 페이튼 매닝(...)[2] 슬럼프를 겪으며 미식축구에서는 기량은 떨어젔지만 야구는 최고 유망주에게 주는 상인 딕 하우저 트로피를 수상할 정도로 일취월장을 거듭해 실력을 쌓았다. 그 결과 1995년 콜로라도 로키스에 입단.
본격적인 빅리그는 1997년부터 출장했다. 첫 풀타임인 1998년부터는 꾸준히 성장을 하며 3할 중반대의 타격과 30~40홈런을 기록하며 팀 동료인 래리 워커와 함께 팀의 주포로 자리 매김한다. 2000년에는 커리어하이를 찍게 되는데 타율 .372, 안타 216개, 홈런 42개, 147타점, 2루타 59개, 그리고 OPS가 1.162! 타격 1위/ 홈런 공동 7위[3]/ 타점 1위/ 2루타 1위/ 최다안타 1위를 기록하며 왠만한 타격기록은 다 휩쓸었다.[4].
하지만 2000년 중반부터 노쇠화가 진행되어 홈런 생산이 줄기 시작하고 잔부상에 시달리지만 꾸준한 안타 생산능력은 시들지 않아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10년 연속 35개 이상의 2루타를 기록하기도 한다. 리그의 전형적인 더블머신. 그리고 알버트 푸홀스가 1루수로 정착하기 전까지 내셔널리그에서 최고의 수비를 자랑하는 1루수였다. 골드글러브 3회 수상.
파일:20071015 GamerHelton101507-p1.jpg |
2007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포효하는 헬튼 |
통산 타율은 0.316로 이보다 그가 활동할 당시에 이보다 높은 타율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알버트 푸홀스, 미겔 카브레라, 조 마우어, 스즈키 이치로 정도 밖에 없었다. 뛰어난 컨택 실력 외에도 눈야구에도 뛰어나서 출루율도 좋고, 부상 전에는 홈런 생산력도 빼어났기에 장타율도 좋았다. 하지만 2005년 종목을 막론하고 운동선수에게 치명적인 등부상을 당하면서 과거와 같은 파워를 보일 수 없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르러 자연스러운 노쇠화까지 겹치면서 헬튼의 장타력은 크게 감소하게 된다.[5]
사람에 따라 헬튼의 기록을 '구장빨'이라고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홈구장인 타자천국 투수지옥 쿠어스 필드에서 경기는 통산타율이 3할 4푼을 상회하지만 원정경기는 2할 8푼으로 3할이 채 안된다. 통칭 산사나이. 그리고 헬튼의 뒤를 이어 로키스의 차기 캡틴으로 기대받는 트로이 툴로위츠키가 산사나이 자리까지 이어받을듯 하다. 근데 하산했자나헬튼의 성적이 타율에서 알버트 푸홀스, 스즈키 이치로, 조 마우어랑 비교되는 수준이고 콜로라도에서만 10년 넘게 뛰어서 대표적인 산사나이 취급을 당하지만 콜로라도에서 뛰는 시절 홈과 어웨이의 타율 차이가 1할에 육박하는 맷 홀리데이와 래리 워커도 있었다[6]. 상대적으로 그리 심할 정도로 산사나이에 가까운 타입은 아니다.
록토버라는 기적같은 연승을 달린 팀과 함께 2007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이 것이 토드 헬튼 커리어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시리즈였다.
2011년에는 다시금 회춘해서 부활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홈런 생산은 나이 때문에 떨어졌지만, 고타율은 여전한 편. 결국 124 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02 14홈런, 69타점으로 시즌을 마무리 하였다.
그런데 2012년에는 부상이다 뭐다 해서 말아드셨고, 2013년 초에는 음주운전 적발이라는 악재를 만나게 되었다(...)
본인의 커리어 마지막 시즌인 2013년에는 그냥저냥 통산 스탯 까먹지 않는 선에서 다른 선수들과 출전 기회를 나눠받으며 평범한 성적을 냈다. 필요할 때 대타카드로도 나오며[7] 시즌 최종 124경기 출전에 99안타 15홈런 61타점 41득점을 올렸다. 9월 1일 대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MLB 통산 85번째로 2500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현지시간 9월 14일에는 트위터를 통해 17년간의 선수생활을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치퍼 존스나 마리아노 리베라처럼 떠들썩하게 작별하는 것보단 조용히 떠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 헬튼의 은퇴에 많은 팬들이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도 만약 복귀라도 하려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뜻의 선물을 받아먹은 분들보다는 부담이 덜할 듯 오랫동안 산신령으로서 산동네를 지켜오던 그도 오랜 산생활을 마치고 하산하게 됐다. 무슨 승부조작이나 약물 스캔들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그의 등번호는 (재키 로빈슨을 제외할 경우) 로키스 프랜차이즈 최초의 영구결번 지정이 확실하다. #
9월 25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펼치는 인터리그 홈 경기에서 가족을 동반한 은퇴식을 가졌다. 이날 시구는 그의 딸이 맡았고, 헬튼은 시포를 맡았다. 경기 내에서는 홈런을 포함한 2안타 3타점으로 마지막 은퇴경기를 개인 유종의 미로 장식했다.
2014년 8월 17일[8] 신시내티 전에서 그의 등번호 17번의 영구 결번식이 진행되었다. 윗 사진에서 보듯이 그의 가족들이 참석했고, 그와 6년간 선수생활을 같이했던 브래드 호프, 현역 콜로라도 선수인 벨라일이 그의 영구결번을 축하해주었다.
3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
로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인데다가 암흑기와 록토버 시절을 모두 경험한 선수로서 그의 등번호는 로키스의 영구결번이 되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명예의 전당 입성은 조금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 중론. 통산 비율 스탯만 보면 3-4-5라는 실로 아름다운 성적이지만 문제는 누적 스탯인데, 그의 포지션이 1루수였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통산 2519개의 안타와 369개의 홈런은 아무래도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4 이모저모
파일:Attachment/HELTONMAGU.png
참고로 온라인게임 마구마구 에서는 00년도 카드가 최고등급인 엘리트카드로 나와 있는데, 전체 엘리트카드중 파워/컨택 총합 능력치 1위 이다. 하지만 안습엘리트 카드인걸뭐 콜로라도 올스타에서도 01 카드에 밀려 안쓰임ㅜㅜ
로키스의 리더답게 선수들은 물론 구단 직원들에게도 살갑게 대하기로 유명했다. 그 일화로 김병현이 로키스로 이적을 했을 때 선수로서는 가장 먼저 다가가서 반겼다고 한다. 다만 알몸으로 맞이했다는게 에러...
로키스의 홈구장 쿠어스 필드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헬튼 버거를 팔고 있다.
미모의 아내 덕분인지 산신령이 되어버린 본인과 달리 딸들의 외모는 어머니를 닮아 출중하다.훌륭한 유전자 몰빵
1993년 창단된 콜로라도 로키스와 역사를 함께한 그야말로 프랜차이즈 스타에 걸맞는 커리어를 보냈다. 포스트시즌 경험은 2007년과 2009년 2번. [9]
전설적인 1루 견제 페이크 장면.- ↑ 한국으로 따지면 토부지정도
- ↑ 이 후 페이튼 매닝이 선수 말년에 로키스의 연고지인 덴버에 위치한 미식축구팀 덴버 브롱코스에 영입되어 슈퍼볼 50에서 팀을 우승시킨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인연이다.
- ↑ 투고타저이2010년대 후반 내셔널리그라면 여유있게 홈런 1위였겠지만 이 해의 내셔널리그에는 배리 본즈, 블라디미르 게레로, 제프 배그웰, 새미 소사, 게리 셰필드 등의 슬러거들이 즐비했다. 안습. 심지어 갑툭튀 플루크 시즌을 보낸 리차드 이달고에게까지 밀렸다!
- ↑ 하지만 NL MVP는 팀 성적이 너무 개판이었던 관계로 제프 켄트한테 헌납. 안습
- ↑ 이후 등부상으로 고생하던 헬튼은 2008년 최종적으로 디스크 판정을 받은 후 확연한 하락세를 타게 된다.
- ↑ 이 두 명은 모두 산을 내려왔고, 공교롭게도 (가장 표준적 구장이라 불리는 부시스타디움을 홈으로 사용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2명 모두 활약하면서 산동네 임팩트는 그냥 홈빨이었다는 것을 입증해냈다. 결과적으로 산에서 내려오기 전이나 후나 잘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던 것. 대체적으로 선구안으로 바탕으로하는 라인 드라이브형 타자들의 경우는 산을 내려와도 무난한 성적을 찍어주는 경향을 보였다. 본문의 토드 헬튼 역시 마찬가지의 경우. 반면
공갈포얻어 걸려라 방식의 어퍼 스윙 위주의 타자들은 모두 시망이었는데, 이 경우의 대표적 타자는 비니 카스티야. - ↑ 대표적으로 5/31 LA 다저스 전에서 브랜든 리그 상대로 날린 동점 투런포를 들 수 있겠다.
- ↑ 17년을 뛰었고 등번호 17번에 17일로 맞춘 의미있는 영결식
- ↑ 1995년 포스트시즌에는 로키스 소속이었지만 빅리그 경험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