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메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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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明天皇

일본의 역대 덴노
120대121대122대
닌코 덴노고메이 덴노메이지 덴노
사진 자료가 남아있는 최초의 덴노이다.
왕호고메이 덴노 (孝明天皇)
이름오사히토 (統仁)
생몰년도1831년 7월 22일 ~ 1867년 1월 30일
출생지일본 교토
사망지일본 교토 어소(御所)
재위기간1846년 3월 10일 ~ 1867년 1월 30일

일본의 121대 덴노이며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이다. 이름은 오사히토(統仁), 칭호는 히로노미야(煕宮)이다.

1 왕권의 강화

1846년에 즉위했으며, 당시는 덴노에게 아무런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개항 이전의 기록은 많지 않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가쿠슈인을 창설한 것도 이 양반. 여기까지라면 이전까지의 존재감이 극히 없던 에도 막부의 여느 덴노들처럼 그저 한 시대를 살다 갈 소시민에 불과했으나…

1853년 쿠로후네 사건이 터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개항하면서 고메이 덴노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한다. 안세이(安政) 5년(1858년) 7월 27일에는 40년 동안 조정을 주도하고 있던 태합(太閤) 다카쓰카사 마사미치(鷹司政通)의 나이란(內覽)[1] 직권을 정지시키고 출가할 것을 종용하는가 하면, 2달 뒤인 9월 4일에는 간파쿠(関白) 구조 히사타다(九条尚忠)[2]의 나이란 직권까지 정지시켰다. 막부 실권자들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할 정도면, 고메이 덴노가 평소부터 왕가의 권력 회복에 관심을 두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여지껏 덴노들이 이루고 싶어도 막부의 구조에 가로막혀 데꿀멍할 수밖에 없었던 숙원을 시대가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다.

이이 나오스케가 덴노의 칙허를 얻지 않고 서양과의 조약을 맺은 것에 화난 고메이 덴노는, 1863년에 양이(攘夷) 칙명을 내린다. 이 칙명이 일본에 큰 반향을 일으켜 일본에서 외국인을 습격하거나 SALHAE하는 사건이 빈발해 결국 이는 사쓰에이 전쟁이나 시모노세키 전쟁의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막부 타도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고메이는 막부의 쇄국 유지를 통한 현재 체제의 안정을 꾀한 것이었다. 본인은 덴노가와 쇼군가의 결혼도 주선하였으나… 그를 따르는 존왕양이파는 오히려 막부 타도 쪽으로 노선을 잡기 시작했다.

구미 열강도 일본을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면 이 작자가 상당히 방해가 된다는 것을 감안해, 1865년 자국의 함대가 오사카 만까지 들어오게 하는 덴노의 칙허를 요구한다. 사실상 "우리의 말을 안 들으면 대포 찜질이다!!"라는 식의 협박이라 덴노도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고메이 덴노 본인은 철저한 양이파라 이 해에는 궁중에 칩거하며 서양 의학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는 등 보수적인 자세는 무너뜨리지 않았다.[3]

2 말년

그의 노력으로 어쨌든 1860년대 후반에 들어 덴노의 발언권은 굉장히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양이파들은 시간이 갈수록 덴노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각자의 권력 쟁탈전에 집중하여, 덴노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조정의 위세를 내세워서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많아져 이에 덴노가 한탄하는 대목도 있다. 제2차 조슈 정벌을 명하는 칙명을 내렸으나 오쿠보 도시미치가 '의롭지 못한 칙명'이라고 디스하는가 하면, 이와쿠라 토모미도 "결국 이렇게 분열을 야기한 것도 다 덴노 때문 아닌가?"라고 말하는 등, 지지를 잃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비교적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 천연두로 사망한다. 향년 35세였다.

3 사후

3.1 일본 제국의 시작

고메이 덴노의 사후 즉위한 메이지 덴노는 고메이 덴노의 개혁을 바탕으로 서양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제국주의화에 힘썼고, 이로 인해 1868년 일본 제국이 탄생하였다. 더불어, 이 해에 러일전쟁의 패전국 러시아 제국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태어났다.

고메이 덴노는 어쩔 수 없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고, 메이지 덴노는 자진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므로 부자의 개혁 속도가 달랐다.

3.2 평가

공민왕, 이반 4세 등의 개혁 군주로 평가되지만 죽음과 관련한 의혹이 계속 돌아다니는데다가 말년에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고메이 덴노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자신의 개혁에 막부 측의 불만이 세질 것을 우려해 이복 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를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보내고, 개혁을 급진적이지 않고 비교적 온건적으로 실시하기를 원했다.(물론 이대로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일본이 멸망할 것이다 라는 위기의식도 있다.)

그리고 아들 메이지 덴노가 고메이 덴노의 개혁을 일부 반영해 일본 제국을 건설했으므로 메이지 덴노의 영향력에 묻혀 과소평가된 비운의 개혁군주라고 할 수 있겠다.

4 가족관계

닌코 덴노와 측실 오오기마치 나오코(正親町雅子)의 4남으로 태어났다. 이복 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和宮親子) 내친왕은 에도 막부 제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정실부인이 되었다.

  • 에이쇼 황후(英昭皇后) - 고메이 덴노의 정실. 고셋케(五攝家)[4] 중 하나인 쿠죠 가문의 딸로, 이름은 아사코(夙子)이다.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에게는 고모이자 시할머니가 된다. 두 딸 요리코(順子) 내친왕과 후키노미야(富貴宮) 내친왕을 낳았지만 모두 아기 때 죽었고, 이후 측실 소생인 사치노미야 무쓰히토 친왕을 양자로 맞이했다.

그 외에 두 측실에게서 아들 1명과 딸 2명을 더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고, 자녀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사치노미야 무쓰히토 친왕이 황위를 계승했다.

5 독살?

많은 세력과 갈등을 빚어온 덴노인지라 독살설이 존재한다. 이런 유형의 인물에는 항상 따라붙는 역사적 가십거리의 하나지만… 자세한 것은 메이지 덴노 대역설 참조
  1. 나이란(內覽)이라 함은 원래 궁에서 왕이 사용하는 창고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여기서는 섭정이나 관백(關伯)이 가지고 있던, 천황보다 먼저 조정의 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2. 에이쇼 황후의 친정아버지.
  3. 다만 유품 가운데 서양 시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 편리한 물건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4.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성립된, 후지와라 씨의 혈통을 이은 5개의 가문. 이치죠(一條), 니죠(二條), 쿠죠(九條), 고노에(近衛), 다카츠카사(鷹司).